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피스테라-무시아 연장길) 40일 차
피스테라~무시아(≈28.61km)
길은 어제 끝이 났다. 하지만 마지막을 연명하듯 하루만 더 걸어가 보기로 했다. 이를테면 '끝'이라는 글자 뒤에 놓일 '마침표'를 찾으러 가는 여정이었다. 또 다른 세상의 끝, 무시아(Muxía)는 그 완벽한 목적지라 할 수 있었다. 이로서 산티아고순례길을 40일로 꽉 채운다. 시작으로 다시 돌아갈 용기를 겨우 그렇게 만들어간다.
아직 밤인 새벽 6시, 길을 나섰다. 예보대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비 위로 후둑후둑 빗방울이 굵게도 떨어졌다. 흐린 랜턴 빛에 시야도 멍했다. 얼마간은 그래도 가로등이 있어 괜찮았다. 또 잠을 설칠 줄만 알았는데, 웬걸 밤사이 한 번도 깨지 않고 모처럼 푹 잤다. 하지만 꿀잠과는 상관없이 다리엔 힘이 잘 안 들어갔다. 사력을 다하듯 걸음을 내디딜 수밖에 없었다. '끝'을 지난 길은 그리도 혹독한 것이었다.
해변 쪽으로 걷다 마을 뒤편으로 오른다. 반대쪽 아래로 골목의 가로등 불빛이 점점이 멀어져 갔다. 무시아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석이 나왔다. 건너편엔 피스테라(Fisterra) 방향 표지석도 있었다. 걷는 길 내내 양방향 표지석이 듬성듬성 번갈아 나왔다. 그러니 길을 찾는데 큰 무리는 없었다. 헷갈릴 때면 닌자(Ninja) 앱 GPS를 사용했다. 사실 오늘만큼은 길머리보다 정신머리를 붙잡는 게 더 어렵고 중했다.
바다 비린내가 짙게 났다. 묘지를 기점으로 가로등은 싹 사라지고 없었다. 비는 거의 폭우에 가까웠다. 한적한 마을과 마을 사이를 그 빗금 아래 숲으로 이었다. 개울물 소리도 들리고 멀리 강아지 짖는 소리도 들린다. 어느덧 소강상태가 된 비는 완전히 그치지 못하고 오락가락을 반복했다. 길도 오르고 내리길 자주였다. 상당히 가파른 구간도 꽤 있었다. 어두운 만큼 길의 형태를 미리 가늠하기란 어려웠다. 당장의 코앞에 닥친 걸음만 어떻게든 헤쳐나가며, 그렇게 언덕을 통과했다. 먼 마을의 닭들이 약이라도 올리는 듯 마구 울어댔다.
바다 바로 근처까지 왔나 보다. 낮고 큰 파도가 장면 없이 소리로만 들려왔다. 어둠 속 그 바다의 웅성거림이 문득 무서웠다. 컴컴한 그 소리만이 길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침착코자 나무 냄새를 맡는다. 물 가득 머금은 흙내도 묵묵했다. 그것이 위안이 된다. 두 다리가 닿은 땅의 촉감을 오직 믿는다.
8시 5분, 바다마을 Castrexe를 통과한다. 시야가 흐려 물웅덩이를 그대로 팡 밟아버리기도 했다. 땅은 아주 진창이었다. 그칠 듯 말 듯 비가 계속 됐다. 안개에 더한 습기, 안경에 물기까지 가득해 앞길은 더 뿌옜다. 답답했다. 몸은 더디고 걸음은 무겁고,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축축했다. 갈리시아(Galicia) 지방의 날씨를 이제야 이렇게 제대로 맛본다 생각했다. 하긴 그동안 날씨가 너무 좋긴 했지. 새소리, 안개비, 파도 소리, 끈적끈적 짠내, 질척한 흙길. 뭐, 다 좋았다. 싫어도 좋다 그리 말하련다.
길을 내린다. 비가 잠시 잦아든다. 9시 10분 Santo Estevo de Lires 마을에 도착했다. 중간 거점쯤 되는 곳이다. 필히 여기서 아침을 해결하고 가야 했다. 몸도 굶주림도 모두 그런 상태였다. 두 눈과 발이 분주해졌다. 인적이 적막하리만치 드물었다. 성당은 문을 열었는데 컴컴하니 텅 비었다. Bar와 알베르게 안내간판만 많지 문 연 곳은 하나 없다. 마땅한 곳을 찾느라 길에서 빠져 좀 헤맸다. 15분쯤을 그랬나, 마침내 한 곳을 찾았다. 안도의 한숨. 다행이었다. 까페콘레체와 초코레또를 시켰다. 정신이 나간 건지, 세요(sello)도 이 마을이 아닌 무시아 자리에 찍어버렸다. 이것마저 추억이 되겠지. 웃어넘겼다. 혼미할 정도로 벌써 피곤하긴 했다. 비까지 계속 맞아 더 그랬다.
나머지 절반쯤의 길이 남았다. 30분을 쉬고 다시 출발했다. 우비가 축축하다. 배낭 또한 천근만근이다. 비가 오는 날이면 짐도 몸도 더 무겁게 느껴지는 것만 같다. 비가 미웠다. 아랑곳도 없이 마을 다음은 숲길이었다. 나뭇잎에서 수도 없이 물방울이 떨어졌다. 투둑투둑 투두두둑. 그만 투정해라, 그렇게 말해주는 듯했다.
조용한 강을 돌다리로 건넜다. 갈색산을 넘는다. 10시 20분, frixe 마을을 지난다. 그 모래길을 걸었다. 무시아에서부터 걸어오는 순례자들을 처음으로 마주했다. 맞은편의 얼굴들과 부엔까미노 인사를 나눈다. 11시가 넘어가면서부터는 그런 사람들이 많아졌다. 어쩌면 무시아부터 들렀다 피스테라로 가는 게 보통의 루트인지도 몰랐다. 하나같이 웃는 표정들이었다. 아마도 나만 울상이었다.
슬금슬금 짜증이 좀 났다. 비도 오고 몸도 버거워 그랬다. 내내 시야가 가려진 데다 자꾸만 몸이 축축해져 힘들었다. 큰 한숨을 몇 번이고 내쉬었다. 그러다 마치 고해성사라도 하듯 혼잣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그간의 잘못과 못난 시간, 그 두서없는 삶에 대해 떠오르는 대로 아무렇게나 중얼댔다. 들어주는 이 하나 없지만, 하고 싶은 말은 다했다. 덕분에 마음이 조금씩 해갈돼 갔다. 그것으로도 감정은 족했다. 안개가 짙어서 모든 게 하얗다. 습한 공기에 짓눌린 온 세상이 마치 태고처럼 고요했다.
대체로 오르막이라 힘겨웠다. 습습한 풍경 위로 유령처럼 나타나던 사람들도 12시가 넘어가자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숲을 낀 아스팔트와 흙길을 번갈았다. 이제 4km 정도 남았다. 막판 스퍼트인양 이를 악 물었다. 안간힘을 가까스로 쥐어짜 내며 걸었다.
오르막은 어느덧 끝났다. 12시 15분, 숲을 한참 내려와 Xurarantes 마을이었다. 좁은 길 위에 양들이 많았다. 좀 더 내리자 한적한 도로가 나왔다. 그 도로를 따라 걸었다. 깊은 안개 때문인지 어딘가 사려니숲길과도 닮았다. 보이지 않는 파도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그러다 희미한 해변이 저 아래편으로 부드럽게 드러났다. 그렇게 무시아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이르게, 12시 50분이었다.
피스테라와는 또 다른 느낌의 동네였다. 날씨 때문에 더욱이 아련한 기분이었다. 예약한 알베르게가 바로 근처였지만, 들리지 않고 곧장 끝지점으로 향해 걸었다. 멈추지 않고 이 느낌을 그대로 최대한 잇고 싶었다. 그리 멀지는 않다. 공원을 통과해 해변 산책길을 따랐다. 뒤꿈치와 발가락이 아파 절뚝거렸지만, 다 왔는데 뭐 이쯤이야 괜찮았다. 해변의 돌담과 희미한 공기, 잔 물방울이 뒤섞인 파도도 적절했다. 또 다른 끝에 다다르고 있었다. 거기, 역시 Km 0.000 표지석이 서 있다.
바다 끝자락에 세워진 성당이 보였다. Santuario da Virxe da Barca. 경건한 음악소리가 바닷가로 은은히 흘러나와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안으로 들어가 우비를 벗고, 배낭과 스틱을 모두 내려놨다. 그 자리 그대로, 잠시 몸을 내맡겼다. 이제 이것으로 마침표다. 이 순간의 기분이 지금을 오롯이 인정했다.
그것은 일종의 침묵이었다.
안쪽 사무실로 들어가 '마지막' 세요(Sello)를 요청했다. 신부님께서 이제 길이 끝났냐고 물으신다. 생장부터 산티아고, 피스테라를 거쳐 여기 무시아에 도착했노라 고했다. 여기가 긴 순례길의 종착지라 말씀드렸다. 인자한 웃음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이시더니, 호쾌한 동작으로 큼지막한 도장을 꺼내오신다. 오아, 원더풀. 그리곤 의미심장한 표정.
"피니시!"
라고 크게 외치시며 마지막 장에 도장을 쾅. 아, 그대가 진정한 마침표셨군요. 연신 ”그라시아스, 무차스 그라시아스”만을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양손을 고이 모아 인사를 드렸다. 다음 없는 다음을 기약하며, 기억으로 사라질 얼굴을 감사히 나누었다. 장면은 영원 같은 찰나로 남았다.
후련했다. 긴장이 풀리자 몸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야말로 만신창이었다. 당장 움직일 수가 없었다. 성당의 맨 끝자리에서 한동안 엎드려 흘러나오는 음악에 그대로 잠겼다.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오히려 아무렇지가 않았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뿌듯함, 벅참, 즐거움 같은 것들이 안개처럼 군데군데 떠돌았다. 은은했고 익숙했다. 휴식했고, 안도했다.
길을 돌아 나와 예약해 둔 알베르게로 찾아갔다. 2시가 넘었던가. 웬걸 아는 얼굴이 뜬금없이 그 숙소에 있어 무척 놀라고 말았다. 덕분에 같이 식사도 했다. 샤워와 빨래를 하고 근처 빨래방에서 건조도 돌렸다. 정신이 차려질 때쯤 동네 산책을 누렸다. 혼자서 홀짝홀짝 깔리무초의 시간도 가졌다.
또 하나의 완주증이 생겼다. 무시아 완주증이다. 흐린 날의 무시아가 여기로 새겨진다. 안개 가득 휩싸인 땅 끝 성당의 그 공기감이 아직도 피부로 생생하다. 음악소리와 파도의 뒤섞임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럼 됐다. 이걸로 충분하다. 무시아의 기억은 이렇게 매듭 하자.
하루쯤 무시아에 더 머물까 했던 마음을 금방 접고, 내일 새벽 6시 15분발 산티아고행 버스를 곧장 예약했다. 이왕이면 미련 없도록 일찍 떠나고 싶었다. 그러니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침대에 커튼까지 달려 밤을 모른 척하기 딱 좋았다. 모처럼 안면몰수하고 알람까지 맞췄다. 돌아가자. 목적지이자, 원점으로. 무엇이 되었건 다시 시작할 자리로. 그 산티아고로.
2024.11.10.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피스테라-무시아 연장길)
40일 차(누적거리 889.14km)
오늘 하루 50,239보(32.5km)
*이 여정을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이 마음에 닿았다면, 구독과 라이킷으로 따뜻한 발자국을 남겨 주세요. 큰 힘이 됩니다. 작가나 브런치북을 구독하시면 새 글 소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앞으로 단 3화 만을 남겨둔 「비수기 3편,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b」는 다음주 월/수/금 오전 8시에 마지막으로 찾아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