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찬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돌아온 아침, 조용히 김밥을 꺼냈다. 어젯밤 남긴 것이라 치즈는 굳어 있었고 김은 눅눅했지만, 그걸 데워 먹을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게 이상하게 위안이 되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가, 그렇게 소중하게 느껴졌다.
얼음을 가득 채운 유리컵에 진한 커피를 내리고, 설거지는 저녁으로 미루기로 했다. 뿌연 아파트 숲 너머로 햇살이 조용히 번지고 있었다. 나는 소파 끝에 앉아 그 햇빛을 바라봤다. 몸을 조금 웅크린 채, 그저 숨을 쉬었다.
“그래, 이 정도면 괜찮지…”
혼잣말처럼 새어 나왔다. 누구에게 들려주려는 것도 아닌, 스스로에게 건네는 듯한 말. 그런데 그 말의 끝에서, 뭔가 마음이 걸렸다.
‘괜찮다’는 말은 요즘 너무 자주 들었다. 친구들도, 가족도, 심지어 병원에서도.
“요즘 다 그래요.”
“그래도 다행이네.”
“큰 병은 아니니까요.”
말은 분명 다정했고, 진심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말들은 내 안에 솟구치는 두려움을 감싸주지 못했다. 마음속에 둥둥 떠다니는 불안은, 그렇게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나는 김밥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그런데, 문득. 갑자기. 뭔가가 끓어올랐다.
울컥.
“나는… 안 괜찮다고.”
소리 없는 외침처럼, 입 안에서 터져 나왔다.
진심이었다. 나는 무서웠다. 아주 작고 조용한 종양들이, 언제 어떻게 나를 무너뜨릴지 몰랐다. 담낭 속 담석, 신장과 갑상선에 박힌 혹, 아무렇지 않은 척하던 몸이 하루아침에 내 등을 돌릴까 봐.
혹시 이 모든 게, 내가 아이를 두고 먼저 사라지게 되는 전조라면? 그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처음엔 부정했다. 담석쯤이야, 약이나 민간요법으로 녹일 수 있을 거라고. 종양은 오진일 거라고. 병원도 실수할 수 있는 거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부정은 허물처럼 벗겨졌다. 내 앞에 놓인 건 분명한 현실이었다.
머릿속은 소용돌이쳤다. ‘왜 나야? 왜 지금이야? 왜…!’
차가운 커피를 마셨다. 입안은 쓰디썼고, 한 모금 삼킬 때마다 가슴이 아렸다. 결국 싱크대 앞에 서서 그대로 게워냈다. 그리고 부엌 바닥에 주저앉았다. 등을 둥글게 말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바닥은 차가웠다. 등줄기엔 식은땀이 천천히 흘렀고, 가슴 한가운데가 보이지 않는 실로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눈가가 화끈거렸다.
거실엔 은찬이가 굴린 색연필과 “엄마 최고”라고 쓴 메모 조각이 나뒹굴고 있었다. 발바닥에 색연필 모서리가 살짝 닿았고, 그 뾰족한 감촉마저도 생생했다.
‘아직은 살아 있는 사람이구나, 나는.’
그런데 왜 자꾸, 이게 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까.
은찬이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갈색 유치원 가방을 메고 뒤뚱거리며 걸어가던 뒷모습. “엄마, 오늘 꼭 4시 반에 데리러 와야 해”라며 돌아보던 간절한 눈빛.
그 아이의 눈동자 속 ‘엄마’라는 존재는, 절대 사라지면 안 되는 존재였다.
그걸 지켜줄 수 있을까. 나는 그 미소를 끝까지 지킬 수 있을까.
무서웠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겨우 정신을 추스르고, 흘린 눈물을 닦았다. 화장을 다시 하고, 입꼬리를 억지로 올려보았다. 이젠 아이를 데리러 가야 했다. 나는 엄마니까.
유치원 앞에 섰다. 아이를 기다리는 유리문에 비친 내 얼굴은, 익숙하지만 낯설었다. 피곤하고 지친, 그래도 살아내려는 사람의 얼굴.
엄마들 틈에서 나는 안 보이는 사람처럼 풍경 속에 섞여 있었다. 해는 따뜻했고, 아이들 웃음소리는 천사 같았다.
멀리서 은찬이가 달려온다. 슈퍼맨처럼 팔을 앞으로 뻗은 채, 내 배를 치려는 장난스러운 몸짓.
나는 그 순간 온 힘을 다해 웃었다. 아이를 와락 안았다.
현실을 잠시 잊고 싶었다. 아니, 잊기로 했다.
은찬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는 속으로 말했다.
‘엄마는 너무 슬퍼. 널 못 보면 어쩌지? 그래도 꼭 지켜줄게. 엄마가 네 옆에 오래 있었으면 좋겠어.’
아이 손은 따뜻했지만, 내 마음은 아직 어디엔가 머물러 있었다.
무너지지 않기로 했다. 오늘은, 적어도 아이 앞에서는.
은찬이의 손을 더 단단히, 꼭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