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했던 도시, 강릉
신문 기사로 아기의 뇌 발달에 주변 자연환경이 미치는 연구결과를 본 적이 있다. 초록과 파랑의 자연, 그러니까 숲이나 들판의 초록 자연과 강, 호수, 바다와 같은 파랑 자연에 노출되는 하루 노출량이 어린이들의 인지 발달과 정신 건강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석한 논문이었다. 잠시 여담이지만 게재된 잡지는 nature 계열 학술지인데, 원문에서 초록 자연과 파랑 자연을 각각 green place와 blue place라고 기술하였다. 자연과학 분야로 저명한 학술지에서 어색할 정도로 아름답고 직관적인 표현을 보게 되어 반가우면서도 오묘하다. 초록의 자연은 다시 숲(woodland)과 들판(grassland)으로 분류하여 총 세 부류(woodland, grassland, blue space)의 장소에 대한 노출량의 영향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숲에 노출된 시간이 길수록 청소년기의 인지 발달과 정서 건강에 유의미한 긍정적 영향을 보였다고 한다. 들판과 파랑 자연에 대한 노출량은 유의미한 결과를 보이지 않았다. 초록창에서 한토막의 뉴스로 위 연구 내용을 접했을 때는 거대도시 서울에서만 자라 온 서울밖에 모르던 내가 같은 서울에서 어린 아기를 양육하기 시작하고 '도시는 이렇게 크고 다양한 편의시설이 있고 사람은 어딜 가나 미어터지는데, 왜 이렇게 아이랑 할 수 있는 것들이 없을까?'라는 의문을 마음 한편에 품고 있을 때라, 연구 내용이 뇌리에 남았다. 평소에는 '어느 연구 결과 A라는 것이 아이의 지능 발달에 좋더라’라는 류의 카더라 통신은 초보 양육자의 불안감을 자극하기에 최대한 걸러 들으려 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잿빛 도심 속에 갇혀 사는 것보다 드넓은 자연에 충분히 노출되는 것이 아이들의 정서에 더 좋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수긍이 가는 주장이었다. 물론 지금 이 글을 작성하면서는 미래의 독자에게 검증되지 않은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지양하고자 참고문헌을 꼼꼼히 확인하였지만.
숲과 가깝다는 측면에서, 강릉은 아이를 키우기에 참 좋은 도시이다. 강릉은 숲을 품은 도시이다. 물론 강릉은 강원의 '강'을 담당하는 영동 지방 최대 거점 도시이다. 그러므로 강릉에서 6개월을 살았보았다고 하여 '나 시골에서 좀 살아봤다'라 한다면, 그것은 꽤나 서울촌년스러운 생각일 테다. 다만, 배달의 민족 어플도 늘 '텅'에 문득 맥주 한 캔을 사고 싶을 때에도 동네 슈퍼가 문 닫을 시간 전 서둘러 나가 언덕길을 달려 올라가야 했던 사천면의 어느 구석에 살았으니, 자연을 품은 소도시에서 살았다 정도로 해두자. 강릉시의 도시브랜드는 ‘솔향강릉’이다. 소나무와 소나무 숲은 강릉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머물렀던 관사의 바로 앞에도 소나무 숲으로 조성된 동산이 있어 아기와 매일 같이 솔방울을 줏으며 놀았고, 아기와 자주 가던 오죽헌에도, 경포호수공원-허균허난설헌기념공원-강릉녹색도시체험센터-경포아쿠아리움-아르떼뮤지엄-테라로사경포점까지 연결되는 경포호 근린 관광 부지에도, 테라로사 사천 앞에도 온통 소나무 숲이다. 특히 경포호 근린 광광 부지는 아기를 어린이집에서 하원시키면서 거의 매일 같이 방문했던 곳이다. 강릉녹색도시체험센터 앞에는 원목과 자연친화적 재료로만 만들어진 커다란 놀이터가 있는데, 평일 오후에는 정말 아무도 없는 날이 대부분이어서 아이와 나 단 둘이 놀 수 있었다. 이렇게 고퀄리티의 놀이터를 전세 낸 것처럼 쓸 수 있다니, 부자가 된 기분이야! 나만 아는 맛집, 아니 나만 아는 놀이터로 고이고이 숨겨두고 싶었던 곳. 아이와 실컷 놀고 해가 저물 무렵 주차장을 빠져나올 때면, 주차장의 넓은 부지에 노을 진 하늘과 저 멀리 태백산맥의 산등성이를 배경으로 먹 묻힌 붓으로 힘차게 그려낸 듯 우뚝 선 몇 그루의 소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저 오묘한 곡선과 직선의 조화를 보라, 한 폭의 한국화로구나, 조상님들이 그림을 안 그리려야 안 그릴 수가 없었겠군, 생각하며 시동을 걸어둔 채 아이와 함께 잠시 감상을 하기도 했었다.
강릉이라 하면 물론 동해바다를 빼놓을 수 없다. 관광을 목적으로 강릉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숲보다는 바다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더 많을지 모른다. 동해안을 따라 길쭉한 모양을 한 강릉시에는 이미 전국 단위로 유명한 해변들이 많다. 경포 해변이야 말할 것도 없고, 도깨비 촬영지로 한순간에 필수 방문 코스가 되어버린 영진해변, 커피로 유명한 안목해변 등이 있다. 작은 소도시에 있는 여러 개의 해변이라 생각했는데, 아이와 놀아주기 위해 이 해변 저 해변을 매일 같이 다니다 보니 각각의 해변 나름대로의 특징들이 뚜렷해 재미있다. 북쪽 주문진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주문진은 타지인들이 수산시장 방문 이외의 목적으로 방문할만한 이유는 거의 없는 곳이다. 그런데 영진해변에서 방탄소년단 뮤직비디오와 드라마 도깨비의 한 장면을 촬영하면서, 그곳이 '방탄소년단 버스정류장', ‘도깨비 방파제’으로 인기 사진 촬영 스폿이 되어버렸다. 주말이면 다양한 나라에서 오는 관광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반면 관광객이 적은 평일에는 영진해변을 포함한 그 바로 아래 연곡해변, 사천진해변, 사천해변은 서퍼들의 사랑을 받는 서핑 해변이다. 서핑은 문외한이지만, 늘 파도가 적당히 높고 거칠어 보이고 바닷물의 깊이도 꽤나 있어 보인다. 서핑하기에 좋은 조건들을 갖춘 해변이라 서퍼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사천진해변과 사천해변은 집에서 가장 가까운 해변이라 아이가 제집처럼 드나들던 곳인데, 아이는 서핑을 나온 형누나들의 귀여움을 받으며 모래사장에 널브러진 서핑보드 위에서 한참을 놀고, 나는 또 그 서퍼들의 젊음의 활기를 엿보며 흐뭇해하기도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 아래 순포해변과 순긋해변은 성수기가 아니면 사람이 극히 드문 해변이다. 3월의 어느 날 아이와 아무도 없는 순긋해변에 놀러 간 적이 있다. 성수기를 준비하는 공사장 중장비들만이 늘어서 있던 그 황량한 해변에서 만난 사람들이라곤 인터넷 밈으로 보던 확신의 불륜커플 상이다! 싶은 커플만이 유일할 정도였다. 버려진 해변인가 싶었던 그곳이 6월을 지나 성수기가 가까워질수록 언제 그랬냐는 듯 중장비들은 하나 둘 사라지고 젊은이들을 맞이할 아기자기한 펜션과 다양한 먹거리들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해변의 작은 마을이 겨우내 겨울잠을 자다 새순이 돋고 진한 녹음이 지듯 활기를 찾는 것을 보니 이 작은 지역공동체도 생명의 주기를 가진 유기체로구나 생각이 든다. 순긋 해변의 남쪽에는 말해 뭐해, 강릉을 대표하는 경포해변이 있다. 비성수기에도 관광객으로 붐비는 해변이지만 전반적으로 잔잔한 파도와 넓은 백사장이 호젓한 경포호수공원으로 연결되면서 관광지 답지만은 않은 특유의 차분한 분위기가 있다. 그래서 나는 경포해변이 좋았고, 아이와 남편과 함께 경포해변이 내려다보이는 식당에서 자주 외식을 하고 성수기가 다가올수록 다양해지는 해변의 행사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경포해변의 열기는 커피의 해변이라 할 수 있는 강문해변, 송정해변, 안목해변으로 이어져 내려간다.
회색 도시 속 아이들이 자연으로 나갈 수만 있다면 초록이던 파랑이던 무슨 상관이랴, 푸르르면 되었지. 숲이던 들판이던 파랑 자연이던 그 안에서의 순위를 떠나 도시계획에는 반드시 자연을 품어야 한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주장이자 우리가 가져가야 할 교훈 아니겠는가. 내 기억 속 강릉의 푸름을 배경으로, 다음 글에서는 아이와 강릉의 구석구석을 다니며 즐거웠던 장소들을 되짚어보며 흩어진 추억을 한데 모아보려 한다.
참고문헌
Maes, M.J.A., Pirani, M., Booth, E.R. et al. Benefit of woodland and other natural environments for adolescents’ cognition and mental health. Nat Sustain 4, 851–858 (2021). https://doi.org/10.1038/s41893-021-007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