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롭고 친근하며 영혼을 살피고 성찰하는 이상주의자
오웰이 작가로서 각성한 또 다른 계기 역시 그가 인도제국 경찰로 있을 때였다.
코끼리 한 마리가 사슬을 끊고 달아나 저자거리에서 난장을 치다가 인디언 쿨리 한 명을 죽게 만들었다. 오웰은 소식을 듣고 현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코끼리는 얌전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지켜보던 버마의 군중들은 영국 경찰이 코끼리를 쏘아 죽이면서 사건을 마무리 해주길 기대했다.
버마인들은 식민지인으로서 통치자 영국이 자신들을 위험에서 지켜야 한다는 의무가 있는 것으로 바라본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오웰은 코끼리를 총으로 쏘아 죽였다.
이 경험 역시 오웰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영국인들은 '백인의 책무'를 성실히 이행하여 인도의 지배를 정당화했다. 우월한 자신들이 열등한 자들을 상대로 하는 교화와 통치는 신의 소명과 같은 것이라 여기기도 했다. 식민지는 지배받는 사람들에게만 고통을 준 것이 아니었다. 식민지를 지배하는 통치자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해 해야하는 일들이 결국은 스스로도 권력의 노예로 만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제국주의는 식민주민을 노예화할 뿐만 아니라 주인까지도 노예로 만든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오웰의 글에서는 이제 반제국주의에 대한 메시지도 강력해지기 시작했다. 피지배자가 지배관계를 증오하면서도 지배 논리를 무의식적으로 수용하는 모습, 지배자가 지배를 위해 감당해야 할 행위들이 낳은 결과는 모두를 파괴하는 결과만 낳는다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고 각성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오웰은 이념이 어떤 것이든 권력, 제국주의, 독재 등 인간성을 파괴하는 위선을 통렬히 비판하는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소총을 잘 쏘지 못했고, 땅은 부드러운 진흙으로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빠져들었다. … 백인은 '원주민'앞에서는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백인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 마음속의 유일한 생각은 무언가 잘못되어 내가 쫓기다가 붙잡혀 짓밟히고 언덕 위의 인디언처럼 웃는 시체로 전락시키는 것을 그 2천 명의 버마인들이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들 중 일부는 소리내어 웃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것은 절대 안 될 일이다. 방아쇠를 당겼을 때 쿵 하는 소리도, 발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 군중 속에서 들려오는 악마 같은 환호성이 들렸다. …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쓰러지지도 않았지만, 몸의 모든 선이 변했다. 그는 갑자기 쓰러지고, 쪼그라들고, 엄청나게 늙어 보였다. 총알의 무서운 충격이 그를 쓰러뜨리지 않고 마비시킨 것처럼. 마침내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감히 말하자면 5초가 지났을 것이다. 그는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의 입은 침을 흘렸다. 엄청난 노망이 그에게 자리 잡은 듯했다. 나는 같은 자리에 다시 총을 쏘았다. 두 번째 총소리가 나자 그는 쓰러지지 않고 절망적으로 느리게 일어나서 약하게 똑바로 섰고, 다리는 힘을 잃고 머리는 처져 있었다. 나는 세 번째 총을 쏘았다. 그 고통이 그의 온 몸을 흔들고 다리의 마지막 힘을 모두 날려버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그의 뒷다리가 아래로 무너지면서 그는 거대한 바위가 쓰러지는 것처럼 위로 솟아올랐고, 그의 몸통은 나무처럼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내가 소총을 손에 든 채 서 있는 이 순간, 나는 처음으로 백인이 동방을 지배하는 것의 공허함과 무의미함을 보았다. 여기 무장하지 않은 원주민 군중 앞에 서 있는 백인 남성, 내가 있었다. 겉보기에 작품의 주연 배우처럼 보였지만, 실상 나는 뒤에 있는 노란 얼굴들의 의지에 의해 앞뒤로 밀려나는 터무니없는 인형일 뿐이었다. 이 순간 나는 백인이 폭군이 될 때 그가 파괴하는 것은 자신의 자유라는 것을 깨달았다.” - <코끼리를 쏘다>, 1936
5년의 경찰생활을 마치고 그는 향후 20년 동안 가난으로 고통받는 작가로서의 길로 나아갔다.
현실은 그에게 가혹했다. 영어번역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신문 기고로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였지만, 그나마도 집이 도둑을 맞아 재산이 모두 털렸다. 공산주의 혁명으로 러시아에서 도망 온 보리스란 사람과 함께 호텔과 레스토랑에서 접시닦이로 하루 13시간씩 일하기도 했다. 그마저 여의치 않을 때는 "뭐든 좋으니 하루에 다섯 시간 이상 잘 수 있는" 직업을 소개해달라고 사정하기도 했다.
어느 날 그는 심신미약 환자를 보조하는 요양 일을 소개받았다. 파리에 있던 그는 그 일을 위해 영국으로 가야했어서 친구에게 돈까지 빌려서 영국으로 갔다. 막상 도착했을 때, 환자가 자리를 비워 한달 후에 돌아오니 그 동안은 일을 할 수 없다고 하여 노숙자가 되었다. 부랑자, 일용직 노동자, 불량배 등 길거리의 삶을 오웰은 여과없이 체험했다.
그나마 형편이 나아지게 된 계기는 탄광 노동자들의 생활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아 기고하게 되면서 정기적인 글거리가 생기고 부업으로 식료품상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이다. <위건부두로 가는 길>이란 책으로 나온 이 글에는 비참하기까지 한 당시 노동자의 삶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광부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다른 세상에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구나 하고 문득 깨닫게 될 것이다. 저 아래 누가 석탄을 캐고 있는 곳은, 그런 곳이 있는 줄 들어본 적 없이도 잘만 살아가는 이곳과는 다른 세상이다. 아마 대다수 사람들은 그런 곳 얘기는 안 듣는 게 좋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세계는 지상에 있는 우리의 세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나머지 반쪽이다. ... 그들은 임신한 상태로도 그런 일을 하곤 했다. 나는 심지어 지금도 만일 임신한 여자들이 땅속을 기어다니지 않으면 석탄을 얻을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석탄 없이 살기보다는 그들에게 그런 일을 시키리라 생각한다. 어떤 육체노동이든 다 그렇다. 그것 덕분에 살면서도 우리는 그것의 존재를 망각한다. ... 어떤 면에서는 광부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도 자괴감을 느낄 만하다. 그럴 때 우리는 잠시나마 ‘지식인’으로서의, 전반적으로 우월한 존재로서의 자기 지위를 의심하게 된다. 적어도 지켜보는 동안에는, 우월한 인간들이 계속 우월하기 위해서는 광부들이 피땀을 흘려야만 한다는 자각을 똑똑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에게 물이 필요하듯 세상이 작동하도록 에너지를 공급하는 중요한 일을 하지만, 돈과 계급으로 인간의 가치가 평가되는 현실 속에서 자신에게는 편견도 차별도 없이 올바르다고 자부하는 인간을 향해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러면서 인간의 모든 지배구조에서 나타나는 모순과,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이라는 상식의 괴리에 대해 분노를 여과없이 나타냈다. 차별이 없는 평등한 사회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스스로 기존에 가지고 있는 구조를 바꾸는 것에 나서는 인간은 드물다는 불편한 사실을 드러낸 것이다.
"누구나 자신은 무슨 신기한 수가 있는지 그런 편견에서 자유롭다고 주장한다. 속물근성이란 다른 모든 사람에게서는 확인할 수 있지만 자기 자신만큼은 예외적인 악덕이다. ‘믿음과 실천’을 겸비한 사회주의자뿐만 아니라 모든 지식인들은 적어도 자신만큼은 계급적 불의를 당연히 벗어나 있는 줄 안다. ... 나는 내 자신이 단순히 제국주의에서 벗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인간의 모든 형태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느꼈다. 나는 스스로 완전히 밑바닥까지 내려가 억압받는 사람들 사이에 있고 싶어졌다. 그들 중 하나가 되어 그들 편에서 압제에 맞서고 싶어졌다. ... 우리는 모든 계급 차별을 맹렬히 비난하지만 그것이 정말 없어지기를 진지하게 바라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하나와 맞닥뜨린다. 그것은 모든 혁명적 소신이 갖는 힘의 일부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은밀한 확신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 영국인치고 대영제국이 해체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이는 아무도 없다.” <위건부두로 가는 길>, 1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