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승 Aug 02. 2024

멍 때릴 수 있는 관계.


    나는 멍 때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런 생각하지 않고 멍 때리는 게 시간 아깝다. 그 시간에 사색하거나 주변을 관찰하는 게 더 좋다. 내가 생각하지 않는 건 잠자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럼에도 내가 좋든 말든 멍 때리는 순간은 드문드문 찾아온다. 그리고 달콤한 기분을 선사할 때가 있다.


    재작년 크리스마스, 친구와 부천역에서 멍 때리던 기억이 생각난다. 그날은 특별한 거 없는 보통의 겨울 날씨였고 코트를 입기에는 추운 딱 그 정도의 온도였다. 크리스마스 일정이 없던 나는 집에서 혼자 보내기 적적해서 친구와 부천역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친구와 나는 너무 심심한 나머지 일찍 나왔다. 오후 4시 밥 먹기는 애매한 시간, 크리스마스에  PC방을 가고 싶지 않은 두 남자는 딱히 할 게 없었다. 그러던 중 나는 갑자기 타로밀크티가 먹고 싶었다. 친구에게 공차에 가자고 말했고 친구는 알겠다고 했다.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카페 말고 선택지는 없었다.


    부천역 지하로 나오는 개찰구 앞, 푸드스트리트 입구 바로 오른쪽에 공차가 있다. 지하상가에 있는 옷가게처럼 외부와 공간이 분리되지 않는 매장이었다. 매장에는 협소한 테이블이 4개 정도 놓여있었다. 친구와 나는 음료를 주문하고 인용 테이블에 마주 앉아 음료를 기다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 말고는 매장에서 먹는 사람이 없었다. 크리스마스치고는 한산했다. 테이크아웃하는 사람 몇 명과 부천역 남부와 북부를 넘어가는 사람들의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지하천장을 타고 내 귀에 들어왔다. 나는 의자에 기대 허리를 피고 앞으로 고꾸라진 고개를 올려 오후의 여유로움을 느끼려는 찰나에 주문한 음료가 나왔다. 내가 주문한 건 타로밀크티 펄 추가, 나는 빨대를 꽂고 형용할 수 없는 타로밀크티의 걸쭉하면서도 중독적인 맛을 느꼈다.


    우린 음료를 마시면서 대화하다가 사람들을 구경했다. 가족끼리 외식했는지 부모님과 함께 걷는 아이들이 보였고 커플들이 팔짱을 끼며 걸어 다니는 모습, 혼자 선물을 들고 가는 여성분도 봤고 우리처럼 술 마시러 온 젊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냥 모두 즐거워 보였다. 그렇게 크리스마스의 행복한 상상에 빠져들다 보니 시간이 멈춘듯한 기분을 느꼈다.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다는 걸 잊어버리는 듯한 착각, 그게 생각인지 멍 때리고 있는 건지 타로밀크티의 오묘한 맛처럼 그런 감정이 머릿속에 퍼져나가더니 맑은 하늘 구름 속을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마주 앉아있는 친구 모습이 보였다. 그제야 나는 기분 좋은 멍을 때리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상대방과 있을 때 멍 때리는 건 상대에게 집중하지 않는 태도이기 때문에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상대방을 신경 쓰지 않고 멍 때릴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친밀한 관계니깐 가능한 것이다. 앞에 앉은 친구를 잊어버릴 정도 멍을 때리다니 내가 이 친구를 정말 편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웃음이 났다. 10년을 넘게 본 친구 얼굴이 오늘 처음 본 사람처럼 새롭게 느껴졌다. 때마침 친구와 눈이 마주쳤고 우린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았다.


이제 그만 나갈까?


이전 02화 해방촌에서 추억을 다시 정의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