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1주 차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왜 다시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었을까.
어쩌면 글을 쓴다는 마음 자체가 나한테는 사치여서 사치를 부리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인간은 반복되는 상실을 통해 그 가치를 깨닫는다. 나는 벌써 몇 명의 사람들을 잃어버렸는가, 그리고 그로 인해서 사람의 소중함은 얼마만큼 깨달았나, 그리고 내 곁에 남은 사람들의 소중함은 무엇에 비할 수 있나.
사실은 소중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으면서 사회가 소중하다고 세뇌시켜서 그대로 수용한 것일지도 모른다. 인생에 친구는 꼭 필요하다던가,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던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이야기들을 모아서 봤을 때 정말인가?라는 의문이 생기는 것을 보면 어쩌면 사회가 나를 세뇌시키는 것에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안다, 그게 아니라는 것을.
이 모든 것은 그냥 현실 부정이라는 것을. 사람한테 지쳐서 화풀이할 수 있는 곳이 없다는 사실마저 부정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사람에게서 상처받고 사람에게서 치유받는 이 아이러니한 알고리즘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끝까지 부정하고 싶다는 것을.
사람이 소중하지 않다고 내 입에서 뱉어내는 말들은 사실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부정을 부정하고 또 부정해서 부정이 됐다.
매일매일, 그리고 또 매일. 그렇게 나를 부정하는 것을 반복하고 있다. 나 스스로를 사랑하는 만큼 남을 사랑할 수 있다는데, 어쩌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평생 불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냥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한 채로 살아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다, 이제는 나도 나를 제법 아낄 줄 안다.
내가 나를 포기하고 싶어질 때 나오는 부정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부모님들이 내게 준 사랑은 어떤 형태였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크리스마스를 챙겨본 적도, 생일파티를 열었던 적도 없다. 생일선물, 생일축하, 졸업 축하, 시험 합격 축하, 내가 그들에게서 축하를 받아본 적이 있던가. 받은 것보다 준 것이 더 많았다. 길러주신 정 같은 건 옛적부터 부정해 왔다.
그들에게서 내 노력을 무관심으로 부정당하는 순간들에는 항상 친구들이 있어왔다.
우리 넷의 인생은 네 권의 책으로 나올 수 있을 만큼 힘든 인생을 살아왔다. 우리는 각자가 탈선하지 않을 수 있던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있었잖아.”
지금은 누가 내 옆에 있나, 그때를 지나온 우리가 남아있다. 그리고 지울 수 없는 전화번호들을 보며 우리가 네 명이 아닌 더 많은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챈다.
우리는 우리가 있다.
어쩌면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은 글을 쓸 수 있는 순간을 몇 번이고 잃어버린 후에야 얻은 결과물일지 모른다. 캘린더에 달아 둔 수많은 신인상 마감일들을 잊은 채 수차례 지나고 나서야, 그것이 내가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바라는 건 우리는 우리가 있었다고 기록할 수 있는 것뿐이다. 글을 쓴다는 것에 더 많은 의미를 가질 필요도 없고 신인상 접수를 못했다고 스스로에게 소홀했다고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걸.
부정을 부정하면 부정이다.
거기서 한 번만 더 부정하면 긍정이다.
한 번만 더, 느낌표 한 번만 더 붙이면 이 조건문은 통과한다.
한 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