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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이 Jan 14. 2023

고양이가 되고 싶은 밤

-고양이 편지


밤이 되면 고요한 어둠 속에 울려 퍼지는 소리가 있었다. 언뜻 들으면 아기 울음과 닮았지만 더 끈질기고 교태 넘치는 목청. 앙앙대다가 낑낑대고, 가냘프게 울다가 뭔가를 보채는 듯한 소리에 신경이 곧추섰다. 번식기 철이면 들려오는 길고양이들의 세레나데였다.      


고양이들은 다닥다닥 붙은 집들 사이의 좁은 통로를 미로처럼 돌아다니고 높이뛰기 놀이하듯 낮은 기와지붕 위로 훌쩍 올랐다. 뻥 뚫려 있는 빌라 주차장에 들어가 그늘 아래 웅크리고 있거나 주차된 차 아래 몸을 숨기고 잠을 청했다. 집 앞에 나와 있는 쓰레기 주변을 배회하다가 음식물이 섞여 있는 쓰레기봉투를 물어 뜯기도 했다. 

우리 동네는 오래된 단층 주택들과 3층 다가구, 다세대가 뒤섞여 있다. 길고양이들은 자연스러운 동네 풍경의 일부분이었지만 결코 환영받지 못하는 천덕꾸러기들이기도 했다. 모두가 길고양이를 싫어했다. 높은 곳을 좋아하는 고양이를 막으려고 지붕에 그물을 치고 고양이가 얼씬하지 못하게 독한 약을 뿌렸다. 고양이를 무서워하는 나는 어쩌다 길에서 그들과 마주치면 멀찍이 피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막다른 골목에 위치해 으슥한 데다 이웃집들에 둘러싸여 있는 우리 집이 언제부터인가 고양이들의 은밀한 통로가 됐다. 쓰레기를 버리러 마당에 나서면 자연스럽게(?) 철책 사이로 들어오는 회색 고양이와 마주쳤다. 골목 입구에서 우리 집 쪽으로 우아하게 걸어오는 누런 고양이와 시선을 부딪힌 것도 여러 번이다. 

털이 희끗희끗하고 덩치가 큰 회색이는 저를 보고 놀라 얼어붙는 나를 신경도 쓰지 않았다. 피하지도 도망치지도 않고 오히려 흘깃 째려본 후 유유히 내 앞을 지나쳐 집 뒤편으로 향했다. 마치 집주인이라도 되는 양 뻔뻔하고 태연스러운 자세였다.


집을 돌아가면 지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고 바로 뒷집 벽이 나온다. 고양이들은 낮은 담벼락을 훌쩍 뛰어넘어 뒷집 옥상을 올랐다. 평평한 슬래브 지붕에는 뒷집 아저씨가 공들여 가꾸는 채소와 화초가 자라는 화단이 있었다.      

겨울이 되자 화단이 텅 비었고 사람이 잘 올라오지 않자 고양이들은 그곳을 아지트 삼았다. 화단을 침대인양 흙 위에 몸을 길게 누이고 희미한 햇살 아래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그러다 밤이 되면 옥상은 본격적인 고양이들의 회합 장소로 변했다. 여러 마리가 모여 밤하늘을 바라보며 저마다 소리 높여 구애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마치 온 동네 고양이란 고양이는 모두 모인 듯한데 그때만큼은 어둠이 깔린 동네에 고양이들이 주인이었다.      

참다못한 뒷집 아저씨가 옥상에 올라와 큰소리로 고양이들을 쫓아낼 때까지는 그랬다. 한창 열을 내던 고양이들은 아저씨의 난입으로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고양이들의 파티가 막을 내리자 비로소 동네 밤에 적막이 찾아들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이 나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느 눈 온 다음 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무심코 계단 창문으로 뒷집 옥상을 내려다봤다. 어슴푸레한 하늘 아래 일찍부터 옥상 위에 고양이 두 마리가 보였다. 회색이와 친구로 보이는 검은 얼룩 고양이였다. 옥상엔 간밤에 내린 눈이 녹아서 물이 고여 있었는데 그들은 그 물을 마시러 온 것이었다. 

회색이는 열심히 홀짝거리며 혀를 내밀어 물을 핥아먹었다. 얼룩이는 옆에서 회색이를 지켜보며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회색이가 경계하는 표정으로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회색이는 한동안 나를 노려보다가 이내 다시 고개를 숙이고 물에 열중했다.           


그러고 보니 길고양이들이 목이 마르거나, 배가 고프거나, 새끼를 낳고 싶을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고양이들에게도 희로애락이 있고 생로병사가 있는 건 사람과 똑같다는 걸. 늘 보이던 고양이가 사라진 건 여행이나 이사를 가서가 아니라 죽었기 때문이라는 걸, 그래서 같은 고양이를 오래 보지 못하는 거라는 걸 깨닫지 못했다.     


“너는 네가 바라는 고양이가 될 수 있다. 어떤 고양이가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난 멋진 은빛 고양이가 될래! 아주 잘 달리는 고양이가 될래!”

인우가 눈을 반짝였다. 대장 고양이는 구름 뭉치에서 조그만 병을 집어 올렸다. 눈부신 에메랄드빛 액체가 담겨 있는 유리병이었다. 

“고양이 꿀이다. 이걸 몸 전체에 바르면 고양이가 될 수 있다. 단, 지금처럼 달이 뜬 후에만 말이지.”

P 36, 《〈고양이 편지〉, 후의 목소리》          


고양이들은 간밤에 어디서 눈을 붙였을까. 혹시 아침까지 실컷 놀다 갈증이 나 목을 축이러 온 것은 아닐까. 나는 동화적 상상에 불을 지펴 고양이들을 파티에서 돌아온 왕자와 공주로 만들었다. 

동화 속에서 고양이들은 사람에게 구박받고 쓰레기봉투나 뒤지는 구차한 존재들이 아니다. 밤이 오면 온 세상을 주름잡는 마법사들로 변신한다. 사람에게 편지를 쓸 수도 있고, 구름까지 뛰어오를 수도 있고, 무엇보다 ‘고양이 꿀’을 발라 사람을 고양이로 만들어 줄 수도 있다. 


고양이들이 밤마다 시끄러운 건 그래서였다. 달빛이 은은히 비추면 동네는 고양이들의 놀이터이자 독무대가 되니까. 밤이면 고양이 무리가 더 많아지는 것도 고양이로 변신한 사람이 그 속에 섞여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도 고양이로부터 편지를 받을 수 있을까. 고양이 꿀을 발라줄 인간으로 선택될 수 있을까. 

그러려면 먼저 실천해야 할 일이 있다. 고양이들에게 친절하고 잘해줄 것. 고양이를 잘 모시고 대접할 것. 고양이가 되면 뭘 할 건지 생각해 볼 것. 무엇보다 우선 어떤 고양이가 되고 싶은지부터 결정해야겠다.             



     


사진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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