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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들deux맘 May 23. 2024

팸닥이 뭐죠?(밴쿠버 의료시스템의 모든 것)

평범한 아줌마 헬로카봇의 '차탄엄마' 되다.

세계에서 살기 좋은 도시 중 하나인 밴쿠버

동시에 살기 비싼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한 밴쿠버

2년 전 이곳에 올 때 특별한 준비나 계획 없이

조금은 급하게 온 유학이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힘든 점이 많았다.

그중에 제일은 뭐니 뭐니 해도 MONEY!!

전 재산 3,000만 원은 중고차 구입과 필요한 곳에 알뜰살뜰 야무지게 쓰고 수중에 남은 건 300만 원 남짓.

가까스로 코로나로부터 회복된 남편과 아이 둘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한 번의 모성본능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특히 남편은 그 당시 심적으로도 많이 지친 상태였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자주 보던 만화 '헬로카봇'

극 중의 차탄엄마는 갖고 있는 자격증만 해도 수백 개다.

경찰이었던 남편의 실직사실을 알고 곧바로 '나만 믿고 따라와' 모드로 변하여 남편을 위로하고 집안을 문제없이 이끌어나간다.


결혼 전 흔하디 흔한 워드자격증도 없던 나는

남편과 결혼한 이후 조금씩 차탄 엄마가 되어가고 있었다.

태국 선교사 지망생이었던 남편의 권유에

12개월, 29개월 아들 둘을 가족처럼 친분이 있는 교회 권사님께 맡기고 일주일 동안 GMS 본부에 머물며  LMTC선교훈련을 받았다.

이후 선교지에서 필요한 한국어교원자격증 2급도 획득하였다.

그리고 캐나다 입국 일주일 전에 우연히 알게 된 캐나다 보육교사 ECE 자격증준비도 이미 진행 중이었다.


사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나는 결혼 전 영어학원 강사로 일했기에 가르치는 일이 제일 익숙하다.


밴쿠버 입국 전 CLC교육센터라는 곳에 영어강사로 지원을 하였고 면접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곳 초중고에서는 무엇을 가르치는지 전혀 몰랐지만, 선(先) 지원  후(後) 수업준비를 하면 일이었다.    


그리고 밴쿠버 도착 날 지인목사님께 잠시 들었던 초밥집 tip이야기.

팁의 세계에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나는 서빙경험은 없지만 도전해보고 싶었다.

밴쿠버 도착 4일 만에 그 당시 격리장소 근처에 있는 스시집에서 서버 트레이닝을 받았다.

일은 힘들지 않았지만 옆에서 함께 일하며 알려주는 로컬여자분이 자꾸 나보고 귀엽다고 한다.

일이 서툴러서 귀엽게 보이나? 생각을 했지만 날 쳐다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다.

직접 주문을 받아 서빙도 해보고 계산도 해보고 그릇도 치워보며 이틀 만에 많은 것들을 배웠다.

그러나 100가지가 훨씬 넘는 메뉴를 외워야 한다는 부담과 내가 움직일 때마다 귀엽다며 웃는 처자 때문에 결국 다른 일을 찾기로 했다.


그렇게 Indeed라는 어플을 통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이미 남편은 코로나증상으로  지쳐있었고 아이들에게 구토, 설사 증상도 시작되었을 무렵이었다.


몸도 마음도 힘든 사랑하는 남편을 위하여

4명 중 나만 코로나가 걸리지 않은 이유를 곱씹으며

귀하고 귀한 내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나는 기꺼이 현실판  차탄엄마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일자리를 열심히 찾던 도중

우연히 클릭한 구인광고에 친숙한 단어가 하나 보였다.


Verbal proficiency in English ( Korean is an asset)

영어는 기본이거니와 나의 모국어인 한국어를 잘하면 유리하다니 지원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자세히 Job description을 살펴보았다.

Family Doctor's Office의 MOA(Medical Office Assistant) 구인광고였다.


코로나로 점점 시들어가는 남편과 아이 둘을 보고 있자니

우리 남편과 아이들이 아픈데 병원 못 갈 일은 만들지 않겠다 다! 내 무슨 일이 있어도 병원에서 일하리다! 는 간절한 마음과 포부가  안에 꿈틀댔다.

하지만 경력이 전무한 내가 과연 면접조차 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제발 면접만  있게 해 주세요!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 하지 않았던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원을 했다.

그렇게  면접날짜가 잡혔고 아픈 남편과 아이들을 두고 버스를 타고 면접 장소에 갔다.

밴쿠버의 대표적인 대중교통어플인 Transit으로 검색하니 내가 이미 지원한 학원과 가깝다.

내가 혹시 잘못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지만 Transit만 믿으며 열심히 찾아갔다.

그렇게 도착한 병원 장소는 내가 밴쿠버 입국 전에 이미 강사로 지원한 영어학원 '바로 옆' 건물이었다.


할렐루야!!

역시 우리 주님이 예비해 주셨구나!!

학원, 병원 면접을 아직 보지도 않았지만 이것은 무조건 될 운명이라며

나란히 서있는 이 두 건물에서 4년간 충성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병원에 들어갔다.


경력은 없지만 절대 주눅 들지 않았다.

병든 닭처럼 쓰러져있는 남편과 아이들 얼굴이 눈에 선했다.

경력은 없지만 난 진정한 FAST learner라고 몇 번이고 강조했다.

면접관이 말하길 중요한 것은 영어/한국어에 능숙해야 한다는 점이었고

더 중요한 것은 친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병원 측에서도 나를 목회자 사모이기 때문에 면접기회를 준 것이라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무조건 친절할 수 있겠냐는 질문에

"부목사 사모 경력이 6년입니다. 눈감고 입 막고 귀 닫고 산 세월이 6년, 이로 인해 어떤 상황에도 늘 행복하고 즐겁게 살고 있다는 뜻이지요."라며 조금은 여유롭게 동시에 간절하게 응수했다.

그리고 나는 당당히 합격했다.


그렇게 나는 밴쿠버 도착 11일 만에

Medical Clinic(Family Doctor Office)의 MOA(Medical Office Assistant)

영주권영어시험인 CELPIP 강의 및 초중고대학생까지 강의하는 영어강사로

그리고 집에서는 온라인으로 캐나다보육교사 ECE를 준비하는 학생으로

밴쿠버 도착 11일 만에 투잡을 뛰며 동시에 자격증공부도 하는 '현실판 차탄엄마'가 되었다.


열의는 넘쳤지만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아니 아는 것이 전무(全無)했다.

패밀리닥터 오피스에서 일하면서도

팸닥이 정확히 어떤 개념인지도 몰랐다.

팸닥이 뭐죠?

라는 나의 질문에 친절히 설명해 주던 senior staff 가 정말 고마웠다.

그리고 한국과는 너무나 다른 의료시스템에 영어는커녕 한국어조차 막히기 시작했다.


내 전문'나와바리'였던 영어강의분야도 난관에 봉착했다.

토플, IELTS는  들어봤어도 CELPIP은 금시초문이었다.

셀핍시험은 영주권준비에 필수라는데

4년만 지내다 돌아갈 계획이었던 나에게는 단 한 번의 검색조차 해보지 않던 난생처음 들어 본 시험이었다.


우선 캐나다의 의료시스템은 국가 예산으로 운영되는 공공의료 서비스이다.

즉 캐나다 모든 주에서 무상의료를 제공한다.(치과는 제외,약값 유료)

MSP라는 주정부 의료보험에 가입만 하면 캐나다의 무상의료복지혜택을 맘껏 누릴 수 있다.

학생비자인 남편과 WORK PERMIT을 가지고 있는 나를 포함 4인가족의  MSP비용은 한 달에 75불 정도이다.


일주일에 3일 동안 Medical clinic에서 일하며 training을 받았다. 쉴 새 없이 걸려오는 전화를 받기는 했지만 꿀 먹은 벙어리였다. 옆에 senior staff가 없으면 일이 진행되지 않았다. 병원과 집에서 열심히 캐나다 의료시스템에 관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일을 하면서 동시에 많은 것들을 공부하고 배워야 해서 많이 힘들었지만 2주에 한 번씩 급여가 나온다는 점과 그저 돈을 벌어 한 달 렌트비 1600불을 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뻤다.


캐나다에서는 응급상황이 아니라면  일반 클리닉에서 General Practitioner 즉 GP를 1차로 만나야 한다.

엑스레이나 초음파조차도 GP가 직접 써주는 Requisition이 있어야 한다. 그 Rec을 가지고 근처 Imaging center에 찾아간다. 보통 엑스레이는 예약 없이 당일에도 가능하지만 초음파는 꼭 예약해야 한다.(최소 1주일에서 10일 정도 후에 예약가능) 그리고 그 결과를 환자가 직접 받을 수는 없다. 엑스레이나 초음파 결과는 Requisition을 받아온 병원 즉 1차 GP가 있는 곳으로 가게 된다. 그 결과가 좋지 않으면 URGENT로 병원에 보내지지만 결과가 정상이라면 병원 측에서는 환자에게 따로 연락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굳이 검사결과를 듣고 싶거나 검사결과지를 받고 싶으면 또 병원예약을 잡아야 한다.


또한 GP의 판단하에 환자가 2차적으로 전문의 진료가 필요하면 GP가 직접 전문의(=Specialist or Special doctor)에게 Referral을 넣어준다.


그리고 기다린다.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

혹시나 내가 전화번호를 잘못 기입해서 연락을 못 받나? 하는 생각이 들어 다시 referral 받은 병원에 힘들게 연락해 보지만 무작정 또 기다리라는 소리만 듣는다.

그렇게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한다.

내가 이런 질병이 있었나? 내가 리퍼럴을 받기는 받았던가? 기억이 희미 해질 때쯤이면 specialist나 클리닉 측으로부터 연락이 온다. 예약날짜가 정해졌다며 언제 어디로 절대 늦지 않게 오라고 한다. No show fee가 있는 곳도 적지 않기 때문에 혹시나 예약을 취소하고 싶으면 굳이 또 환자가 직접 specialist로 연락해서 취소해야 한다.

그렇게 대부분의 질환은 스스로 이겨낸다.

 C'est la vie!!


어느 날 환자에게 전화가 왔다. 그 환자는 대장 내시경 Referral을 받았다가 1년 2개월 지난 지금에야 연락을 받은 것이다. 그 환자는 이미 한국에 가서 대장내시경을 찍고 치료까지 받고 왔으니 이 아까운 대장 내시경 순서를 다른 급한 환자분에게 넘겨달라는 것이었다. 시스템상 불가능했지만 그 마음만은 알 것 같았다.


물론 빨리 연결되는 Specialist들도 있다.

보통 이비인후과, 정형외과 그리고 산부인과는 조금은 빠른 편이다.

그러나 MRI.CT, 내시경 등은 통상 몇 개월에서 1년씩 기다려야 한다.

이에 관해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느림의 미학이라 치부하기에는 복장이 터진다.


일반 예약 전화뿐만이 아니라 엑스레이, 초음파 기관. Lifelab, ICBC, Work safe bc(= WCB), 변호사 사무실, 우리가 referral을 보낸 Specialist Office, 다른 공공기관 기타 등등에서 전화가 온다.

나 스스로 해내고 싶지만 매일매일 공부를 하고 외워도 아는 것이 충분치 않았다. 수능 이후로 이렇게 머리를 써 본 적이 없다고 느꼈다. 아니 수험생시절보다 더 집중해야 했다. 동시에 7-8가지 일을 생각하고 실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리셉션을 지키며 담당 의사 선생님의 assist를 실수 없이 해내야 한다.

일반감기환자부터, 알레르기주사, Procedure(수술 후처치), ICBC 교통사고환자, 정신질환 초기 Counselling, 임신부, 출생 후 일주일도 안된 신생아, Pap Smear(자궁경부암검사), 사망진단서 팩스작업까지 다양한 진료와 환자들을 돕는다.

제일 떨리고 어려웠던 Pap smear(자궁경부암검사)세팅

이 작은 병원 안에 인간사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다.


한 번은 ICBC의 한 직원에게 전화가 왔다. 전혀 아는 부분이 없어서 senior staff을 기다리고 있는데 생각보다 많이 지체가 돼서  미안한 마음이 너무나  컸다.

지금 training 받고 있는 중이라 확실한 답변을 못 드리니 죄송하지만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같은 말을 기계처럼 두 번 세 번 하는 나에게

그분은 괜찮으니 주눅 들지 말고 열심히 배워서 일하라고 격려해 주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일했던 곳은 밴쿠버에서 십수 년 된 클리닉으로서 꽤 유명한 곳이었다.

그리고 일반 Medical clinic뿐만 아니라 chiropractic(척추교정술), RMT( 마사지치료) , Acupuncture(침치료) Spa(피부관리)까지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의사 선생님들로 그리고 넘쳐나는 환자들로 인해 늘 북적였다.


하루는 의사 선생님께서 진료를 보시고 환자의 처방전을 어떤 약국 -north road로 보내라고 하셨다.

바로 팩스를 보내고 선생님께 여쭤봤다.

"선생님 north road로 많이 보내는데 여기가 도대체 어디예요?"

그 순간 모든 staff들과 의사 선생님들이 동시에 미소 지으며 마흔 넘은 신참을 위로해 주셨다.

알고 보니 north road는 병원과 5분 거리도 안 되는 한인타운 중심이었던 것.


집이 위치해 있는 port coquitlam 그리고 목회자인 남편의 사역지가 있는 surrey 외에는 가본 적도 알지도 못하던 나는 bc주의 모든 지역을 병원에서 일하면서 배웠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지역이지만 늘 통화하고 팩스를 보내는 몇몇 장소는 늘 가본 곳처럼 친숙했다.


어느 날은  9시부터 정신없이 근무를 하고 있는데 어떤 환자가 들어왔다.

하루종일 전화를 했는데 왜 받지를 않는 거냐며 다짜고짜 화를 내신다.

우리는 하루 종일 전화를 받고 있는데 무슨 말씀이시냐며..

senior staff이 침착하게 응대한다.

그들은 서로 머쓱해한다.


그렇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절대 무상의료혜택!!

이곳 캐나다에서는 출생부터 노후까지 coverage도 넓은 의료보험의 신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의료진이 너무나 부족하다. 시스템도 복잡하며 특히 대기시간이 너무 길다.


병원에서 일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Do you accept new patients? 새로운 환자 받나요? 즉 family doctor를 해 줄 수 있냐는 질문이다.

그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늘 한결같다.

Our doctors are not accepting new patients but you can see doctors as a walk-in patient.

현재 의사 선생님들도 환자가 넘쳐난다. 더 이상 family doctor를 해주실 수가 없는 포화상태이다.


이렇게 family doctor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캐나다에서 굳이 팸닥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우선 한 clinic를 정해서 한 선생님과 계속 진료를 보는 것이다. 어떤 진료가 필요한지 MOA와 얘기를 하고 예약을 잡아 진료를 본다.

엑스레이나 초음파 requisition을 받아서 찍었다면 그 결과는 그 병원 선생님께 들어온다.

전문의 진료를 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선생님께서 referral을 넣어주신 전문의 진료 결과도 같은 선생님께 들어온다.

즉 family doctor는 아니지만 family doctor와 별반 다른 것이 없다.

Clinic 측에서 진료예약이 가능하다고만 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서류 작성이 필요한가? 어떤 서류인지 MOA에게 정확히 얘기하고 예약이 가능하다고 하면 예약하면 되는 것이다. 서류 작성은 MSP가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소정의 비용이 발생한다.

이렇게 한 병원의 한 선생님과 진료기록이 꾸준히 쌓이게 되면 그걸로 된 것이다.

내 '공식적'팸닥은 아니지만 누가 봐도(진료기록) 팸닥이라 말할 수 있는 순간이 분명히 올 것이다.


병원에는 늘 먹을 것이 넘쳐났다. 특히 우리가 휴식시간을 갖는 Office공간에는 정말 맛난 음식과 간식들이 넘쳐났다. 의사 선생님들도 MOA들이 늘 수고가 많다며  맛있는 음식.음료를 사주시곤 했다. 특히 환자분들이 의사 선생님과 MOA를 위하여 두 손 무겁게 진료를 오시는 경우도 많았다. 환자들에게 받은 선물들이 넘치고 넘쳐서 주시는 경우도 많았고 MOA들 모두가 정말 수고한다며 선물을 챙겨주시는 환자분들도 상당히 많았다. 그렇게 행복한 benefit을 받으며 열심히 일했다.

그중에 제일은 의사 선생님!!


면접 볼 때 다짐했던 ' 내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가족이 아플 때 병원 못 가는 일은 없게 하리다'라는 바람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저녁 9시 퇴근 시간이 훨씬 넘은 시간에도 아픈 큰 아이를 봐주셨던 감사한 선생님

오전 진료 시작 전  병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둘째를 봐주셨던 또 다른 선생님

가족의 진료뿐 아니라 가까운 지인들도 부탁하면 바로바로 진료 예약을 잡아주시던 선생님들

베너핏  최고의 베너핏은 불가능한 것들을 가능케 해 주는 것인데 그러한 베너핏을 누리며 살고 있다.


의료진 부족으로 의료붕괴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는 이 땅  캐나다에서

언제든 의사 선생님 진료가 필요하면 기다림 없이 진료를 볼 수 있다는 것.

아이들과 남편의 건강과 관련해 문자나 카톡으로도 언제든 의학적인 질문을 할 수 있는 것.


무모한 도전이었던 모든 것이 가능케 된 것은 '현실판 차탄엄마'가 될 수밖에 없었던 '엄마'라는 존재 덕분이라 생각한다.

진료는 끝났지만 남은 팩스업무를 가끔 도와줬던 남편:)


한 한국인 분이 병원으로 전화가 왔다.

중학생 아이만 캐나다에 두고 모친상으로 한국에 잠깐 나와있는데 아이가 많이 아프다면서 울기 시작했다.

사실 그렇게 많이 아프고 급하면 사실 응급실로 가야 한다. 우리도 많이 급하면 무조건 응급실을 권유한다. 그러나 분명히 어떤 사정이 있었으리라 생각했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전화를 주시는 간절한 엄마의 마음이 느껴져서 난 함께 울었다. 상당히 곤란한 상황이었지만 의사 선생님께 사정을 설명드리고 간곡히 부탁드리니 결국 예약을 잡아주셨던 감사한 일도 있었다.


가끔은 10분 15분도 안 되는 진료를 보는데 뭐 그렇게 까다롭게 구냐며 예약 당장 잡으라며 으름장을 놓는 환자분들도 계시다. 그리고 의사 보기 너무나 힘드니 무턱대고 한 번에 여러 가지 진료를 요구하시는 환자분들도 계시다.

캐나다 의사가 하루에 볼 수 있는 환자 수는 정해져 있으며 MSP도 하루에 한 가지씩 밖에 카버 되지 않는다.

 

환자와 함께 울고 웃고

같이 일하는 동료들과 함께 일을 마칠 때면

평생 느껴보진 못했지만 '전우애'가 바로 이런 것이겠구나 느끼며 다음날을 기약했다.

그렇게 1년 반이란 시간 동안 열심히 일했다.

누군가가 나에게

세상에서 제일 열심히 살았던 기간이 언제였는지  물어본다면

난 병원에서 일했던 그 1년 반의 시기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정말 최선을 다했다.

병원을 그만두는 날

의사 선생님들이 혹시라도 그날 진료에 신경 쓰이실까 봐 진료가 끝날 때까지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환자의 진료가 끝난 후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너무나 서운해하시며  갑자기 지갑을 꺼내셨다. 지갑에 있던 현금 전부인 몇 백 불을 꺼내주시며 그동안 잘 도와줘서 정말 고마웠다고 말씀하셨다. 크리스마스 때도 카드와 함께 금일봉을 주시던 선생님이시다.

이때 받은 금일봉으로 우리가족은 외식을 했다

다른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왜 지금에서야 말하냐며 많이 서운하다 하셨다.

그리고는 지갑에 지금 있는 현금이 이것밖에 없어서 미안하다며 몇 백 불을 챙겨주셨다.

어느 수요일 늦은 퇴근길,

선생님과 내가 함께 병원 밖을 나오는데

병원 바로 앞, 차 안에서 날 기다리던 남편과 아이들에게 90도로 인사하던 선생님이시다.

왜 돈을 주시는 거지? 받는 순간 어안이 벙벙했지만 내가 일하는 동안 선생님들에게 조금은 도움이 되었나 보다 생각하니 뿌듯했다. 그리고 받은 공돈을 손에 '꼭 쥐고' 병원에서의 마지막 퇴근을 했다.

마지막 퇴근 길 병원 앞 버스정류장

병원과 동시에 면접을 보고 합격했던 병원 건물의 학원에서도 열심히 강의했다.

병원 바로 옆 건물 학원 강의실 엄마수업이 끝나길 기다리며:)

학원강사의 생명은 '아는 척'이다.

설령 한 번도 셀핍시험을 들어 본 적이 없다고 해도

설령 셀핍시험을 단 한 번도 시험장에서 직접 본 경험이 없다고 해도

난 셀핍강사로 강단에 선다.

그렇기에 무조건 셀핍 시험을 10번 이상 본 사람처럼 잘 '아는 척'을 해야 한다.

그래서 공부했다. 새벽 2시에 일어나 병원공부도 셀핍 공부도 열심을 다했다.

왼쪽은 셀핍 독해 수업준비 오른쪽은 병원 서류 공부

토플, 아이엘츠는 강의경험이 있어 유형과 수업준비에 익숙했지만 셀핍은 달랐다.

학원에서 받은 자료와 모의고사를 공부하며 유형을 철저히 파악해서 준비하고 강의했다.

초중생을 위한 봄방학 특강부터 셀핍 강의까지

날 합격시켜 주신 감사한 원장님의 니즈에 맞게 뭐든 준비해서 열심히 강의했다.

그러나 병원 업무가 많아지면서 학원은 1년 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계획력, 생활력 최강인 남편도 열심히 살았다.

학생비자라 일을 많이 할 수 없는 남편은  불규칙적으로 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이삿짐부터 고깃집 디쉬, 그리고 배송까지 닥치는 대로 일했다.

박사과정 공부에 교회사역 그리고 파트타임까지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정말 열심히 살았다.

그렇게 우리는 1600불이라는 월세를 밀리지 않고 입금할 수 있었고

탁상 달력에 매 달 월세를 입금하고 '이 번달 월세 입금 완료'를 적으며 뿌듯해했다.

4월 월세 입금완료!!


나는 병원 일을 그만둔 지 거의 1년이 다돼 가지만 그때 함께 일했던 의사 선생님들의 benefit을 그대로 받고 산다.

그중에 한 분은 최근에 개원을 하셨는데 애들 아프면 언제든지 진료받으러 오라고 신신당부하신다.

너무나 감사하다.

그리고 얼마 전 한 선생님께서는 우리 아이들의 나이를 정확히 기억하시고 선생님 아들들이 입었던 옷을 물려주셨다. 거의 새 옷과 다름없는 옷들을 보며 2년 후 한국 돌아갈 때까지 아이들의 옷을 살 일 없을 것 같아서 너무나 감사하고 기뻤다. 병원을 그만둔 후 아이들과 진료를 받으러 갔는데 아이들 맛있는 거 사주라며 선물도 주시고 용돈도 백 불씩이나 주셨던 분이다.


지난 2년 되돌아보면 정말 감사한 일뿐이다.

남편과 나는 어떻게 그 시기를 견뎌내었냐며 서로를 칭찬한다.

아이들도 남편도 나도 최선을 다해 살았기에 후회는 없다.

이곳에서의 남은 2년의 삶이 기대가 된다.

최고는 아니더라도 최선을 다해보는 우리가 되길 바라며

매 순간 감사하며 살아가리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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