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와 사랑에 빠지다

마흔 살의 복싱 일기 - 생활체육대회 후기

by 잽잽

생활체육대회는 처음이었다. 누구와 싸울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몇 달 간 잠자리를 어지럽혔다.

매일, 종일, 땀을 쏟고 하루에도 세 번씩 샤워를 해대니 마지막엔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났다.

스파링하다 조금이라도 쓸린 곳은 밤새 따갑도록 쑤셨다. 그렇게 밤잠을 설치고도 또 체육관에 나가 헐떡였다.


담배를 끊었다. 술도 끊었다. 몸은 부서질듯 피곤했지만 기분이 좋았다.

이길 거라는 예감. 몸이 욱씬거릴 때마다 그 예감이 강해졌다. 살면서 가져본 적 없는 확신. 지금보다 나은 상태가 될 거라는 예감. 내가 강해지고 있다는 자각은 모든 피로를 잊게 했다.

매일매일 키가 크던 나날이 한참 지나 40살의 내가 성장통을 앓았다.


의미있는 것은 성장인가 성장통인가


성장해본 우리 모두는 이제 알고 있지만, 성장하는 그 시간이 좋은 거다. 성장의 결과는 별 의미없다. 그냥 그저 그런 어른이 될 뿐이다. 다만 성장하는 그 시간동안 아팠던 몸과 마음은, 영혼의 기억으로 남는다.


복싱을 처음 시작할 때 턱걸이 1개를 제대로 못했던 내가 20개는 거뜬하게 하게 되었다.

팔굽혀펴기 10개를 힘겨워하던 내가 매일 100개를 하게 되었다.

데드리프트라는 걸 해본 적이 없던 내가 이제 한 번에 100kg을 뽑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나는,

KakaoTalk_20251015_155349379.jpg 홍코너가 필자


졌다.


결과는 노력보다 운이다


말했지만, 나는 내가 질 것은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다. 체육관에서도 나 스스로도, 내 노력과 성장을 매번 절감했기에 체중 감량도 하지 않고 대회에 출전했다. 하지만 나의 성장 속도에도 불구하고 나의 '실전운'은 그다지 좋아질 기미가 없었던 모양이다. 모의고사를 잘 치고 수능에서 주르르 미끄러지던 그 느낌 그대로, 나의 '대진운'은 엉망이었다.


글러브터치를 하는 순간부터 이미 기가 꺾였다. 키가 나보다 10cm는 더 커보였는데 문제는 몸에 근육도 탄탄히 붙어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체급이 맞는 건지 모르겠지만..) 피부가 워낙 하얀 상대여서 심지어 나는 외국인인 줄 알았다. 헤드기어는 위닝(명품입니다). 위닝 마스크를 쓴 사람과 복싱을 해보다니. 나도 복싱을 오래 하긴 했구나. 하지만 쉽지 않겠구나.


그래도 쌓아둔 투지를 끌어올리며 덤벼들었지만 상대는 심지어 왼손잡이였다. 한 대를 때리러 급하게 들어가면 세 대를 맞아야 했다. 다운의 기회를 빼앗았지만 흥분해 운영을 엉망으로 했다. 한 차례씩 다운을 주고받고 판정패했다. 나는 분명히 졌다. 심지어 아홉 살 아들이 보는 앞에서 졌다.


아들을 손을 잡고 아직 9시도 되지 않은 주말 아침 주차장으로 향했다.

나는 행복했다.



내 몸이 한 일을 사랑하는 내 마음


주말 내내 온몸이 아프고 머리가 울렸다. 누워서 계속 경기를 곱씹었다.

다시 싸우면 이길 수 있는데!!!! 느낌표를 몇 번이고 마음 속으로 쾅쾅 이어그렸다.

이렇게 내가 오랫동안 내 모습을 들여다본 적이 있을까 싶을 만큼 여러번 경기 영상을 다시 보았다.


영상을 한참 보다 나는 알게 되었다. 지금 나는 나를 좋아하고 있다. 맙소사.

영상 속 한 남성은 40 평생 가장 대단한 도전을 막 마쳤다.

가장 대단한 도전이라는 건, 그 링 위에서 이기는 게 엄청난 일이라는 게 아니었다.

그 링 위에 올라가기 위해 버텨낸 시간들- 성장통의 시간들이 내 영혼에 각인되는 일이 유일하게 의미있는 일이었다. 그 남성의 모든 역사를 기억하는 나 자신은 그의 동작 하나하나에서 그 시간들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런 내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 사랑이 얼마나 갈지 알 수 없지만

내 온 몸이 한 일을 내 마음은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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