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의 첫 만남
잠실 야구장에서 처음 만난 던힐은 훌쩍 큰 키에 바람 불면 쓰러질 것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안경을 쓰고, 누나들 만난다고 위아래 정장을 쫙 빼입고, 향수를 뿌렸지만 담배 냄새는 어쩔 수 없는.
수줍게 웃으며 누나들 눈치를 보고 있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어휴, 어떤 여자가 데리고 살 지 속깨나 썩겠어. 나는 저런 남자 만나지 말아야지.'
(그가 다른 여자를 만나 지지고 볶고 살고 있단 소식을 들었다면 오히려 그게 반전이었겠지만.
누구나 예상하듯, 반전 따위는 없다. 그 어떤 여자가 바로 나다.)
2000년대 초반, 나는 우연히 아프리카 TV에서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24시간, 1년 내내 틀어주는 채널을 발견했다.
당시 방장은 여러 개의 채널을 운영하며 하나는 애니메이션 전용으로, 하나는 스포츠 채널로, 또 다른 채널은 드라마 등을 운영하며 방송을 하고 있었고,
그 방송의 열혈 팬이었던 나도 방장의 눈에 띄어 방송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처음엔 그에게 만화 영상과 자막 파일을 받아서 컴퓨터로 돌리기만 하다가,
내가 좋아하는 박지성 경기를 새벽에 다른 이들과 함께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본격 스포츠와 드라마 콘텐츠까지 채널을 확장하게 되었다.
그때, 내 방송의 채팅창을 관리해 주던 동생들을 몇 명 매니저로 두고 있었는데,
던힐은 그 매니저들 중 한 명이었다.
(지금은 저작권 문제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애니메이션 파일, TV수신카드로 방송이 가능했었다.)
친목질에 강했던 나는, 우리 오프라인에서 정모 한 번 하자!! 라며 모임을 추진했고,
던힐을 비롯한 6명의 매니저와 함께 잠실야구장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
그때 만난 매니저들 중 던힐은 내 남편이고, 한 명은 지방 소도시에서, 두 명은 서로 결혼해서(!)
애 낳고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 인연을 가꾸고 있다.
먼 미래의 어느 날, 이 글이 혹시라도 책으로 나온다면,
우리 딸과 사위가 이런 삶을 살았었네라고 매우 놀라실 부모님께 미리 사죄 인사 드립니다.
그래도 어디 가서 나쁜 짓은 하지 않았어요, 맹. 세. 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