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우리 집의 화장실은 늘 나의 콤플렉스였다. 변소라는 말이 더 정확한 그것은 집 외부 마당에 세워져 있었다. 부모님은 남들보다 빨리 집 장만을 한 편이었는데 현대식과 구식이 묘하게 뒤섞인 80년대풍 건축이었다. 그 시절에는 마당에 변소가 있는 집이 적지 않았다.
처음에는 화장실에는 집 안이 아닌, 마당 구석의 타일 바른 시멘트 건물이라는 사실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요즘처럼 화장실이 집 안에 몇 개씩, 심지어 부부 욕실이라는 이름으로 안방에까지 존재하던 시대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볼일을 볼 때마다 현관 밖으로 나가야 하고 바닥에 쪼그려 앉아야 하는 데다 심하게 냄새가 나는 재래식 변소가 점점 원시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파란 나무 문을 열면 늘 똥 냄새가 풍기고 발아래 시커먼 배설물이 쌓여 있는 화장실은 아무리 봐도 수치스러웠다.
바닥에 엉거주춤 앉아 아래를 흘깃 내려다보면 상당히 깊고 무시무시했다. 구덩이가 다 차면 분뇨처리 차량이 와서 똥을 퍼갔다. 아버지는 가끔 볼일을 보다가 주머니에 넣었던 안경을 몇 번이나 구멍 속에 빠트려 잃어버리곤 했다. 나는 가끔 그 구멍 속으로 다리가 빠지는 무서운 상상을 하곤 했다.
재래식 변소는 늘 귀신 이야기를 몰고 다녔다. 어둡고 냄새나고 불결하며 외떨어져 있는 공간. 엉덩이를 드러내고 무방비한 상태로 쪼그려 앉아 있으면 늘 조마조마했다. 뒤통수에서, 혹은 발아래에서 무언가 휙 나타나거나 불쑥 솟아오를 것 같아 두근두근했다. 특히 밤중에 변소에 가야 할 땐 두려움이 더했다.
“거참, 자꾸 똥통 똥통 거리네. 똥통에 누굴 빠뜨린다는 거야? 그런 짓을 왜 해?”
“그게 바로 내가 하는 일이니까 그렇지. 이래 봬도 난 변소각시라고. 뒷간 귀신이자 똥통 귀신이란 말이야. 화장실 귀신이라고 해야 알아들으려나?”
(으스스 변소각시, p26, 보리)
요덕이는 자기가 입양된 아이라도 상관없다. 하지만 엄마가 동생을 낳으러 병원에 간 새 집을 돌봐주러 온 할머니가 구박을 하자 그만 업둥이 신세가 서러워진다. 그런 요덕이 앞에 화장실에 사는 변소각시가 나타난다.
측간 귀신이라고도 불리는 변소 각시는 화장실에 살며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에게서 대접받아 왔다. 기척 없이 화장실에 불쑥 들어오는 사람은 변소각시에게 혼이 나고 똥통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세상이 변해 변소각시는 오히려 집안에서 쫓겨나게 되고 요덕이와 함께 새로운 거처를 찾으러 여러 신들을 찾아다닌다.
어린아이에게도 집을 나가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청소년만 돼도 ‘가출’이란 단어의 무게를 알았을 텐데, 집 떠나 모험을 하는 동화책을 많이 봐서인지 모른다. 가끔 엄마한테 부당하게 혼이 났다고 느꼈을 때, 그래서 엄마에게 복수를 하고 싶을 때 여봐란듯이 사라지고 싶었다.
하지만 나가봤자 골목 안이고 동네 안이지 어린애가 갈 데가 어디 있겠나. 현관문을 박차고 나와 마당을 빙빙 돌다 떠오른 곳이 바로 ‘변소’였다. 변소의 장점은 대체로 비어 있는 공간이라는 거였다.
후회하고 반성하며 나를 애타게 부르면서 동네를 헤매 다니는 엄마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나는 변소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쪼그려 앉아 숨을 죽였다. 아무도 집안에서 사라진 내가 변소에 들어앉아 있다고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내가 없어지면 엄마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좁은 집안을 뒤지기 시작할 것이다. 말도 없이 어딘가로 사라진 나를 찾으러 골목 밖까지 나가봤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버텼다.
하지만 좁고 냄새나는 변소 속에 웅크리고 있는 것이 쉽진 않았다. 온몸에 똥 냄새가 배일까 걱정도 되고 무엇보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직도 그때 생각을 하면 코끝에 그날의 변소를 가득 채우고 있던 구린내가 감돈다.
하지만 냄새보다 더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던 것은 왠지 시간이 갈수록 처량 맞게 느껴지는 그 상황, 그리고도 누군가 불쑥 변소 문을 열어 나를 발견하면 내가 당하게 될 수치였다. 한마디로 나는 변소에 숨은 아이가 되어버리는 거였다.
변소 각시, 다른 말로 측간신이 왜 비뚤어진 심술쟁이가 되었는지 알 것 같다. 사시사철 똥 냄새가 풍기고 춥고 지저분한 뒷간에 사는데 어떻게 마음이 비단결처럼 고와질 수 있을까.
집안의 따뜻하고 훈훈한 공기 속에서 화기애애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변소 각시는 저절로 마음이 싸늘해지고 가시가 돋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래서 뾰족해진 변소 각시는 누군가 자신의 공간을 침입할 때 미리 인기척을 하지 않으면 그만 그 사람에게 불벼락을 내리거나 똥통에 빠트려 벌을 줬을 것이다.
그날 변소에 한 한 시간이나 숨어 있었는지 모르겠다. 더 이상 똥 냄새를 견디지 못해 코가 문드러질 것 같아 슬며시 문을 열고 나와 집안으로 들어갔다. 마루는 오후의 햇살이 가득했고 안방에서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얼마 전까지 씩씩거리던 감정은 어디로 가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엄마는 궁금했으면서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 어디 갔었냐고. 말은 안 해도 엄마는 이미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잘난 척 뻐기며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냄새나고 춥고 고독한 변소에서 나는 충분히 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