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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이혼 고백
내 이혼 결심을 처음 알린 사람은 20년 넘게 남편과 나를 비교적 가까이에서 봐 왔던 선배였다. 아직 이혼 전이었으니 올해 2월 말이었고 아직 이혼 결심이 확고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혼을 하든 말든 누구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었다. 그것은 고자질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선배는 나보다 남편과 인연이 깊고 남편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다. 나와 남편이 낯선 지역에 이사 와서 자리를 잡을 때에도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받았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동네에 그나마 오랜 기간 인연이 있었던 사람이 1명이라도 있다는 것은 심적으로 위안이 되었다. 종종 그 선배네 부부와 우리 부부는 저녁도 먹고 술도 마시고 서로의 집에 왕래했다. 선배 부부는 첫째 아이가 있는데 둘째를 가지려고 여러 가지로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그런 마음에서 인지 나와 남편 사이에 아기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뻐해줬고 내가 친정동네에서 출산하자 2시간이나 걸리는 거리임에도 축하해 주러 병원에 찾아왔다.
선배는 그저 묵묵히 들어줬다. 나도 묵묵히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조리 쏟아내고 위로받았다. 어떻게 할 거냐를 물으면서 선배는 무엇보다 아기를 걱정하는 것 같았다. 아기를 위해 한번 더 생각해 보는 게 어떠냐는 말을 하고 싶은 듯했으나 끝내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날은 술을 많이 마셨고 근래에 내가 이렇게 말을 많이 해본 적이 있던가 싶을 정도로 신나게 남편이 외도한 이야기, 오픈 카톡방으로 여자 만난 이야기, 여자가 한두 명이 아니라는 이야기, 내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채무도 상당하다는 이야기, 성매매도 한 것 같다는 이야기, 이게 한 번이 아니라는 이야기,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지를 쏟아냈다. 선배는 좀 피곤했을 것이다.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고 나면 상황이 좀 더 선명해지고 확신이 생긴다. 첫 고백을 하고 오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해 머릿속에 꽉 차 있던 생각과 마음속 분노가 조금은 가라앉았고 생각이 정리되었다. 2월 초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고 뒷조사를 했고 나름 탈탈 털어 충분한 이혼 사유와 증거를 모았지만 아직 남편에게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선배를 만나고 온 후 나는 남편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나 다 알고 있어'
두 번째 이혼 고백
두 번째 이혼 고백은 결혼 후 직장 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동생이었다. 그 동생과는 같은 직장이기도 했고 마침 사는 동네가 같아서 동네 슈퍼마켓에서 종종 마주칠 정도였다. 동생 부부와 우리 부부는 서로 집에 오가며 술도 곧잘 마시고 가까이 지냈다. 동생이 직장을 옮기고 우리가 이사를 하면서 뿔뿔이 흩어졌고 코로나로 한 때 보기 힘들었지만 서로 비슷하게 아기가 생기고 출산하면서 아기를 데리고 우리 둘은 서로 집을 오갔다. 동생과 나는 둘 다 주말 독박육아자들이었다.
6월 말, 아기를 데리고 우리 집에 놀러 왔던 동생이 물었다. '형부는 잘 지내요?' 내가 답했다. '응 근데 우리 이혼해. 그렇게 됐어.' 동생의 물음에 그저 '어 형부 잘 지내지'하고 말 수도 있었으나 이 동생에게는 굳이 그러지 않았도 될 것 같았다. 동생은 왜 이혼을 하냐고 묻지 않았고 나도 이혼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물어보면 답할 생각이 있었으나 묻지 않았고 나도 굳이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동생은 몇 년 전부터는 통 볼 수 없었던 형부였고 그래서 형부와 언니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겨도 그럴만했겠다 생각하는 듯했다.
동생 부모님은 벌써 몇 년 전부터 서로 이혼하겠다고 함에도 재산분할 문제 때문에 이혼을 못하고 있다고 했다. 2남 2녀 넷째 중 첫째인 동생인 그 속에서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부모모의 다툼을 보는 것에 초연해지지는 않는다. 동생은 이제 부모님 사이에 개입하는 것은 포기했다고 했다. 우리는 이혼 이야기에 서로 심란한 상황이었다.
세 번째 이혼 고백
세 번째 이혼 고백은 지역에서 알고 지낸 동종업계 선배님이었다. 7월 말 코로나에 확진되어 마스크와 비닐장갑을 끼고 아들과 씨름하고 있던 저녁에 선배님이 전화를 했다 '잘 지내는가 그냥 전화해 봤다'라고 하는데 갑자기 속에서 울컥 올라와서 울먹이고 말았다. '너무 힘드네요' 하는데 목소리가 떨렸다. 선배님은 당황했는지 몇 마디 건네고 전화를 끊었고 몇 분 뒤 문자를 보내 조만간 맛있는 거 사줄게 하셨다.
일 보러 관청에 들렀다가 우연찮게 그 선배님을 마주쳤고 차 한잔 마시자며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선배님은 동업을 하자며 한참 일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남편은 잘 지내고?'라고 했다. 또 때가 왔구나. '저희 이혼했어요.' '언제?' '6월 말에요' 잠깐 이야기가 끊겼지만 선배도 왜 이혼을 했는지 묻지 않았고 나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저 돈 많이 벌어야 돼요'라고 했고 서로 그저 웃고 말았다.
네 번째 이혼 고백
네 번째 이혼 고백은 가장 기다렸던 고백타임이었다. 기다렸던 고백타임이라니 이게 뭐라고. 26살 때부터 6년 정도 다녔던 첫 직장에서 만난 언니들이 있다. 우리는 직장에서 특별한 경험을 함께 했었다. 우리는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함께 해고를 당했고 함께 싸웠으며 함께 복직했다. 나는 2년 정도 다니다 그만뒀지만 언니들은 지금까지 그 직장에서 함께 일하고 있다. 언니들은 마치 내가 아픈 손가락인 것처럼 막내라며 아껴줬고 혼자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을 안쓰러워했으며 좋은 일에는 함께 기뻐해줬다. 이번에는 슬픈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8월 언니들과 청주로 1박 2일 여행을 갔다. 코로나를 빼면 1년에 한 번 정도 1박 2일로 여행을 다녔다. 점심도 맛있었고 숙소는 참 예뻤으며 오랜만에 6명 완전체로 모여 분위기도 좋다. '할 말 있다는 게 뭐야? 혹시 둘째?' 궁금해 죽겠다는 듯 둘째 언니가 웃으며 물었다. 둘째 이야기가 나오자 언니들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쳐다봤다. 아이고 이 언니들 보소. 나는 아기가 없는 틈을 타 말했다.
'저 이혼했어요.'
'왜?' 역시 이 언니들 직접적이다.
'남편이 바람 폈어?'
'네'
'아이고야.'
나는 언니들에게 구구절절 그간 있었던 일을 말했고 언니들은 차분히 들어줬다. 중간중간 아기가 드나들어서 이야기가 끊기기는 했지만 언니들은 고생했다고 다독여주고 잘할 거라고 힘을 줬다. 우리는 하이볼을 맛있게 제조해서 이혼을 안주삼아 술을 마셨다.
다음 날, 우리는 또 아무 일 없는 듯 그냥 재미있게 하루를 보냈다. 누구도 이혼 이야기를 다시 꺼내지는 않았다.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신탄진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맏언니가 말했다. '서울로 오는 게 어때? 거기서는 너 혼자 너무 외롭지 않겠어?' '그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닌데 벌써 이 지역에 내려와 산지가 10년이고 여기서 자리를 잡았는데 이걸 포기하고 간다는 게 쉽지 않네요. 저 잘할 수 있을 거예요. 걱정 마세요. ' 4시 52분 서울행 기차가 떠났다. 나와 아들은 플랫폼에 남아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가을이 오고 있다.
뜨거운 열기도 한풀 꺾였고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도 선선함이 느껴진다.
그 누구도 묵묵히 흐르는 시간을 막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