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가고 봄이 온다 했다. 하지만 아침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고, 흙 속의 물기는 손끝에 닿자마자 스르르 스며들었다. 햇살은 고개를 들고 있긴 했지만, 아직은 마음껏 세상을 품을 준비가 덜 된 듯했다. 우리 집은 크지 않은 단독주택이다. 마당은 아주 작지만, 그 속엔 우리 가족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다. 포이와 함께 물놀이를 하며 튀긴 물자국, 담벼락엔 아이가 그린 색이 바랜 크레파스로 그린 해와 꽃, 그리고 강아지. 작년 봄, 포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널 때 은찬이는 이 담벼락 앞에서 울음을 삼키며 ‘또 만나자’고 속삭였었다.
“엄마, 여기 심자. 포이가 자주 누워 있던 데!”
은찬이가 삽을 들고 땅을 톡톡 두드렸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자두나무 묘목을 조심스럽게 안았다. 가지 끝엔 작은 싹이 올라오고 있었다. 아직은 연약하고 앳된 모습. 마치 처음 아이를 출산하고 아이를 안고 있던 그날 같았다. 차가운 공기 속 따뜻했던 아이.
“우리 은찬이, 삽질 도와줄 수 있어?”
“그럼요! 나 힘 엄청 세졌어!”
은찬이가 손바닥만 한 삽으로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이마엔 땀이 송글 맺혔고, 입가에는 잔뜩 집중한 표정이 어렸다. 나는 한 손으로 허리를 짚고, 다른 손으로 조심스럽게 구덩이를 더 깊게 파냈다. 허리를 숙일 때마다 묘하게 조여 오는 느낌이 있었지만, 오늘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싶었다. 손끝에 닿는 흙은 서늘했고, 간혹 돌이 걸릴 때마다 작은 통증이 손마디를 타고 올라왔다. 하지만 그 감각이 싫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을 뚜렷하게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으니까.
“엄마, 이 나무도 포이처럼 말 걸까?”
“응, 가끔은 속삭이기도 할 거야. 봄엔 꽃피웠다고, 여름엔 자두가 주렁주렁 맺혔다고 말이야.”
“그럼 내가 자두 많이 따줄게! 아빠한테도 주고, 엄마한테도!”
나는 웃으며 은찬이의 볼에 손을 댔다. 부드럽고 따뜻한 살결. 아이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기울였다.
“엄마 눈이 왜 그래?”
“햇빛이 너무 예뻐서 그런가 봐.”
나는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뜨겁고 서늘한 감정이 한데 섞여 있었지만, 지금은 그걸 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함께 묘목을 흙 속에 세웠다. 은찬이가 뿌리 주변에 흙을 덮고, 내가 단단히 눌러주었다. 은찬이는 마지막으로 두 손을 모아 꼭 눌렀다.
“자, 우리 나무야. 아프지 말고, 잘 자라!”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언젠가 이 나무가 커서 그늘이 되면, 그 아래서 같이 쉬자.”
바람이 살짝 불어와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멀리서 강아지 짖는 소리가 들렸고, 옆집 베란다에서 꽃을 돌보는 할머니가 조용히 웃고 있었다. 나는 다시 흙을 만졌다. 차갑지만 생명의 기운이 담긴 감촉. 좋다, 이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그날 밤, 나는 가방을 들고 조용히 거실로 나왔다. 모든 것이 고요했다. 마치 시간이 잠시 숨을 멈춘 것처럼, 집 안엔 낯선 적막이 내려앉아 있었다. 은찬이는 방문 너머에서 잔잔한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고, 영호는 불 꺼진 부엌 한가운데, 식탁에 홀로 앉아 있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 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고, 손끝에서 텀블러만 정적을 깨며 부딪히고 있었다. 무심한 듯 보이지만, 그 손끝의 움직임엔 무엇인가를 붙들고 있는 듯한 긴장이 서려 있었다.
“다녀올게,”
나는 조용히 말했다. 목소리를 최대한 평평하게 눌렀다. 감정이 삐져나오지 않도록, 흔들리지 않도록. 영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엔 말하지 못한 문장들이 수십 겹으로 얽혀 있었다. 입술이 살짝 들썩였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몇 번을 머뭇거리다 결국 그는 숨을 들이켜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그의 전부였다. 나는 식탁 옆에 잠시 멈춰 섰다. 영호는 내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한 채, 그저 눈앞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 속엔, 무너지지 않기 위한 버팀과 스스로를 다독이는 인내가 겹쳐 있었다.
“은찬이, 내일 유치원은 꼭 보내줘. 그리고 입원은 비밀로 해주고. ”
내가 말했다. 영호는 잠시 고개를 끄는 듯하더니, 나를 올려다봤다.
‘정말 그래야 해?’
입 밖에 꺼내지 않아도 전해지는 그 마음. 아이를 하루쯤은 집에 있게 해도 괜찮지 않을까, 내가 병원에 입원하는 날인데, 그걸 모른 채 책가방을 메고 등원하는 게 너무 잔인한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그의 눈 속에서 조용히 소용돌이쳤다. 하지만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은찬이는… 평소처럼 보내줘. 괜히 분위기 달라지면 더 예민해져. 오히려 더 힘들어질지도 몰라.”
영호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가 뜨고, 알겠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마음을 꺾는소리가 들린 듯했다. 그는 늘 그랬다. 말보다 먼저 이해하고, 침묵으로 동의하고, 말없이 버텨주는 사람. 그래서 더 미안하고, 더 고마운 사람. 나는 가방 끈을 다시 움켜쥐고 현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번, 뒤를 돌아봤다. 영호는 여전히 식탁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어깨는 축 처져 있었고, 입술이 살짝 떨렸다. 그 눈빛은 조용히 말하고 있었다.
‘아무 일 없이, 꼭 돌아와.’
나는 그 눈빛을 깊이 가슴에 눌러 담고, 작게 웃었다. 그리고 대문을 열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얼굴부터 쓰다듬었다. 예상치 못한 꽤 신선한 공기에 문득 용기가 생겼다. 그 밤, 병원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