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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승 Jul 26. 2024

해방촌에서 추억을 다시 정의하다.



    나는 서울에 살진 않지만 서울을 꽤 다녀봤다. 홍대부터 건대입구, 서울숲, 선유도공원, 여의도, 을지로, 용산, 예술의 전당 등등 그래서 웬만한 곳은 모르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작년에 친구가 내게 해방촌에 가자고 했다. 해방촌이 정확히 어딘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름부터 벌써 마음에 들었다. 해방촌.. 해방, 누구나 해방하고 싶은 것 하나쯤은 가슴속에 품고 살지 않는가. 작년 9월, 처음으로 해방촌에 간 그날의 조각들이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다.


    해방촌에 가려면 녹사평 2번 출구에서 쭉 걷다 보면 해방촌 입구가 나온다. 언덕 위에 있는 해방촌에 가려면 마을버스를 타거나 언덕까지 쭉 이어진 길을 걸어야 했다. 날씨가 더웠기에 나는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버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술집과 카페, 소품샵 등이 보였는데 동네 한적한 분위기와 번화가 그 중간쯤의 분위기를 내뿜었다. 등산은 정상에서 본 풍경이 가장 아름답다는 말처럼 여기도 언덕 정상쯤에 위치한 해방촌에 왔을 때 너무 좋았다. 언덕 위 해방촌에 핫플레이스라 불리는 신흥시장은 신기했다. 우리가 아는 일반시장이 아니다. 이름만 시장일 뿐  2, 3층으로 된 낮은 건물이 골목길 주변을 가득 채웠고 태양의 손길이 닿지 않아 시원한 공기가 나를 휘감았다. 곳곳에 작은 카페들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여유롭고 즐거워 보였다. 그리고 해방촌 가장 높은 곳에 펼쳐져있는 남산, 손 뻗으면 닿을 거 같은 남산타워가 뾰족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날은 구름이 흩뿌려진 하늘에 여름의 태양빛이 강렬했다. 진정한 하늘색을 마주할 수 있는 날이었다. 나는 탁 트여있는 장소를 태생적으로 좋아하는데 거기에 어울리는 카페에 갔다. 노출 콘크리트의 감성과 원목으로 채워진 가구, 이름 모르는 포스터, 흘러나오는 음악과 사람들의 목소리가 섞인 백색소음, 잎이 큰 이름 모를 화분, 무엇보다 내 눈을 사로잡은 건 벽 한쪽을 가득 채운 통 창문이었다. 우리는 그 창문을 마주 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았다. 창문 너머, 서울 도심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우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도 그 창문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카페에서 무슨 음료를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창가의 하늘과 서울도심의 풍경은 머릿속에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해가 질 때쯤 우리는 루프탑이 있는 펍에 가서 가볍게 맥주를 마셨다. 해질녘이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선홍빛 노을이 빌딩사이로 서서히 가라앉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주위 사람들은 노을 사진을 찍으면서 서로 감탄했다. 밤이 되자 하늘의 빛은 사라지고 건물들이 빛을 내뿜었다. 친구와 나는 루프탑을 빠져나와 해방촌에서 서울역까지 이어지는 남산 산책길을 걸었다. 듬성듬성 빛나는 가로등과 울창한 나무숲이 만들어 낸 그림자, 낮은 담장 너머로 보이는 서울의 밤하늘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그때의 기억을 가슴에 품고 1년 만에 다시 해방촌에 왔다. 하지만 그날과 다르게 그냥 그랬다. 땡볕이라 너무 뜨거웠고, 다시 가고 싶었던 카페는 사람이 많아서 기다리다가 포기했다. 결국 다른 카페에 갔지만 거기도 사람이 많아서 야외 테이블에 앉아야 했다. 서울도심이 아니라 남산타워를 마주 보는 카페였는데 저번에 왔을 때와 다르게 전혀 다른 경치를 즐길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 해방촌 왔던 그날만큼의 기분이 나지 않았다. 이미 한번 와봤다고 익숙해져 버린 걸까? 나는 곰곰이 다시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그때도 9월이어서 지금처럼 똑같이 더웠고 사람도 많았다. 가보고 싶었던 식당도 웨이팅이 너무 길어서 못 간걸로 기억한다. 왜 오늘은 그냥 그랬을까? 의 고민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마침내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시간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슨 경험을 한다고 해서 바로 추억이 되는 게 아니다. 시간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추억이 된다. 시간이 하는 일은 추억 속에서 다양한 감정중에 한 가지 감정만을 증폭시켜 머릿속에 각인시킨다. 그 작업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추억을 더 아름답게 만든다. 하지만 사람은 슬픔, 행복, 아름다움, 분노, 기쁨 등 다양한 감정을 동시다발적으로 느낀다. 추억의 강렬한 감정처럼 우린 지금 딱 한 가지 감정만을 온전히 느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추억을 제대로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그때의 감정이 정확히 어땠는지는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다. 추억에 빠져 현실을 망각하고 있는 나 자신을 마주하자 어리석은 행동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기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늘 하루가 또 다른 추억이 될 수 있게 지금을 잘 보내는 것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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