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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들deux맘 May 07. 2024

3,000만 원 우리의 전 재산을 가지고 밴쿠버로 가다

도망가자 어디든 가야 할 것만 같아


선우정아의 '도망가자'


도망가자
어디든 가야 할 것만 같아 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아 괜찮아
우리 가자 걱정은 잠시 내려놓고 대신 가볍게 짐을 챙기자
실컷 웃고 다시 돌아오자 거기서는 우리 아무 생각말자

도망가자 멀리 안 가도 괜찮을 거야

너와 함께라면 난 다 좋아
너의 맘이 편할 수 있는 곳 그게 어디든지 얘기해 줘


너랑 있을게 이렇게 손 내밀면 내가 잡을게

있을까, 두려울 게 어디를 간다 해도

우린 서로를 꼭 붙잡고 있으니


가보는 거야 달려도 볼까

어디로든 어떻게든 내가 옆에 있을게 마음껏 울어도 돼
그다음에 돌아오자 씩씩하게

지쳐도 돼 내가 안아줄게

찮아 좀 느려도 천천히 걸어도
나만은 너랑 갈 거야 어디든

당연해 가자 손잡고

사랑해 눈 맞춰줄래

너의 얼굴 위에 빛이 스며들 때까지
가보자 지금 나랑
도망가자


2021년 남편과 나에게 서로는 이해 못 할 각자의 힘듦이 찾아왔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고군분투하였다.

한때는 고통스러웠던 그 감정들이 신기하게도 점차 희미해져 가더라.

그리고 가까스로 일상으로 돌아갈 때쯤이었을까?

아픔과 고통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에서

그 어떤 것도 다시 '평범한 일상'이 될 수 없음을 느낀 우리는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었다.


노래 가사처럼

우리에게는 어떻게든 옆에 있을 '서로'가 있었고

이 시기가 지나 '씩씩하게' 돌아오고 싶었다.


열심히 짐을 쌌다.

밴쿠버는 감자 빼고 다 비싸다는데


노래 가사처럼

'가볍게 짐을 챙기고' 싶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우리에게는 엄마와 발가락이 똑 닮은 7살짜리, 아빠와 종아리가 똑 닮은 5살짜리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옷, 신발, 아이들 장난감 급기야는 집에서 쓰던 조리도구까지 다 챙기기로 했다.


국제선을 타는 4인 가족에게 허락된

위탁수화 8개, 기내 수화물 4개 그리고 백팩 4개


이렇게 최대한의 짐을 쌌다.


2022년 1월 27일


빽빽이 채워진 12개의 캐리어, 주머니 하나도 허투루 채우지 않은 4개의 백팩처럼

밴쿠버에서의 우리의 삶도 꽉 차길 기대하며 그곳으로 향했다.


수중에는 우리의 전재산 3,000만 원을 들고.




11시간의 긴 비행을 마치고

지칠 대로 지친 우리는 입국심사를 위해 이민국으로 갔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지는 엄숙한 분위기에 나는 재빨리 아이들의 입을 단속시키기 시작했다.

목마르다는 둘째의 성화에 신용카드를 들고 자판기를 서성대보지만 어찌 잘 되지 않는다.

옆에 계시던 청소하시는 분께서 친절하게 본인 동전을 꺼내어 음료수를 뽑아주신다.

이곳 캐나다에서 멕시칸처럼 보이는 그분에게서 한국의 정(情)을 느낄 수 있었다.

진정한 다인종 국가인 이곳

바로 캐나다


그렇게 오렌지맛 환타를 받아 들고 다시 이민국으로 가서 앉아있기를 두세 시간

도착한 날부터 2026년 3월 31까지

아빠는 Study  Permit

엄마는 Open Work Permit

아이들은 Visitor Record

이곳 캐나다에서의 4년 동안의 합법적 비자를 받고 이민국을 나섰다.


그리고 우리는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코로나 검사대로 향했다.


국민성의 차이인 것일까?

인구밀도의 차이인 것일까?

한국의 눈물 유발 코로나 검사(제발 좀 끝내주세요!)와는 달리

간질간질 재채기 유발 코로나 검사(설마 이게 끝인가요?)에 우리 모두는 피식 한번 웃어주고 그렇게 공항을 나왔다.


2년 전 그 당시에는 격리가 '형식적' 필수였다.

공항에서 한 코로나 검사결과를 다음 날에 이메일을 통해 알려주고 양성이면 스스로 격리, 음성이면 외출을 허가하는 시스템


하루 100불의  격리장소 비용이 부담스러웠지만 아이들 2명을 데리고 지인집에 머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밴쿠버 국제공항이 위치한 Richmond라는 도시에서 격리장소인 Coquitlam 까지는 차로 약 1시간이 걸린다.

Coquitlam이라는 도시는 Port Coquitlam, Port Moody와 함께  Tri-cities라고도 불린다.

감사하게도 남편의 오랜 지인분께서 공항으로 픽업을 와주셨는데 격리장소로 가는 내내 레인쿠버라는 명성답게 비가 내렸다.


그렇게 한 시간을 달려 우리의 격리 장소인 한 타운하우스 1층에 짐을 내렸다.


다음 날이 되자 시차적응으로 모두들 힘들었지만  남편만은 상당히 바빴다.

뼛속까지 철저한 계획형인 J 남편.

구글 지도엔 가본 곳은 별모양, 안 가 본 곳은 캐리어 모양으로 체크

전국, 전 세계 맛집 저장은 기본

스마트폰 달력은 총천연색의 집합소

중요한 모든 내용은 카톡 공지사항으로 남겨놓고

단 하나라도 변경사항이 생기면 잠결에도 업데이트하며

그 어떤 누락도 용납하지 않는 그.


남편은 한국에서부터 이미 도착 다음 날부터의 계획을 철저하게 짜놓고 저장해 놓았다.

시차적응은  건너편 집 아저씨의 일.

그저 본인이 짜 놓은 스케줄에 기계처럼 몸만 움직이면 될 뿐

계좌 계설을 위한 은행, SIN넘버(한국의 주민등록번호의 개념)를 위해 서비스 캐나다, 한국의 국제면허증과 캐나다 운전면허증의 '교환'을 위한 ICBC까지


그렇게 남편은 밴쿠버 입국 전 미리 짜놓은 계획대로

한 치의 오차나 , 실수 없이 5일간의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그리고는

장렬히 전사했다.


지난 1년간 말로만 듣던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 가족에게 침투한 것이다.

한국도 아닌 이곳 밴쿠버에서

그것도 도착 일주일 만에

그렇게 우리는 '공식적' 격리에 들어가야 했다.


남편은 숨을 쉴 수가 없다고 했다.

코로나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익히 보고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남편이 숨을 못 쉰다는데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국에서 바리바리 싸 들고 온 감기약들을 펼쳐 보지만 그 어디에도 숨 못 쉴 때 먹는 약은 보이지  않았다.

남편은 그 와중에 내가 죽으면 애들 데리고 마일리지로 비행기 티켓을 사서 한국으로 바로 들어가라는 말도 안 되는 '계획' 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도 하나하나 증상이 나타나고 고열에 설사, 구토까지 모든 코로나 증상들이 하루 만에 퍼졌다.


신 똑바로 차리자!

우린 살아남아야 한다!

4명 중 한 놈이라도 반드시 살아남아 우리 가정을 지켜내야 한다!

기억나는가?
6년 전 큰 아이 분만 시 느꼈던 생애 첫 진통.

그 진통을 이겨내야 아이도 살고, 나도 산다기에

난 간호사들 몰래 화장실에 들어가  벽에 머리를 쉴 새 없이 박으며 이를 악 물었다.

그렇게 길고 긴 진통을 참아내던 내가 아니던가!


그렇게 나는 타국에서 난데없이 폭발하는 모성애 본능과

지난 3년 간 스피닝과 스쾃으로 단련된 강철 아줌마 체력으로 우리 가족을 휩쓴 코로나바이러스를 가볍게 피해 갔다.


감사하게도

아이들은 이틀 만에 복되었고,

죽겠다 타령을 하던 그 순간에도 계획을 짜던 'J' 남편의 얼굴에도 조금씩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코로나로  2주 정도 고생한 남편이 얼마나 아팠는지는 몸무게가 말해준다.

2주 동안 15킬로가 급속도로 빠져버린 남편.

그리고 더 믿기 힘든 건 그 빠진 몸무게가 2년이 지난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

걱정이 되어 피검사, 초음파, CT까지 찍어봤지만 결과는 이상무!

그렇게 남편은 요즘 내 워너비 몸매가 되어 길고 늘씬한 다리와 가벼워진 몸으로 온 가족의 부러움을 사며 집안을 활보한다.


한국 면적의 100배 크기라는 광활한 이곳 캐나다.

자동차 구입이 급선무였다


찻값 17000불
자동차세 2605불
서류비 395불


이렇게 전재산 3.000만 원 중 2,000만 원을  중고 자동차 비용으로 지불을 하고

앞으로의 4년 동안 우리의 튼튼한 발이 되어줄 2016년 산 화이트 닛산 알티마를 만나게 되었다.



10일간의 격리  장소를 떠나 우리의 새 보금자리를 찾았다.

위치는 같은 Tri-cities 지역인 포트코퀴틀람

격리장소에서 불과 차로 10분 거리인 이곳의 렌트비는

보증금 800불에 월세 1600 불

지은 지 40년도 넘은 하우스 1층이었다.

5세 7세 남자아이들이라 무조건 1층 집을 구하기 원했는데 우여곡절 끝에 딱 맞는 집을 구하게 된 것이다.

이 동네 평균시세렌트비 2300불보다 보다 훨씬 싼 걸 감안하더라도  첫날 우리의 잠자리는 상상을 초월하도록 추웠다.

매트리스를 아직 구입하지 못한 우리는 간신히 아이들과 나만 얇은 토퍼 위에서 잠을 청했고, 남편은 과감히 바닥취침을 자처했다. 우리 모두 롱패딩을 입고 누웠지만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았다.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난 농담으로만 얘기하던 '이런 곳에서 자면 입 돌아가요' 레퍼토리가 실제로 이루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눈앞에 보이던 스토브(전기레인지)

나는 즉시 네 개의 화구를 가장 센 화력으로 틀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스토브에 내 손과 얼굴을 난로 쬐듯 쬐며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여기서 어떻게 살지요?

도대체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 건가요?

빨리 한국가게 해 주세요


그리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바닥에 누워 간신히 잠을 청했다.


차 2천만 원

10일 간 격리장소비용 백만 원

자동차 보험 매 달 26만 원

보증금 80만 원

월세 160만 원

세입자 보험 매 달 40만 원

티브이, 소파. 식탁, 책장, 전기제품 등 필요한 물품구입에  300만 원

그리고 2인용 전기장판 두 개에 20만 원


수중에 남은 돈은 달랑 3백만 정도였을까?

그렇게 우리는 밴쿠버의 진짜 라이프를 시작하게 되었다.


비록 수중에 여유로운 돈은 없었지만

우리에겐 '서로'가  있었고

우리를 똑 닮은 '사랑하는 아들'들이 있으니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행복했다.

그걸로 충분했다.


도망가자

어디든 가야 할 것만 같아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아

괜찮아 우리 가자


그렇게 이곳에 왔고

지금부터 4년을 잘 보내고

노래가사처럼 '씩씩하게' 돌아갈 때까지 어떻게든 견뎌보자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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