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겨울이 Jul 31. 2022

오늘이라는 감옥

- 매일이 새로워지는 달력

   

   찬바닥에서 눈을 떴다. 머리가 띵하고 몸이 찌뿌둥하다. 한밤중까지 식지 않는 더위로 잠을 설쳤다. 얇은 패드 하나만 깔고 잤더니 온 몸이 배긴다. 하지만 손을 뻗어 휴대폰을 보니 환한 화면에 떠오르는 오늘의 날짜. 희망적이다. 어젯밤에도 처진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오늘은 새로운 날이 왔다. 막 동이 트기 시작하는 새벽녘, 하루는 이제 시작이다. 


  어기적거리며 거실로 나와 창문을 연다. 맞은편 빌라 옥상 너머로 떠오르는 해가 불덩어리 같다.  초등학교 여름방학 시절, 새벽 6시에 학교 운동장에서 국민체조를 했었다. 방학이라고 늦잠을 자지 말라는 교장 선생님의 뜻깊은 방침으로 매일 손목에 도장을 찍고 개학식에서 상품도 받았다. 분명 저 시뻘건 해는 그때 운동장 뒤편 주택가 지붕 위로 눈부시게 떠오르던 그 해가 맞다. 오직 수십 년 나이를 먹었을 뿐 매일 아침 동쪽 하늘에서 서쪽 하늘로 여행을 하고 있다. 


  주방으로 와서 정수기 물을 따라 둥굴레 차를 끓인다. 유리 물병에 인스턴트커피를 한 움큼 털어 넣고 오늘 하루 마실 커피도  한가득 만들어 놓는다. 부모님이 자는 안방은 아직도 컴컴한 동굴 같다. 밤새 돌아간 선풍기가 힘이 빠져 덜덜거린다.


   마침내 부모님이 잠자리를 털고 일어나 혈당을 재고 고혈압 약을 먹는다. 집안은 된장찌개 끓이는 냄새와 굴비 굽는 연기로 가득 찬다.  거실 창을 열고 훤히 드러난 앞집 마당을 내다본다. 젊은 부부의 하얀 SUV는 그대로 있고 그 옆 빌라의 택시는 보이지 않는다.  정적이 흐르는 동네 풍경은 마치 시간이 멈춘 액자 속 그림 같다.


  아침을 먹고 설거지를 한 후, 쌓여 있는 빨래를 세탁기에 넣는다.  손세탁, 삶을 속옷, 탈수해도 되는 옷가지, 그냥 짜서 널어말려야 하는 옷. 어느덧 우편물이 올 시간이다. 계단을 몇 번이나 오르내린다. 어느덧 중천에 뜬 해가 이글이글 세상을 달군다. 잠시 하늘을 올려보다가 문득 현기증이 나 고개를 젓는다. 


  무더위로 입맛을 잃었다. 냉장고에는 늘 들어 있는 반찬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깻잎절임, 멸치볶음, 깍두기와 배추김치... 손에 잡히는 대로 반찬을 꺼내고 밥을 푼다. 점심을 마쳐도 아직 12시도 안 됐다. 좀 쉬려고 책상 앞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다. 


  오늘 올라온 뉴스 제목들을 훑어보며 심란해진다. 세상일은 늘 기대를 벗어난다. 내 생각이나 바람과는 영 딴 방향으로 흘러간다. 기사 아래 댓글들을 둘러보다 좀 더 다른 여론을 찾아보러 보폭을 넓힌다. 다른 포털을 기웃거리고 대형 커뮤니티를 순례한다. 게시물 아래 광고를 한번 클릭했다가 호기심에 다른 상품도 검색해본다.


  잡념은 계속 가지를 친다. 관심사를 찾는데 그 밑에 달려있는 다른 기사가 문득 눈길을 끈다.  영상을 누르자 갑자기 유튜브로 이동한다. 추천 동영상은 내가 잠자기 전에 휴대폰으로 듣곤 하는 뮤직 비디오를 친절하게 올려놓았다. 하지만 내 시선은 그 옆의 먹방 동영상에 이미 꽂힌 상태다.  넋을 놓고 감탄사를 연발하며 영상에 몰두한다. 점심 후 식곤증을 쫓으려 잠깐, 이라는 변명이 무색하게 어느덧 시간은 오후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이제 인터넷의 바다에 푹 빠져버렸다. 나는 잠수함처럼 더더욱 물속 깊이 가라앉는다. 빛도 들지 않고 오직 고요가 가득한 심해 한가운데다.  


  “아야야, 왜 이렇게 허리가 아프지? 어제는 괜찮았는데 오늘은 왜 이러지.”

안방에서 엄마가 나오며 푸념하는 소리에 언뜻 정신을 차린다. 분명 어제도 저 소리를 들었다. 엄마에게는 늘 저주받은 오늘이 되풀이된다. 어제는 컨디션이 좋았고 살만 했고 말짱했는데 오늘은 여기가 아프고 저기가 쑤시고 죽겠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면 또 어제는 아주 좋았는데 오늘은 왜 이렇게 못 살겠냐고 한다.  엄마는 '오늘'이라는 마법에 걸린 것 같다.

 

  인터넷 창을 끄고 워드 창을 띄운다. 텅 빈 화면을 마주하자 막막하고 뭔가 가슴을 짓누른다. 이미 정신은 산만하고 붕 뜬 상태다.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공연히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을 한번 나가보고 현관 밖도 기웃거려 본다. 그러다 다시 노트북 앞으로 돌아와 마우스를 만지작거린다. 잠시 머뭇거리다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인터넷을 켜고 만다. 이미 손가락은 내 의지를 벗어났다. 뭔가에 취한 것 같은 뇌가 마우스 질을 그만두게 허락하지 않는다. 흐려진 눈빛이 모니터 화면에 홀려있는 동안 창밖은 어느새 저물고 있다. 


  어둑해진 창문을 바라보니 죄책감이 밀려온다. 나 역시 '오늘'이라는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분명 어제저녁 지금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는 기억이 난다.  오늘 아침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가슴 벅찼던 새로운 하루는 어느새 온데간데없다. 오늘도 어제와 똑같은 하루를 보내고 말았다.


“평일에는... 힘든 일, 창피한 일, 무서운 일, 괴로운 일도 있고... 기쁜 일, 신나는 일도 있어요. 답답하고, 짜증 나고, 심심하고, 지루한 일도 많아요...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섞여서 하루가 되는 거예요.”

(동화 내일을 지우는 마법의 달력, 27p)


   '타임 루프'라는 영화 장르가 있다. 주인공이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면 어제와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설정이다. 주인공은 '오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온갖 시도를 다해 본다. 매번 허무하게 다시 똑같은 틀 속으로 튕겨져 들어가지만 아주 조금씩의 변화가 조용히 만들어진다. 바로 어제와 다른 방식을 택할 때다. 특히 하기 싫고 피하고 싶은 일들을 했을 때 결정적인 변화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하는 것은 어쩌면 익숙한 무언가와의 결별일 것이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시간은 8시를 넘어 9시로 향하고 있다. 오늘 하루도 몇 시간 남지 않았다. 오늘을 이대로 보내버리면 내일 아침 맞이할 '오늘'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 큰 마음을 먹고 심호흡을 한 후 일단 컴퓨터를 끈다. 폭발물 처리라도 하듯 조용히 인터넷 선을 뽑고 위험한 물건 바라보듯 거리두기를 시도한다.


   낮에 읽지 못한 책을 독서대에 펼친다. 독서대는 서서 볼 수 있는 높은 선반에 올린다. 앉는 대신 서서 책을 읽으니 조금 더 집중이 잘 된다.  골목엔 어둠이 깔리고 네모난 창문들만 환하게 밝혀져 있다.  까만 세상에 둥둥 떠 있는 불빛들은 시간이 지나자 차츰 하나둘씩 꺼져 간다. 마지막까지 깨어 있는 창문을 바라본다. 누군가도 오늘 하루의 끝자락을 오래 붙들고 있다.  

 



사진 출처: 픽사베이

매거진의 이전글 너의 목소리가 들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