돌아온 이곳에 ‘쌀롯’

마무리, 쉼

by 달여리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못 일어나 혹여나 버스를 놓치기라도 할까 선잠처럼 거의 밤을 지새우고 말았다. 결국 다섯 시에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준비를 얼른 마친 뒤 일찌감치 배낭을 메고 거리로 나섰다. 새벽의 무시아(Muxía)는 여전히 축축했지만 어둑한 하늘에는 선명하게도 별이 박혀있었다. 아무래도 날씨가 맑을 모양이다. 첫차로 예약하길 잘했지, 그 환한 무시아를 만나지 않고 떠나게 돼 다행이었다. 이왕이면 내게 무시아는 짙은 안개로 기억에 남길 바랐다.


항구에 서서 한참 동안 바다를 노려봤다. 무엇이 되었건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떠오르는 생각이라곤 한 톨조차 없었다. 말갛고 투명했다. 그저 바다의 물결만이 저기 나직한 소리로만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수면 위로 반사된 춤이 미리 배웅을 건넨다. 안녕이라 고한 뒤, 천천히 등을 돌려 버스정류장 앞으로 섰다.

<축축한 새벽의 무시아, 아디오스>

버스는 정확히 출발 10분 전에 왔다. 그리고 칼같이 출발했다. 중간 기점인 네그레이라(Negreira)엔 한 시간 후에 도착했다. 며칠 전 봤던 그 익숙한 거리들이 젖은 창문 너머로 또렷이 보였다. 고작 버스로 1시간이면 올 거리였다. 여기서부터 무시아까지 걸어선 4일이나 걸렸다. 시간보다 농도가 짙었던 그 기억을 이참에 잠시 추억했다. 비에 젖은 흙냄새가 열린 문틈으로 새어들었다. 희미하도록 파도 소리가 들려온 것도 같았다. 출발할 땐 한산했던 버스가 고새 만원이 됐다. 순례자는 의외로 몇 없고, 대부분이 산티아고까지 등교나 출근을 하시는 분들로 보였다.


차창으로 날이 밝아온다. 버스는 미끄러지듯 어느새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온통 월요일 아침의 분주함으로 가득했다. 배가 고팠다. 터미널 내 카페부터 들러 카페콘레체와 초코레또를 시켰다. 그러고 보니 순례길식 식사로 마저 마무리를 한 셈이 됐다. 일주일 전 걸어서 들어왔던 도시를 이번엔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고작 얼마 만인데도 그게 반갑고 또 익숙했다.

<버스는 달리고 달려 아침의 산티아고로>

여행자 신분으로 여행적 걸음을 옮겼다. 가로 우로 고개를 돌려대며, 도시를 활보하듯 구경하길 바빴다. 조금 걸어 오르니 곧 친숙한 거리가 나왔다. 예의상 우선 대성당으로 향했다. 그에 잘 다녀왔다 인사부터 드려야 했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광장 앞은 한산했다. 혼자서 인증샷도 찍으며 이제와 할 건 또 다했다. 어찌저찌 세워둔 배낭이 신기한지, 관광객들은 재밌어하며 사진을 찍어댔다. 한가로운 그 풍경이 죄다 흥미로웠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한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감회가 딱히 새롭진 않았지만, 이 순간만이 가지는 그 독특한 공기감이 있었다. 말하자면 그건 상당히 만족스러운 성질의 것이었다. 역시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다시 만난 같은 장면>

숙소는 지난번 묵었던 곳과 같은 아파트로 2박 예약해 뒀다. 다만 오후 3시 체크인이라 아직 시간이 한참이나 남았다. 광장에서 가만히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전혀 충분치가 않았다. 일어나 골목을 마구 배회했다. 눈에 띈 어느 가게에 들러 테이크아웃 피자를 사 먹었고, 풍요로운 분위기로 가득한 알라메다 공원(Parque da Alameda)에서 볕도 좀 쬐었다. 구석구석 샅샅이 훑어가며 거의 모든 기념품 가게에 들렀다. 아무것도 사지는 않았다. 내일 맘껏 기념품 플렉스를 하기 위해 일단의 시장조사만 해둔 셈이었다. 고만고만한 기념품들 사이에 그래도 마음에 드는 것들이 있었다. 같은 상품이라도 가게마다 가격이 천차만별이었다. 조금이라도 싼 곳 몇 군데를 미리 점찍어뒀다. 딱히 누구에게 줄 거라는 생각도 없이, 이런저런 기념 선물들을 잔뜩 사고 싶었다.


마트에 들러 2박 3일 동안 일용할 양식을 샀다. 그러곤 정확히 오후 3시 체크인을 했다. 분명 같은 금액대 방으로 예약했는데, 구조도 더 넓고 전망도 좋은 곳이었다. 또 이렇게 호강을 한다. 걷고 나서 누리는 뜻깊은 호사다. 짐을 대충 정리한 뒤 사 온 와인과 레몬펩시로 깔리무초부터 제조해 먹었다. 혼자서 마시기엔 이 조합이 딱이었다. 아, 맛 좋다. 하루의 기분이 이걸로 완성된다.

<2박 3일 동안 만난 그 산티아고의 표정들>

옷가지들부터 침낭까지, 싹 다 빨래를 돌리고 건조까지 마쳤다. 말끔하게 머리도 밀었다. 저녁으론 아주 제대로 요리를 해 먹었다. 든든해진 배처럼, 혼자만의 시간을 알차고 빡빡하게 채웠다. 그러는 사이 힘들었던 지난 순간들이 희미하게 잊혔다. 그저 당장 편한 이 마음이 그냥 좋았다. 끝났다는 실감만이 선명할 뿐이었다. 겨우 5일을 더 걷고 왔을 뿐인데, 어쩐지 두 번 가득 완주한 느낌이었다. 그 뿌듯함으로 다시 한번 토닥였다. 그래, 수.고.했.다.


돌아온 이곳에

”쌀롯!“


마음껏 자야지. 모든 창문을 닫고 커튼도 꽁꽁 쳤다. 영화도 보고 남은 와인도 홀짝홀짝 마셨다. 새벽 한 시까지 그러고 잘도 놀았다. 이러고 나니 또 내내 이랬던 것만 같았다. 여러모로 정리하고 결정해야 할 거리들이 산더미였는데, 그게 어찌나 귀찮은지 당장엔 정말인지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일단은 모든 걸 내일로 미뤘다. 아, 내일이 벌써 오늘이 됐지만 뭐 어쨌든.


잠이 쏟아졌다. 냅다 대자로 뻗어 누웠다. 푹신하고 뽀송한 침대의 감촉이 기억했던 대로 좋았다. 눈을 감자마자 모처럼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어둡고 깊은 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2024.11.11.

마무리, 쉼.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오늘 하루 17,181보(11.6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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