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TI T성향들을 위하여
나는 소위 MBTI에서 T성향으로, 공감을 하려 하기보다는 세상을 분명하게 보려 하는 편이다. 맞고 틀림 옳고 그럼, 흑과 백의 경계가 또렷해야 마음이 놓였다. 또렷이 보려 할수록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은 늘어났다. 생각이 다른 사람은 틀린 사람이 되었고, 그러는 사이 내 기준에서 이상한 사람은 점점 늘어갔다. 말로는 "그럴 수도 있지"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은 선을 진하게 긋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타인을 이해하려는 마음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럴 때는 소설이 치유가 된다고 했다. 사실 아이를 낳고 요시모토 바나나의 <스위트 히어애프터>를 끝으로 소설을 놓았다. 그렇게 육 년이 흘렀다. 너무 오랜만이라, 망설이다가 고전소설을 골랐다. 억지였다. 그래서인지 문장에 집중이 되지 않았고, 마음이 딴 데로 흐르기 일쑤였다.
고전소설은 멀게만 느껴졌고, 여러 번 읽어야 겨우 조금 알 것 같았지만, 그조차 확신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시간을 사는 사람들, 즉 현대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읽으면서 아주 조금씩 잃었던 마음을 되돌려 받는 기분이었다. 사람은 결국 자기 경험의 범위만큼만 이해한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 바깥에서 훨씬 더 다양하게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소설을 읽는다. 내가 아닌 타인의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보기 위해서. 공감의 훈련은 조용하지만, 매일 조금씩 나를 바꾼다. 판단은 빠르고 익숙한 반면, 이해는 느리고 낯설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없이 많은 생각을 토대로 결론을 내린다. 맞다 혹은 틀리다, 선과 악... 소설은 그 경계에서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을 조용히 가르쳐준다.
삶의 중요한 순간은 대부분 말로 설명되지 않는다. 왜 슬픈지, 왜 후회되는지, 왜 그때 돌아섰는지. 그런 것들은 말보다 오래 남는다. 소설은 그 말 너머의 감정을 문장으로 붙잡는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나하나의 인생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자주 느낀다. 어떤 감정은 내 삶에 없지만, 누군가에겐 그 감정이 하루를 지탱하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그럴 땐 조용히 머물러주는 것으로 충분할 때가 있다. 소설은 살아보지 못한 삶의 감각을 잠시 빌려준다. 현실에서는 무너지지 않으려 버티는 편이다. 슬퍼도 울고만 있을 수 없고, 괜찮지 않아도 웃으며 감정을 회피해야 할 때가 많다. 그런데 소설 속 어떤 장면 앞에서는 아무 이유 없이 눈물이 난다. 나는 그 감정의 대역을 소설에게 맡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빠르게 판단하라고, 정리하라고, 결론을 내리라고 세상은 재촉하지만 소설은 다르다. 소설은 결론보다 과정을 오래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 '어쩌면'이라는 단어를 꺼내어보게도 만든다. 나는 그걸 잊고 있었다. 아직도 누군가의 말에 선뜻 고개를 끄덕이지 못한다. 여전히 마음속 어딘가에선 판단하고 조용히 선을 긋고 있다. 하지만 아주 가끔, 소설 속 한 문장이 그 선을 흐리게 만든다. 그럴 때면 문득 생각이 든다. 사람을 이해한다는 건 어쩌면 끝까지 이해하지 못한 채 곁에 머무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오늘도 소설을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