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집, 변덕, 밍밍토록 띤도 데 베라노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 37일 차(피스테라-무시아 연장길2/5)

by 달여리
네그레이라~라고(≈28.42km)


어제 보다 빠른, 5시.


일어났다는 표현이 맞을까. 거진 잠을 설쳐 멍한 정신이었다. 습관처럼 짐부터 모두 챙겨 나왔다. 걷는 건 둘째치고, 이렇게 새벽 댓바람부터 비몽사몽 짐싸는 건 이제 좀 그만하고 싶었다. 걱정했듯 빨래가 살짝 덜 말랐다. 가방에 쟁겨넣느니 차라리 덜 마른 옷들로 그냥 갈아입었다. 온기로 녹여줄게. 36.5도 체온에 절로 마르길 기대했다. 부디 냄새만 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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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촉한 새벽>

6시에 출발. 다들 곤히 자고 있는 밤이었다. 두터운 안개로 뒤덮인 도시는 더없이 고요했다. 그래도 드문드문 지나가는 차들이 있어 오롯이 적적하지는 않았다. 아직 한창 어두운데도 부지런한 새들은 일찌감치 바빴다. 그 고운 노래가 운치좋은 리듬이 되어주었다. 가로등 덕분인지 마을의 외직 구석까지 나와서도 그리 무섭지는 않았다.


촉촉한 바닥이 푹신했다. 아마 축사로 보이는 건물들도 중간중간에 있었다. 길을 나설 땐 꽤 쌀쌀하다고 느꼈는데 어느덧 몸이 적당히 뜨거워졌다. 눅눅한 옷에도 고새 적응이 됐다. 분명 비는 아닌데 나무에서 계속 물방울 같은 게 떨어졌다. 점차 길은 어두워졌다. 가로등 없는 숲길로 들어 그제야 랜턴을 켰다. 아주 깊고도 으슥한 숲인 줄 알았는데 아주 가까운 곳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어두워서 뭔가 잘 보이지는 않았다.

241107_A1_041(edit2)(resize).jpg <굿모닝, 커피 한 잔의 여유>

도로와 숲길을 반복해 통과했다. 안개가 걷히고 나무들이 죄다 사라지자, 문득 하늘에 별이 많이 보였다. 부엉이 소리가 반가웠다. 이에 화답하듯 먼 마을의 꼬끼오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강아지까지 짖어댔다. 하얀 솜뭉치 같은 고양이도 만났다. 어둠 속에선 까마귀가 푸드득 날아올랐다. 숲길인가 밭길인가, 소똥 냄새가 진동을 했다. 오르막을 오르니 축축함 속에서도 땀이 샘솟았다.


7시 50분, 새로운 마을로 다가선다. 하늘 끝에서부터 붉은 기온이 서서히 차오르고 있었다. 저기 저 빛 같은 알베르게 bar가 언덕 위로 보인다. 계단을 일부러 더 올라가야 되는 곳이라 순간 망설여졌지만, 덕분에 멋진 하늘도 보고 커피와 빵으로 아침도 해결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은 듯한 순례자가 말을 걸어왔다. 이미 길을 시작했냐고, 새벽동안 여기까지 얼마나 걸어왔냐고. 6시에 출발해 8km 정도 걸어왔다고 하니 깜짝 놀란다. 그저 화답처럼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30분 정도 여명을 즐기며 쉬었다. 커피 한 잔의 여유가 분홍빛처럼 부드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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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7_A1_090(edit2)(resize).jpg <날은 서서히 아침으로 닿는다>

순례길 위에서 제일 좋아하는 순간인 아침빛의 길이 시작된다. 동쪽은 주홍, 서쪽은 분홍빛 보라색이다. 다채로운 하늘 아래 Pena 마을을 천천히 건너갔다. 이제 남은 길은 20km도 채 되지 않았다. 되도록 마음을 가볍게, 시선은 멀리 두고 걸었다.


새벽 어둠의 길을 타고 그사이 꽤나 높이 올라왔나 보다. 어느새 사방은 탁 트여 너른 전경을 뽐내고 있었다. 저 아래로 흐르는 골짜기 속 안개의 강이 아주 멋들어졌다. 오늘의 날씨 예보는 흐림이었는데, 웬걸 아침부터 햇살이 맑고 진했다. 마치 기대치 않던 선물을 받은 듯 얼굴이 잔뜩 싱글벙글이 됐다.


9시 20분, Vilaserío 마을에 도착했다. 마음과 달리, 다리의 조짐이 좋지 않았다. 괜찮아, 괜찮아. 살살 달래 가며 걸음을 조심조심 옮겼다. 이제 와 멈출 수도 없는 노릇. 별 탈 없기를 바라고 믿으며, 예의 힘 빼기 주법을 최대한 구사하려 노력했다. 슬슬 한 타임 쉬어가야겠다. 누적된 피로에 몸이 확연히 지치긴 지쳤다. 이 길은 어쩌면 미련의 길이다. 남들처럼 그냥 버스 투어로 떠났어야 하나, 후회 아니 후회도 살며시 들었다. 오락가락 갈팡질팡. 좋다 말았다, 하루에도 수십 번. 변덕도 이런 변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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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과 밭길을 통과한다>

오르막을 좀 올라 넓은 들판 언덕 위를 걷는다. 땀이 주룩주룩 떨어졌다. 11월인데도 더웠다. 오늘도 손빨래는 하겠지만, 이왕이면 돈을 내고 건조기는 돌리련다. 스믈스믈 희미한 쉰내. 다시는 덜 마른 옷은 입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내일은 비 예보까지 있었다. 오늘처럼 날씨가 마음을 바꿔 화창히 맑기를 간절히 바랐다.


11시, Santa Mariña 마을을 지난다. 마침 문을 연 알베르게 겸 bar가 있었다. 깔리무초를 시켰다. 여긴 콜라가 아니라 탄산수를 섞어주신다. 깔리무초라기엔 너무 띤또 데 베라노(Tinto de Verano)였다. 쓴 술 같아 영 입에는 맞지 않았다. 그래도 남기지 않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셨다. 넋 놓고 오래 쉬었다. 몸에서 열기처럼 쉬익쉬익 쇳소리라도 나는 것 같았다.


11시 40분, 다시 출발한다. 버려진 듯한 마을과 건물들을 지나며 땀과 고통이 서린 발걸음을 옮긴다. 진한 똥의 향기, 나른한 고양이와 강아지, 조근조근 주민들의 대화 소리... 지겹지도 않은지 또 오르막이 나왔다. 고작 얕은 언덕을 하나 넘어가는데 그게 무척 힘이 든다. 내내 없던 물집이 왜 이제야 생기는 건지. 왼발은 앞꿈치, 오른발은 뒤꿈치. 아프니 절뚝일 수밖에. 몸이 이제 그만 걸으라 신호를 보내는 걸까. 당장에 미치도록 힘들다. 그러나 더 걷고도 싶었다. 정말인지 이상할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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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을 넘어 오늘의 목적지 라고로 다다른다>

아니, 꽤 가파르다. 땀을 또 진짜 많이 쏟았다. 꼭대기로 올라서니 맞은편에 웬 호수 같은 게 보였다. 사방이 훤해 전망만은 후련했다. 이제 다 오른 언덕을 내려간다. 추수가 끝난 밭이 내겐 눈부신 풍경이 된다. 오늘치 마지막을 향해간다. 이 내리막 끝에 예약한 알베르게가 있다. 곧 라고(Lago)에 도착했다. 친절한 호스트의 안내에 따라 체크인을 했다. 도착시간 1시 10분, 첫 번째 숙박객이었다.


씻고 빨래하고 숙소 식당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었다. 작디작은 마을이라 어디 딴 데 갈 곳도 없었다. 느릿느릿 밀린 파일을 정리하고 찢어진 바람막이도 꿰맸다. 누워서 한참을 빈둥빈둥, 창밖으로 저물어가는 하늘도 바라봤다. 저녁 식사는 배낭에 있던 라면으로 뽀글이를 해 먹었다. 건조대에 널어둔 빨래가 기어코 마르지 않아, 동전을 넣고 맘 편히 건조기를 돌렸다. 저녁엔 맥주나 깔리무초 없이 커피와 물을 마셨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시간은 잘도 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9시가 넘었다. 두런두런 누워있다 스르르 잠을 청했다. 이렇게 피곤한데도 잠에 쉽게 들지 못했다.


내일 비 소식에 괜히 골치가 아프다. 일찍 출발하고 싶으면서도, 우비를 쓰고 걸을 어둠을 생각하니 불편하고 귀찮기 짝이 없었다. 어차피 알람 없이 일어나는데 이골이 났다. 아무런 긴장 없이 일단 잠을 자고, 몇 시에 일어나든 그 상황에 따라 맞춰 출발하기로 했다. (알람은 맞추지 않지만, 보통은 기상 시간을 특정한 뒤 긴장 상태로 잠든다.) 눈을 한참 감고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이 피어나며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겨있었다. 그래도 어느 순간 필름이 끊기긴 끊겼다.



2024.11.07.

걷기, 산티아고순례길-프랑스길(피스테라-무시아 연장길)

37일 차(누적거리 822.05km)

오늘 하루 44,659보(28.1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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