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형 평가등급이 필요한 이유
회사에서 연말 평가를 마치고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번엔 좋은 등급을 받을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감에 부풀기도 하고, 반대로 어떤 등급을 받을지 몰라 불안과 초조함에 시달리기도 한다.
마침내 평가 결과가 공개되었을 때, 'B등급'이라는 결과를 받으면 자연스레 실망감이 들기 마련이다. 원칙적으로 B등급이라면 '중간은 간다'는 의미니까 나쁘지 않은 수준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나도 모르게 마음 한 켠에 아쉬움이 남는다.
회사의 평가제도는 직원들의 동기 부여와 심리 상태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A나 S등급을 받은 직원들은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느낌에 만족감을 느끼지만, B등급이나 그 이하를 받은 직원들에게는 평가로 인해 실망감과 좌절감을 겪기도 한다. 이런 부정적인 감정은 자신감의 하락으로 이어지고, 장기적으로는 업무 만족도와 조직에 대한 몰입도를 떨어뜨리게 된다.
왜 B등급은 이렇게 부정적인 감정을 만들어 낼까?
대학교에서 기업으로 확산된 SABCD 등급체계
현재 많은 국내기업들이 사용하고 있는 성과평가 등급체계는 SABCD 형태로 흔히 '학점형'이라고 불린다. 학점형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등급 체계는 대학교의 성적 시스템에서 기원했다.
1897년 미국의 마운트 홀리요크 칼리지 최초로 ABCDF 순으로 학생들의 성적을 매겼으며, 상위 성적에는 A등급, 하위에는 F등급을 배치하고 그 사이에 B, C, D를 두는 방식을 사용했다. 20세기 초반에는 이러한 등급 체계가 미국 전역의 대학과 중고등학교로 확산되었고, 오늘날 대부분의 학교가 동일한 방식을 따르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대부분의 대학이 ABCDF 방식을 채택하고 있으며, 2025년부터는 고교학점제의 일환으로 고등학교까지 확대될 예정이다.
이러한 ABCDF 등급체계는 이후 기업의 성과평가까지 확산되었다. 다만, 지나치게 부정적인 인식을 줄 수 있는 F등급을 제외하고, 대신 최고 성과자를 위한 S등급을 조정해 SABCD 형태로 재편성되었다. S등급은 90년대 후반 일본에서 유래하였는데, A등급보다 뛰어난 단계를 강조하기 위해 'Special' 또는 'Super'를 의미로 도입되었다. 이후 게임, 소설 등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자주 사용되며 친숙한 개념이 되었다.
성과평가에 SABCD 등급체계를 사용하는 것은 직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학생 시절부터 접해왔던 성적 평가 방식이기 때문에 결과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분명한 단점도 존재한다. 특히 B등급이 평균 또는 중간 성과를 의미하는 데도 불구하고, 직원들에게 부정적인 메세지를 전달하고 좌절감을 주는 원인이 된다.
SABCD 등급 체계에서는 B등급에 속하는 인원이 가장 많게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S등급은 상위 10%, A등급은 20%, B등급은 40%, C등급은 20%, D등급은 10% 정도로 정규분포를 그리는 것이 우리나라 기업에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전체 인원 중 다수를 차지하는 B등급에게 전달되는 메세지가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회사는 A등급이나 S등급 같은 상위 등급에 속한 인재들에게만 집중하고, '보통의 사람들'인 B등급 직원들의 경험에 대해서는 충분히 고민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B등급에서 느껴지는 부정적 반응은 사회적 인식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흔히 'B급'이라는 표현은 2류, 또는 그저 그런 수준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B급 영화'나 'B급 제품'는 품질이 낮거나 부족하다는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B급 스타'는 대중적이지 않고 미숙한 이미지가 연상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과평가에서 B등급을 받는다면 '나는 부족한 존재인가'라는 부정적인 자아 성찰로 이어지기 쉽다.
실제로 이러한 부정적인 인식 때문에, 'B등급'이라는 표현을 피하려는 사례도 여럿 존재한다. 예를 들어, 뮤지컬 좌석의 경우 VIP, R(Royal), S(Special), A, B, C 순으로 좌석의 등급을 정하는 등, 중간 등급을 B가 아닌 S등급으로 부여한다. 한우의 경우 1++, 1+, 1, 2, 3 순으로 등급을 부여하며 중간에 해당하는 등급이 1등급이라는 긍정적인 메세지를 부여한다. 이러한 예시는 중간등급이 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이라 볼 수 있다.
학점 인플레이션 현상 또한 B등급의 부정적 이미지를 심화하는 원인 중 하나이다. 대학교에서 B등급은 원래 중간 성적을 의미하지만, 학점 인플레이션이 심화되면서 B는 더 이상 '중간'이 아닌 경우가 많다. 특히 한국과 미국의 주요 대학들에서 A등급이 과도하게 부여되면서, B는 상대적으로 낮은 성적으로 여겨지게 된다.
대학교의 성적은 대학원 입시나 취업과 직결된다. 교수는 굳이 학생들에게 나쁜 성적을 줄 이유가 없다. 성적을 낮게 주면 학생과의 갈등이 생길 수 있고, 다른 교수들이 높은 성적을 부여할 경우 성적을 엄격하게 준 교수의 학생들이 불이익을 받게 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성적이 점점 상향 조정되면서, B등급의 의미가 퇴색되었다.
한국경제신문이 대학 공시 자료 4년치를 분석한 결과, 2022년 서울 주요 11개 대학(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서강대 성균관대 이화여대 한양대 중앙대 경희대 한국외국어대 서울시립대)의 A학점 비중은 51.3%에 달했다. 즉, 절반 이상의 학생이 A등급을 받는 상황에서 B등급은 더 이상 '중간을' 의미하지 않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2019년 뉴욕타임즈는 하버드 대학교의 학점 인플레이션을 풍자한 글이 기고되기도 했다. B+ 학점은 '폭행을 저지른 학생에게 부여된다', B 학점은 '교수가 농담으로 주는 등급'이며, 그마저도 나중에 더 높은 등급으로 바뀐다고 묘사되었다. 심지어 B 미만의 성적은 ‘전설 속에서만 존재하며, 농장 동물이 제출한 과제에 주어진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이러한 풍자가 등자할 만큼, B등급을 부여하는 일 자체가 드물고 기피되는 일로 여겨지고 있다.
정리하면, 학점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B등급은 더 이상 '보통'이 아닌 평균 이하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학점형' SABCD 등급체계는 오랜 기간 표준으로 자리 잡았지만, B등급을 받은 직원들에게 부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심각한 단점이 있다. B등급에 해당하는 직원의 비중이 가장 많은 상황에서, 중간 수준의 직원들에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주기 위한 등급체계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많은 기업에서도 '학점형' SABCD 등급체계에서 벗어나, 보다 의미를 부여한 형태의 '의미형' 등급체계를 도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삼성의 경우, 성과의 질적 차이를 강조하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Excellent Most, Excellent Some, Meet, Meet Some, Not Meet 등의 등급 명칭을 통해 단순히 등급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직원들의 성과가 구체적으로 어느 수준인지를 표현한다.
구글의 경우, 목표를 기준으로 등급명칭을 부여한다. Super, Strongly exceeds expectations, Exceeds expectations, Consistently meets expectations, Needs improvement와 같은 평가 등급은 직원들의 성과가 회사의 기대를 얼마나 충족했는지에 대해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러한 예시는 기업들이 중간등급의 직원들에게 보다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B등급이라는 명칭이 주는 부정적 인상을 피할 수 있게 노력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평가등급은 단순히 성과를 판단하는 도구가 아니라, 직원들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이다. '
특히, 조직에 가장 많은 중간등급, B등급에 속한 직원들이 평가 이후에도 동기부여를 느낄 수 있도록 평가등급체계는 개선되어야 한다. 등급체계의 변화는 조직 내 직원들의 만족도를 높이고, 장기적으로 성과를 향상시키는 열쇠가 될 것이다.
참고: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3051062581
https://www.nytimes.com/2013/12/15/opinion/sunday/leaked-harvards-grading-rubric.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