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을까

나는 일머리를 키우고 싶지 않았다.

by 가애KAAE

어디서부터


부모님은 우리가 행복하다고 세뇌시켰다. 많은 부모님들이 그러하듯, NGO의 빈곤 포르노를 보며 '우리는 행복한 거야'라고 반복해서 이야기했다. 9살. 행복의 뜻을 주입당했다. 밥 먹는 데 문제없고, 학교 가는 데 문제없는 게 행복인 줄 알았다. 그리고 그게 틀린 것이라는 걸 알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빠와 할아버지의 사이는 살얼음을 넘어 당장 둘 중에 하나가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였다. TV로 금 모으기 운동을 지켜보던 시절, 할아버지는 직장을 잃은 자신의 큰아들에게 집을 사줬다. 그리고 자신의 밭과 논으로 불렀다.

할아버지의 첫 부인인 우리 할머니는 치아가 없으셨고, 우리 형편에 틀니는 꿈도 못 꿨다. 그 치아의 상실은 할아버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아빠 편이었다. 자신의 자식들을 낳은 부인을 버리고 새 부인이랑 살림 차린 노인네라니 끔찍했다.

틈만 나면 할아버지는 자기가 사준 집에서 나가라는 이야기를 했고 아빠는 허구한 날 우리 보고 할아버지가 짐 싸서 나가랬다며 화난 채로 집에 와 마당 정리를 했다. 한해, 두해, 그것이 반복될 때마다 단순 말뿐인 협박이라는 걸 알아챘다. 한해, 두해 그것이 반복될 때마다 나는 우울을 쌓았다. 어느샌가 그런 상황이 반복될 때마다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12살이었다.





죽음으로


항상 엄마도, 아빠도 의무감으로만 대하던 할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평소에는 짜증만 내던 둘도 그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구급차를 불렀고 차갑게 식은 할머니를 데려갔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저 학교를 가지 않는 게 좋았고, 시험을 보지 않아서 좋았다. 자기는 화장시켜서 제사 지내지 말라던 할머니의 말은 나만 들은 것처럼 담양전씨 선산에 묻히셨다. 20년 가까이가 된 지금도 너무 생생히 기억난다.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보내면서 산에 있는 칡이나 캐고 있던 사람들을. 나는 그런 할머니가 너무 가여웠다. 그렇게 교복 입은 내가 보고 싶고, 막내가 걷는 걸 보고 싶다던 할머니는 사라졌다. 내가 겪은 최초의 상실이었다.

최초의 상실 이후로 나는 더 많은 우울을 만들었다. 그 우울은 안개처럼 가라앉아 때로는 구름이 되고, 비가 되고, 눈이 되었다. 달이 푸르스름하게 뜨던 어느 날 내가 죽었을 때 슬퍼해줄 사람을 손에 꼽아봤다.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 나는 교복을 입었다.



나로


처음으로 스스로를 해친건 15살이었다. 죽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저 생각이 이끄는 대로, 꼭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바보같이 아픈 건 싫어서 심하게 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왔다. 나는 언제든지 내가 원할 때 떠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점쟁이는 나한테 그해 철이 들었다고 이야기했다.

성우가 하고 싶었다. 애니메이션을 좋아했고, 웹툰을 좋아했고 오타쿠라고 불리는 건 싫지만 또 오타쿠라고 티 내고 싶었다. 그때부터였을까 눈치를 잘 보기 시작했다. 가정에서 칭찬을 받아보지 못해 칭찬이 고팠고, 그 칭찬을 외부에서 충족할 수 있게끔. 외부활동을 늘렸다.

나는 타로카드를 배우고, 봉사활동을 다니고, 혼자 포토샵과 HTML을 공부했다. 나는 무엇이든 알아서 하는 딸이 되어있었다. 대학을 반대하는 부모님에게 반기를 들고 고향을 떠나 친구와 살면서 직장을 알아보고 수능을 준비하고 학교를 가고 장학금으로 학비를 해결하는 동안 내 학교생활에 대한 질문은 한건도 없었다.



그리고


이런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여 덕분에 나는 일을 못한다 소리는 신입때를 제외하고 듣지 않았다. 잘하고 있는 진 모르겠지만 일단 하다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생각한다.

그렇게 버텨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