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
12월 13일 오후, 열심히 제작한 영상의 시사회를 잘 마치고 식사를 하던 중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이번 편의 컨셉과 메세지는 기획이 확실히 잡혀서 영상도 잘 뽑힌 것 같은데, 후속 편은 더 적은 인원과 시간, 비용으로도 충분히 비슷하게 제작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이야기였다. 극소수의 내부 인원만으로. 제작 예산의 한계를 나도 알고 있었기에, 함께 응원하겠다는 말을 덧붙이고 길을 나섰다.
그런데 문득 궁금했다. 매력적인 후킹으로 쉽게 흥미가 생기고 시청이 술술 되는 영상 콘텐츠라면 그만큼 더 많은 노력과 사전 연출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말씀하셨을까? 단순히 영상을 즐기고 보는 사람들은 어떤 콘텐츠든 자유롭게 느끼고 표현하면 된다. 깔끔한 영상의 군더더기 없는 스토리나 내용 로직은 수많은 고민 끝에 나온다는 걸 시청하는 당사자가 굳이 알 필요는 없다.
하지만 작품을 즐기는 사람과 직접 작품을 제작하는 사람은 판단과 접근 방법이 달라야 한다. 사람들은 쉽게 눈에 들어오면 쉽게 쓰였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인 컨셉과 핵심 메세지만 명확하다면 충분하다고. 하지만 만들어 보신 분들은 아실 것이다. 막힘없이 술술 시청된다면 그 영상을 제작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는 것을.
즉, 선수끼리는 알아야 하고 알 수 있어야 한다. 향유자로서 즐기던 때와 다른 시선으로 콘텐츠 제작 과정을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 브랜드 분석을 통해 도출한 인사이트와 메세지를 정립하는 것이 가장 우선적인 프리프로덕션 단계라고 앞서 정리했다. 그다음으로는 느낌과 감각보다는 영상 콘텐츠를 만드는 목표에 집중해서 일관되게 이끌어 가는 것이 중요한 두 번째 단계이다.
많은 사람들이 제작 목표보다는 추상적인 개념과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느낌을 위주로 레퍼런스 자료를 리서치한다. 그리고 "보내드린 레퍼런스와 같이 제작할 예정 or 제작을 원합니다."로 '퉁'치고 넘어간다. 이후 촬영 현장에서 또는 영상 편집본 시사회에서 "제가 생각했던 것은 사실 이게 아닌데.. 이제 와서 다시 뒤집어엎을 수도 없고.."와 같은 말씀과 함께 머쓱한 상황이 연출된다.
이렇게 영상의 느낌과 시각적인 감각에 의존한 레퍼런스 조사, 촬영과 편집의 테크닉에만 집중하면 영상을 만드는 사람만 좋아하는 뻘쭘한 영상이 나오게 될 가능성이 높다.
브랜드 영상 기획은 느낌과 감각보다는 논리적으로 스토리를 '설계'하고 그렇게 판단한 '근거'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다시 말해 단순히 개인의 취향과 감각을 넘어서 논리적인 설득력과 확신이 있는지를 우선적으로 생각한다면 좋은 기획이 나올 가능성이 훨씬 높다.
왜 우리는 이 영상을 제작하고 있는가?를 잊지 말고, 목표 달성을 위한 논리적인 스토리를 설계해 보자.
1. 분석한 우리 브랜드 가치와 메시지를 어떤 흐름으로 제시하면 설득력이 있을까?
2. 메시지를 두괄식으로 직접적으로 제시하면 좋을까?
3. 처음부터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빌드업을 할까?
4. 기존의 편견을 뒤집고 반전하여 제시할까?
5. 실제로 시청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어떤 경험일까?
6. 생각한 흐름대로 가편본이 나온다면 대략 어떻게 될까?
세 번째로는 제작할 영상의 활용 매체의 특성을 사전에 고려하여 기획해야 한다.
일단 브랜드 홍보를 위한 영상을 제작부터 한 후에야 어디에 사용할지를 고민하는 경우, 항상 문제가 발생한다. 숏폼으로 틱톡과 인스타그램 릴스에 활용하기로 결정되었지만 이미 제작된 영상은 16:9 가로형에 5분 내외의 러닝 타임이라면? 다시 제작할 수도 없고, 재편집과 조정으로는 한계가 있고 기존 영상만큼의 '맛'이 살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아마 홈페이지 메인에 사용될 것 같다.'로 전달받고 기획과 스토리보드 제작까지 마쳤으나 갑작스럽게 '내부 회의 결과, 유튜브 광고로 쓰일 것 같다.'라는 말씀과 함께 수립한 기획안과 스토리보드가 모두 엎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영상 활용 매체의 특성에 따라서 영상의 구도와 형식, 프레임 레이트, 화면비, 러닝 타임, 내용 흐름 전개 방식 등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틱톡과 릴스, 유튜브 쇼츠는 세로 화면비, 대개 60초 이내의 러닝타임을 가진다. 구글 유튜브 및 스폰서드 광고용 영상은 skip 시간과 광고 형태에 따라 내용 흐름 구성과 러닝타임을 맞춤형으로 구성한다. 상세페이지 내부 삽입용으로 GIF 형식으로 제작할 수도, 웹사이트 메인으로 슬라이드 형태의 소개 영상을 제작할 수도 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아예 모르거나 놓치는 부분이므로, 사전에 협의를 통해서 꼭 체크해두어야 한다.
이러한 접근 방법들을 바탕으로 메시지를 정하였다면, 기획 프로세스에 맞춰 단계별로 준비를 실시한다.
영상 제작 담당자라면 단계별 실무를 진행하고, 프로젝트 담당자로서 외주를 진행한다면 해당 단계별로 대행사와 협의를 진행해야 한다.
1. 활용 매체를 바탕으로 영상 형식과 분량을 설정하기
2. 시청자 경험을 상상하여 스토리 및 연출 컨셉 구성하기
3. 구성한 스토리와 연출 컨셉을 구현한 레퍼런스 리서치하기 (구성한 스토리와 연출 컨셉의 근거를 제시하고 시각화를 위해서)
4. 씬별 스토리보드 작성
5. 모델, 촬영 장소, 소품 구성
이렇듯 우리가 원하는 감각적인 브랜드 영상을 기획하는 데에 있어서 ‘뭔가 크리에이티브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개발할 수 있는 신박한 정답’은 없다. 하지만 제작 목표와 전략과는 무관한 영상 기획은 아무리 창의적이고 기발하다 하더라도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우리는 브랜드의 모든 전략 방향을 충분히 이해한 상황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시청자들이 가장 쉽게 이해하고 진정성 있게 공감할 수 있도록, 때에 따라서는 실제로 행동(클릭, 구독, 유입, 구매 등)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설계 단계에서 조금이라도 제작자나 시청자의 입장에서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 남아 있다면, 실제로 촬영 단계에서든 편집 단계에서든 반드시 문제가 발생한다. 신언불미 미언불신. 믿음직한 말엔 꾸밈이 없고, 아름답게 꾸민 말엔 믿음이 안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