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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로크무슈 Feb 20. 2024

덕업일치에 관하여 - 희망편


나는 맥주를 아주 좋아한다.


매끈한 유리잔에 들어찬 황금빛(또는 흑색)의 액체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순간이 좋다. 탄산 방울이 잔 벽을 따라 두둥실 위로 떠올라 거품으로 뭉치는 장면만큼 (개인적으로) 진정되는 순간이 없다. 한 모금 가득 머금으면 입안을 살살 긁는 간지러움과 쌉쌀한 맛, 비강을 따라 치고 올라오는 향의 조합이 좋다. 적당히 달콤씁쓸한 맛이 삼키고 난 후 입 안에 끈적하게 남아있는 그 느낌이 좋다.


이걸 위해 탕진하는 시간과 돈이 아깝지 않다. 

기분이 좋은 날에는 좋아서 마신다지만, 딱히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또 안 마시는 건 아니고. 


이런 내가 맥주 회사로 이직해 맥주 브랜드마케터가 되었다.

이 정도면 어디 가서 덕업일치했다고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


맥주 회사로 출근을 시작했다. 회사를 옮기면서 근처로 이사도 했다. 그럼에도 아침은 여전히 힘들다. 몸을 힘겹게 일으켜 샤워를 한다. 이직을 하며 가장 눈에 띄는 큰 변화는 샤워를 하며 욕을 한다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출근이라는 행위-저 안락한 현관문을 나서서, 우글우글한 사람의 파도를 타고, 버스와 지하철에 삼켜져(아니 파고 들어가서), 다시 사람의 파도를 타고 폐 가득 미세먼지를 채워 넣고야 도착하는-의 끝에 마주할 나의 '일'들이 부담스럽지 않게 되었다는 것.


출근 첫날 나를 가장 흥분시켰던 곳은 여러 나라에서 들여온 맥주의 샘플 창고였다. 먹고 싶어도 구할 수 없었던, 비싸서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던 맥주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경력직의 근엄함을 지켜야 했던 탓에 호들갑 떨 순 없었지만, 누구보다 빠르고 조용하게 창고를 스캔했다. 저것부터 먹어야지. 여러 선택지가 있었지만 여기로 이직해서 정말 다행이야.


제일 맛있는 맥주는 남이 사주는 맥주다. 불변의 진리. 거기에 회사 돈으로 사 먹는 맥주는 두배로 더 맛있다.

오히려 누군가에게 얻어먹는다는 죄책감도 없다. 회식 때도 평소 먹기 힘든 맥주가 있는 곳에 간다. 그럴 때에는 이 회사는 오래 다닐 수 있겠다 생각한다. 입사 후 가장 먼저 맡았던 프로젝트가 지역 수제맥주 축제의 스폰서십이었다. 덕분에 부산에 며칠 동안 머물며 전국에서 모인 맥주 브루어리들을 만나 인사하고, 대표 맥주들을 마셔볼 수 있었다. 좋아하는 것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기쁨에 취한 것인지, 몇 잔인지 세어보지도 못한 채 마셨던 맥주잔들 때문인지 잔뜩 기분이 좋았다.


이듬해에는 해외 출장에 다녀왔다. 더블린과 버밍험, 런던, 마드리드, 그라나다까지. 

아마 더블린에 도착하자마자 '킬케니(Kilkenny)*'를 마시러 뛰어갔었는데, 맥주 한 모금을 입에 넣자마자 회사에 충성을 다하자 생각했었다. '출장을 여행으로 셈해야 하나'라는 자문이 있었는데, 이번 출장으로 확실하게 마음이 정해졌다. 출장도 여행으로 셈할 수 있다. 이번 해외 출장에서 마신 맥주 사진들만 200장이 넘었다.


또 다른 큰 변화는 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보통 소개를 해야 하는 자리에서는 "안녕하세요, 저는 어쩌고 회사의 어쩌고라는 것을 담당하는 마케터입니다, 어쩌고가 뭐냐면요..." 늘 소개 자리면 구구절절 마케터가 되어야 했다. 가장 현실적으로 피부에 와닿는 변화는 이것인데, "OO회사에서 맥주 브랜딩을 하고 있습니다. 맥주가 좋아서 왔어요." 정도면 깔끔하게 내 소개를 끝낼 수 있다는 점. 약간의 부러움의 시선은 덤이다.


이 모든 것이 좋아하는 것을 일로 할 수 있게 된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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