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3주 차
하루키가 물었다.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원래 어떤 것 인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글쎄, 내가 무언가를 추구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이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면 무언가를 열렬히 욕망해 본 적이 있긴 한가? 하는 질문이 따라온다.
나는 욕망의 항아리라는 표현을 더 많이 써왔다.
바라는 것이 너무 많아서, 가지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욕심이 너무 많아서. 너무, 너무, 너무.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존재할 틈이 없었다.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존재한 적 없다.
거기에, 원래를 붙인다.
처음부터 무언가를 바랐던 사람이 아니었을 터인데, 무언가를 갖고 싶어 하고, 욕심부리지 않았을 터인데.
어딘가에서 주워온 것들이 한데 모여서 욕망이 된다.
원래 욕망이 없던 나는 어떤 것 인가.
무대 위에 걸려있던 하얀 조명을 떠올린다.
흰색은 아무것도 더해지지 않은 색이지만, 흰 조명은 너무나도 많은 빛이 섞여서 만들어졌다.
하얀 조명이 나를 비추고 내가 준비된 말을 하면서 극이 시작하던 무대를 선명하게 기억한다. 나는 그 무대에서 영원히 내려왔다.
타인을 몸짓과 말로 표현하는 미래를 추구했었다.
꿈은 부유한 자들의 것이라는 말이 죽은 시대다.
나의 부모가 그랬듯이, 꿈은 부유한 자들이 가지는 것이라는 말이 죽은 시대다. 나는 그들에게서 가난을 핑계로 꿈을 버리는 것이야 말로 더 많은 가난을 물려주는 행위라는 것을 뼈저리게 배웠다.
나와 같은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삶을 추구했다.
약자는 더 약자로, 강자는 더 강자가 되는 시대다.
창의공학개론에서 ‘공학은 문제 해결을 위한 학문이다.’라는 말이 내 귀에 박히고 ‘기술로 사회 시스템을 보완하겠다.’라는 욕심을 부리기 시작한 지 10년이다. 나는 기술이야말로 이 세상을 움직이게 하는 근간이라고 생각했다.
기술은 뽐내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지탱하는 근간이 될 수 있는 커리어를 추구했다.
열렬히 추구한다라고 하기에는 추구하는 것이 항상 변화했다.
추구하는 것을 추구해왔다.
추구하지 않는 나 또한 추구하지 않는 걸 추구하는 모습일 것이다.
사실, 욕망이라고 부르던 그릇은 그릇만 있던 것이다.
정말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는 나를 생각해 본다.
무엇이 남을까?
빈 껍데기가 될까, 다시 무언가를 추구할 그릇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