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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 헤드린 Aug 30. 2024

'바라봄'에 대한 철학적 반성

철학도의 회상록-7

1. 들어가며


예전에는 정말 잘 사는 비싼 동네는 아파트에 별도의 주차 공간과 잔디밭이 있었습니다. 평범한 아파트에는 길가의 작은 화단이 전부였죠. 그래도 저희는 작은 화단에서도 곤충과 벌레를 찾으며 놀기도 했습니다. 요즘에는 대부분의 아파트에 놀이터가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놀이터의 아이들도 각각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현대의 아이들은 땀을 흘리고 흙과 식물을 뒤적이며 놀기보다, 전자기기로 온갖 다양한 내용의 동영상을 시청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점점 세상이 편함을 추구하듯, 우리 아이들의 놀이도 점점 편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에 따라 아이들의 시선도 자연과 환경에서 손 안의 액정으로 옮겨졌습니다. 이제 우리 아이들은 생물과 곤충을 보기 위해 채집 물건을 챙기고 발품을 팔 필요가 없습니다. 충전기를 꽂고 스마트 폰의 화면을 주시하기만 하면 되죠.

 

여러분은 어렸을 적 어떤 놀이를 하셨나요? 저는 한 살 어린 남동생이 있는데, 저와 동생은 둘이 함께라면 그 어떤 행위도 온 세상을 놀이터로 만들었습니다. 저희는 침대에서 식탁 밑으로 이동하며 놀았고, 욕실에서는 물놀이, 아파트 단지의 복도에서는 술래잡기 등을 하며 놀았습니다. 저희의 놀이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죠. 당시 우리에게는 스마트 폰이 없었고 게임 애플리케이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즐겁고 행복하게 놀았습니다. 그중 저희 형제가 즐겼던 놀이 중에 가장 기초적인 놀이는 '바라봄'이었습니다. 아무런 도구가 필요하지 않았죠. 당시 가장 편하고 쉬운 놀이였습니다. 저는 이번 글에서 어렸을 적 동생과 즐거웠던 순간을 회상하며, '바라봄의 놀이'를 철학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합니다.



2. 어렸을 적 '바라봄'의 놀이


저와 동생은 긴 복도가 있는 아파트에 살았었습니다. 그리고 복도는 밖으로 육각형 구멍이 뚫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밖에서 안쪽으로 사람이 지나다니는 그림자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도 홀수층과 짝수층 사이에 위치해서 두 개의 층이 하나의 엘리베이터를 사용했습니다. 엘리베이터도 3층까지는 서지 않고 4층부터 이용이 가능했고, '닫힘' 버튼은 늘 비활성화되어 있었습니다. 집집마다 집 앞 복도에 장독대나 자전거, 훌라후프, 우산 등을 놓기도 했습니다. 물론 소방법 위반이긴 합니다만 당시에는 서로서로 눈치 보며 허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아파트 구조는 어린아이들에게 있어 방대한 놀이동산과 같았습니다. 저희 라인에는 저희 형제와 같은 나이대에 남자 형제가 있었습니다. 형은 저보다 1살 많았고, 동생은 제 동생과 같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중에 형은 특히 식욕이 매우 강하고, 자기중심적인 성격을 지녔었습니다. 그래서 그 형제는 형과 동생이 2살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자주 싸우고는 했습니다. 그러면 저희 형제는 그 형에게 '돼지'라고 놀렸고, 그 형은 씩씩대면서 저희를 잡으려 쫓아왔습니다. 저희는 각자 흩어져서 복도의 끝에서 끝으로 물건들을 피해 달렸습니다. 지금과는 달리 몸도 가벼워서 하루 종일 달려도 지치지 않았죠. 그리고 복도의 물건을 피해 요리조리 달리다 보면 모굴 스키를 타는 것처럼 덩달아 신이 나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씩씩 거리며 쫓아오는 형은 달리기가 느리고 쉽게 숨이 차서 지치기 일쑤였습니다. 저와 동생은 이렇게 형을 놀리고 도망친 다음 복도 1층으로 조용히 내려가 아파트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1층 잔디밭에서 아파트를 올려다보며, 씩씩거리며 걸어 다니는 형과 형이 어디서 나올지 몰라 조심스레 도망가는 동생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희 형제는 아파트 복도를 올려다보며, 쫓고 도망가는 형제를 구경했습니다. 흥미가 식을 즈음에는 제가 다시 아파트로 들어가 형을 놀리고 도망을 갔습니다. 그리고  저는 복도에서 밖으로 나 있는 육각형 구멍에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그러면 동생은 1층에서 손짓으로 다른 형제가 있는 장소를 알려줍니다. 저는 이를 바탕으로 다른 형제가 다시 재회하도록 장난을 치곤 하였습니다.


이웃이었던 형제에게는 미안하지만, 저와 동생에게 있어서 이 놀이는 당시 최고의 유희거리였습니다. 이웃 형제는 불행하게도 우애가 좋지 못했고, 하루가 멀다 하고 서로를 잡으려 복도를 뛰었습니다. 그럴 때면 저와 동생은 어김없이 나와서 둘의 레이싱을 구경했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생각했습니다. '바라봄'의 입장이 가장 재밌다고 말입니다.


저희 형제는 '바라봄'을 놀이로 종종 만들었습니다. 한 번은 인근에 큰 백화점이 생겼었습니다. 그 백화점은 특이하게 창고의 형태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른들 말로는 다른 백화점과 다르게 외국 회사가 들어와서 지었다고 했습니다. 당시 동생과 저는 단순히 밖을 나간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했습니다. 그야 밖은 저희에게 새로움을 제공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외국의 회사가 지었다고 하니 더욱 기대가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백화점들의 이름을 정확히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어른들의 손에 따라가는 것뿐이었습니다. 훨씬 나중에 청소년이 되어서야 그 매장이 '코스트코'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아이들에게 코스트코는 대형 할인 매장 중에 하나일 수 있겠지만, 당시 처음 생겼을 때는 새로움과 이질감을 불러일으키는 건물이었습니다.


먼저 카트를 밀면서 전층을 돌 수 있는 점이 특별했습니다. 그리고 코스트코의 에스컬레이터는 계단이 아니라 비탈길입니다. 명칭 또한 무빙워커라고 부릅니다. 생전 처음 보는 비탈형 에스컬레이터를 보면서 동생과 신나게 달렸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저는 어린 생각에 바닥도 움직이고 방향도 상향이니, 제가 그 위를 달리면 평소보다 배로 빠름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아마도 저와 동생은 코스트코 직원분께서 사지 말라고 요청하시는 경고를 늘 위반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한 번은 동생이 무빙 워커 위에서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동생은 놀래서 저를 불렀고, 저는 동생의 행동을 따라 했습니다. 그러자 저희는 '움직이나 정지해 있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생이 손가락을 가리켰을 때, 저는 야릇한 정서를 느꼈습니다. 동생이 가리킨 방면은 바로 사람들이 밟고 있는 바닥의 단층이었습니다. 무빙 워커가 천천히 비탈로 내려가기 때문에, 층과 층 사이 위치에서 뒤로 걸어가면 층간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중간에서 고개를 돌리면, 사람들의 신발과 지면이 닿은 측면이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평소라면 볼 수 없는 장면이었죠. 저와 동생은 그 장면에 중독된 것처럼 한참을 바라봤습니다. 마치 개미가 된 것처럼, 사람들의 신발과 지면의 세계를 볼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 영수증을 흘리고, 영수증은 주차장 바닥을 떠다니다가 시야 밖으로 날아가고는 했습니다. 사람들은 저희가 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체, 땅에 흘리고 흘린 물건을 걷어차며 걸어 다녔습니다.


그렇게 잠시 쳐다보다가 저희를 찾는 부모님의 부름에 서둘러 매장으로 들어갔습니다. 평소처럼 매장을 둘러보던 저에게 개미집이 눈에 잡혔습니다. 저는 동생을 불러 가리켰습니다. 평소 저희는 개미집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집 앞 놀이터나 공터에 가면 모래와 개미가 있는데, 굳이 우리 집에 개미집을 놓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날은 저희에게 개미집이 특별해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저희가 무빙 워커에서 보았던 층의 단면과 개미집의 단면이 똑같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개미들은 저희가 보고 있는지도 모르고, 열심히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저희는 개미들의 주의를 끌어보려고 손가락을 측면을 두드렸으나, 개미들은 자기 할 일에 바쁠 뿐이었습니다.


출처: http://pabre.net/antgallery2/31519

그리고 하나의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개미가 인간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도 누군가에 의해 보이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마치 저희가 무빙 워커에서 사람들을 보고 있었으나, 사람들은 저희를 인지하지 못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에 동생은 아닐 것이라고 답하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우리 또한 누군가에 의해 관찰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지 않으냐고 물었습니다. 저희는 자연스레 천장에 있는 CCTV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CCTV의 너머에 누가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동생은 아마 또 다른 사람이 지켜보고 있을 것이라고 답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인간이 개미의 삶을 관찰하고 이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인간의 삶을 관찰하고 있는 인간보다 상위의 존재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저와 동생에게 '바라봄'이 하나의 놀이였던 것처럼 다른 존재가 인간의 삶을 바라보면서 유희를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 바라봄의 예능


많은 분들이 '바라봄의 예능'을 떠올릴 때, 현재 방영하고 있는 많은 '관찰예능'을 떠올리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현재 인기 있는 '관찰예능'은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라봄의 예능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관찰예능의 출연자들은 자신의 행동이 녹화되고 있으며, 패널 출연자들에게 보일 것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관찰예능을 표방하고 있는 프로그램을 잘 보면 '관찰'보다는 '노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출연자는 보여주고 싶은 자신의 모습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때때로는 이러저러한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의도가 명확히 보여서 눈살을 찢뿌리게 하기도 합니다. 의도적으로 연출된 외면은 '보여줌'에 해당하며, 이는 앞에서 설명한 저의 '바라봄의 놀이'와 다른 양상을 가집니다. 바라봄의 놀이는 대상의 자연스러움을 바라보아야 하며, 이를 위해서 대상은 자신이 보이고 있다는 점을 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카메라가 녹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늘 의식하고 있는 예능은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라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저는 과거 큰 인기를 끌었던 '이경규의 양심냉장고'가 '바라봄의 예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경규의 양심냉장고'는 신호등의 빨간 신호와 정지선을 지키는 운전자에게 양심 냉장고를 선물로 주는 예능입니다. 이경규 님과 스텝은 숨어서 도로 위 상황을 살펴봅니다. 그리고 신호와 정지선을 잘 지키는 운전자가 발견되면, 달려가 인터뷰를 하고 냉장고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호와 정지선을 어기며, 냉장고를 얻을 황금 같은 기회를 놓칩니다. 이를 바라보는 시청자들은 사람들의 솔직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정지선을 지키고 있었으나 늦게 진입한 차가 정지선을 어겨서 기회가 날아가는 경우도 있고, 혼자 빨리 가보겠다고 신호 위반을 하여 냉장고가 날아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저와 동생은 '양심냉장고'를 보면서 사람들을 응원하기도 하고, 어기는 사람을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경우에는 한두 명의 실수로 양심냉장고의 기회가 날아가는 것에 아쉬워했습니다.


이경규 님은 과거 '양심 냉장고'를 추억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회차는 바로 1화였다고 인터뷰했습니다. 밤늦은 시각까지 신호와 정지선을 지킨 운전자는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긴 녹화시간으로 다들 지쳐갈 때 즈음, 한 대의 경차가 신호를 지키며 멈춰 섰습니다. 그리고 시작된 인터뷰에서 운전자는 말합니다. "난 늘. 지. 켜. 요."

다소 취지는 다르지만 '백종원의 골목식당'도 비슷한 '바라봄'이 형성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전에 녹화 허락을 받고 카메라를 설치하나, 식당 주인의 반응을 보면 백종원 님의 방문 사실을 사전에 고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장님들은 불시에 방문한 백종원 님을 보며 놀라워하고, 동시에 부엌부터 요리 과정, 음식 재료관리 등 요식업을 하는 솔직한 모습이 적나라게 드러납니다. 각각의 사장님들은 위생의 문제, 원자재를 속이는 경우, 시청자를 기만하려는 시도 등 다양한 사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를 보다 보면 '차라리 맛이 없는 것이 가장 다행인 문제'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화려한 간판과 메뉴판의 모습과 달리 그 이면에는 불성실함과 불청결 그리고 기망행위가 대조됩니다.


하지만 그중에는 성실함과 특출 난 고집으로 시청자를 놀라게 하는 사장님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장님이 있는 회차는 사장님들의 꾸미지 않은 평소를 보여줬음에도 응원의 마음이 절로 납니다. 비좁고 허름한 가게와 달리 온정과 신념 그리고 노력의 빛이 대조됩니다.



4. '바라봄'에 대한 철학적 고찰


'바라봄'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피타고라스인데요. 우리가 수학 시간에 배우는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만든 인물입니다. 그는 '바라봄'을 '관조'라고 명명하며 특별한 행위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올림포스 경기장에 온 사람들을 예시를 듭니다. 그에 따르면 경기장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 부류의 사람들은 경기장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물건을 파는 상인들입니다. 이들은 경기에 관심이 있기보다는 자기 이익에 주목적이 있습니다. 이들이 경기에 관심을 가질 때에도 그 이유에는 그들의 수익과 관련이 되어 있기 때문이죠. 둘째 부류의 사람들은 경기장에서 명예를 위해 참가하고 있는 선수들과 관객들입니다. 선수들은 경기의 승리 또는 높은 기록, 자기 극복 등을 목표로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목적에는 성취에 따른 명예가 있죠. 관객들은 그런 선수들의 모습을 지켜봅니다. 그들은 선수들을 응원하고 선수들의 성취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부류는 경기장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관조하고 분석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경기의 승패에 관심이 없습니다. 또한 경기장에서 물건을 팔아 자기 이익을 얻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이들은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과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경기의 승패와 관객의 반응 그리고 선수들의 명예와 상인들의 이익 등이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파악하려고 합니다. 피타고라스는 경기장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관조하는 이들이 바로 철학자들이라고 설명합니다. 관조는 겉에 드러나는 현상의 표면에 멈추지 않습니다. 현상을 인지하고 그 이면에 있는 대상을 추구하죠. 그래서 관조는 형상의 아래 즉 형이상학적인 사고에 도달합니다.

또한 고대 철학자 플라톤의 테이테토스 174a-b를 보면, 탈레스에 대한 이야기에서 그를 바라보는 사람으로 설명합니다. 플라톤은 탈레스와 하녀의 일화를 말합니다. 어느 날 탈레스는 천체를 관측하기 위해 밤하늘을 바라보며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탈레스는 바로 앞에 있는 우물을 보지 못하고, 우물에 빠지게 됩니다. 이를 본 하녀는 탈레스에게 "그는 하늘의 것들을 보는데 열심이면서, 자기 앞 발치에 있는 것들은 알아채지 못하는군"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플라톤은 이 일화를 말하면서 철학자들은 때때로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에 눈이 멀 수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철학자들은 표면의 현상이 아니라 현상의 이면을 탐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플라톤은 말합니다. 철학자는 그 특유의 바라봄으로 도대체 인간이 무엇이며, 또 그런 존재의 본성에 다른 존재와 구별되는 능력과 행동이 무엇인지 탐색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피타고라스에 따르면 '바라봄'은 철학적인 근본 질문을 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됩니다. 어렸을 적 저의 '바라봄 놀이'를 보면 이는 경기장의 관객과 같은 즐거움으로 보입니다. 형제를 약 올리고 아파트 밖으로 나와 복도를 뛰어다니는 형을 지켜보는 것은 경기를 관람하는 관객의 입장입니다. 바라보는 그 행위 만으로 대상으로 인해 즐거울 수 있습니다.



반면 제가 무빙워커 위에서 지면 위를 바라보고, 개미집의 개미들을 바라보는 행위는 사뭇 다를 수 있습니다. 저는 무빙워크 위에서 사람들의 행동을 바라보고 평소 보지 못했던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 개미집을 바라보면서 인간이 마치 개미의 삶을 보고 분석하듯 초월적인 존재가 인간을 보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러한 바라봄은 피타고라스가 말하는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하는 '관조'로 볼 수 있습니다. '관조'는 일상의 익숙함에 감추어져 있던 사고를 드러냅니다. 그것은 삶을 바라보는 그 자체가 즐거움 일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을 바라보는 모든 행위가 즐거운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관조는 때때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잔혹한 진실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이경규의 양심냉장고를 보면서 교통법규를 지키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백종원의 골목식당을 보면서 비위생적이며 남을 기만하려 하는 사람들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러한 관조는 우리의 눈살을 찢뿌리게 합니다. 같은 '바라봄'의 행위에도 탈은폐되는 그 대상에 따라 우리는 다르게 반응합니다. 진실된 자신이 드러날 때 보기 좋은 사람이 있는 반면, 보기 나쁜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기 나쁜 사람들의 공통점에는 자신의 이면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원히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신념이 있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자신의 부끄러운 이면이 드러나도 이를 자신의 탓으로 인정하지 않기도 합니다. 끊임없이 핑계를 대고 자기 책임을 기피하면서 보는 이를 기만하려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면이 드러나도 다른 사람의 눈에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저는 이 질문의 답이 진정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보고 진정성이 없다고 합니다. 반면 진정성 있게 대하는 사람은 겉과 속이 같습니다. 흔히 상대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는 이들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관계에서 상대방과 어울림 자체를 목적으로 즐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선행을 목적으로 행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바라봄' 앞에서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관조를 통해 드러나는 그 내용이 더욱 그 사람의 됨됨이를 밝혀주기 때문입니다. 반면 진정성이 없는 이들은 상대를 수단으로 대하기도 합니다. 인간관계에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합니다. 그 대상과 어울림은 또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인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 겉과 속마음에 차이가 발생하고, 자신의 이면이 드러났을 때 상대방에게 눈살을 찢뿌리게 합니다.


5. 나가며


어렸을 적 '바라봄의 놀이'에서 시작해서, '바라봄의 예능' 그리고 관조에 대한 철학적 고찰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공통적으로 인간은 두 개의 눈이 앞을 향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눈은 신체의 눈으로 대상의 표면을 바라봅니다. 다른 눈은 사고의 눈입니다. 관조하고 질문하며 답을 구함으로써 현상의 이면에 감추어진 대상을 봅니다. 외면의 바라봄과 이면의 바라봄은 차이가 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 둘의 극심한 차이는 언젠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영원한 은폐는 없죠.


여럿 연예인들이 각종 논란이 불거져 사과와 은퇴, 심한 경우에는 경찰 조사와 소송에 휘말리기도 합니다. 이들을 보면 한 번쯤 '관찰 예능'에 출현했던 사람들입니다. 관찰 예능에서 보여준 모습에서는 그들의 논란과 범죄 사실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만큼 오늘날 관찰 예능은 그들의 진면목을 대변할 수는 없습니다. 관찰 예능의 모습은 편집되고 꾸며진 연출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만약 나의 삶이 바라봄의 대상이 된다면?'하고 고민해 보고는 합니다. 언젠가 이면이 드러날 순간을 두려워하기보다, 표면과 이면을 일치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벌써 글이 길어졌습니다. 그 만큼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뜻이겠죠. 이면이 드러나 수치심에 빠진 분에게는 심심한 위로를, 이면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마조마한 분들에게는 자기 내면을 바라보는 성찰을, 그리고 진정성을 가지고 삶을 이끌어가기 위해 노력하시는 분들에게는 응원과 지지를 보내드리고자 합니다. '바라봄'에 대해 떠오른 생각이 있으시다면 댓글로 본인의 생각을 적어주세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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