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이별은 미움마저 잊을 때
가까이서 보면 차이가 크게 보이기 마련이다.
전 남편은 대학 때 본인과 나는 샴쌍둥이라고 했다. 전 남편은 본인과 내가 많이 닮았고 많은 것을 비슷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그때는 그저 멘토멘티 같은 관계였는데 나도 그 말이 싫지는 않았다. 그 말이 그저 열심히 하는 후배 하나 잘 꼬셔보자는 목적으로 그저 던져 본 말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싫지 않았다. 나는 남편이 냉철하고 이성적이며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그때는 보이는 삶의 모습도 그러했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서 본인이 먼저 샴쌍둥이라고 하는 데 싫을 이유는 없었다.
가까이서 보면 차이가 크게 보이기 마련이다. 또한 시간과 경험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10여 년이 흘러 연애하고 결혼해 보니 전 남편과 나는 다른 사람이었다. 샴쌍둥이로 불리던 시절에는 많은 것을 함께 경험했고 공유했지만 그로부터 10년이 흘렀고 결혼까지 했으니 우리는 서로의 공통점보다 서로의 차이점에 주목하게 되었다.
우리는 취향에 있어서도 좀 달랐다. 남편은 좀비물과 피와 살점이 날아다는 영화를 즐겨했으나 나는 그런 류의 영화는 돈을 주고 혐오와 스트레스를 사는 것이라 생각하는 류였다. 로맨스와 코미디를 즐겼다. 그래도 우리는 일본드라마는 꽤 많이 봤다. 그것에서는 좀 통했다. 남편이 구해 온 일본드라마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물론 웃프게도 이혼 과정에서 남편의 외장하드 3개에 일본 야동이 꽉 찬 것을 보고 기겁을 했지만 말이다. 이제 일본드라마나 영화는 당분간 못 볼 것 같다.
남편은 일요일 아침 내가 동물농장을 보고 있는 것을 싫어했다. 좋아하지 않을 수 있으나 싫은 티를 내서 사람을 참 불편하게 만들었다. 동물농장을 보며 아침밥을 먹다가 싸움을 할 정도였으니 어느 때부터는 의도적으로 동물농장을 보지 않았다. 남편은 인간이 동종의 인간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서 동물에게 보호와 도움을 주는 것은 일종의 기만 혹은 자기만족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남편은 감정을 잘 감추는 편인데도 동물농장 앞에서는 이유 모를 분노를 드러냈다.
남편은 나를 매사에 부정적이라고 했다. 나는 남편을 책임감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우리는 결혼 생활 중 많은 것을 함께 공유할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대화가 어긋났다. 그때쯤 샴쌍둥이는 확실히 분리되었다. 아마 그 시점에 서로를 샴쌍둥이라고 불렀다면 주먹이 오고 갔을지도 모른다.
나는 결혼을 하면서 타 지역으로 이사하게 되어 주변에 아는 사람이 없었고 새로운 일과 직장에 적응하면서 업무스트레스가 심한 상태였다. 게다가 남편이 벌이가 없어 생활이 나아질만한 기미도 없었다. 그것이 남편에게 표출되다 보니 남편은 내가 신경질적이고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이도 물론 그 당시 남편이 오픈카톡방에서 어떤 여자한테 와이프 험담을 하던 중에 나온 나에 대한 평가다. 웃프네)
남편은 결혼 때부터 5년 간 생활비를 준 적이 없다. 가끔 명절 때 20만 원 정도를 보탰을 뿐이다. 대출을 내 전셋집을 구하는 것도 대출이자와 부부의 보험료를 내는 것도 생필품을 사는 것도 모두 내 월급으로 해결했다. 게다가 나는 멍청하게도 남편에게 내 카드와 새로 산 차까지 내줬다. 남편은 자격증 공부를 하겠다고 했지만 토익 점수 패스도 몇 번이나 실패하고 합격률이 50%가 넘는 1차 시험도 두 번이나 떨어졌다. 나는 남편이 무책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또 10년이 흘렀으니 20년 전 대학 때 내가 알던 남편과 지금의 남편은 무척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나는 남편을 무책임한 사람이자 사회성 없고 비틀어진 욕망에 빠진 이중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소한 것들로 그런 남편의 모습들이 자꾸 되새김질되어 생각나 분노가 올라온다.
지독한 미움이 올라올 때가 있다.
이혼을 하고 나면 그저 잊고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과거는 잊고 앞만 보고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별 것 아닌 일상 속에서 남편이 떠오른다. 특히 뭔가가 제대로 안될 때, 몸이 힘들 때 갑자기 가슴 깊은 곳에서 울화가 치민다.
남편이 쓰던 방을 정리하면서 새 벽지가 긁혀 해진 것을 봤을 때 갑자기 나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아마 결혼 생활 중에 그것을 봤더라면 그러려니 넘어갔을 것이다. 남편은 종종 어차피 물건은 쓰다 보면 해지고 상처 나는 거라며 자신의 조심성 없는 행동을 어물쩍 넘어갔다. 그런 남편이 쓰던 방이었으니 이미 남편 방은 여기저기가 얼룩덜룩하고 가구에 긁혀 해진 부분이 있었다. 새로 하나 더 상처가 생겼다 해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분노가 솟구쳐 나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전 남편은 경제적 능력은 없으면서 물건 사는 것은 좋아했으나 그렇다고 물건을 소중하게 다루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경차에 풀옵션을 넣어 구매했으면서도 차 안은 항상 쓰레기가 가득했다.
아들 방과 거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수많은 레고조각들을 보면 화가 난다. 남편은 애가 3살 때부터 아들 장난감이라며 레고를 사들였다. 아기 손에는 맞지 않는 자동차 레고 시리즈들을 사들였다. 본인이 조립하고 아들은 조립된 자동차를 가지고 노는 식이었다. 애를 보라고 하면 자기 방 어딘가에 미리 사놓은 레고를 꺼내 본인이 신나게 조립하고 있다. 아들은 그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다. 그 레고를 조립하는 것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행동인가?
물론 자동차를 좋아하는 아들은 아빠가 사다 주는 레고 자동차를 좋아했고 집에는 레고 자동차와 건물들이 30여 개는 될 법하다. 그러나 조립 자동차는 가지고 놀다 보면 망가지기 일쑤였고 그것을 스스로 조립할 수 없는 아이는 짜증을 냈으며 성질 껏 레고 자동차를 던져 산산이 부수어놨다. 아이의 연령대에 맞지 않는 장난감은 아들의 짜증을 한껏 돋우었다. 이제는 좀 컸고 손도 야물어져서 제법 스스로 조립을 해내기도 하지만 부수고 조립하고 던지고 헤집어놓는 통에 주말을 보내고 나면 방과 거실이 수많은 레고 조각으로 엉망진창이다.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아들에게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애초에 사들인 전 남편의 허영에 분노가 솟는다.
그리고 분노가 솟는 지점이 한 가지 더 있다. 올해 2월 남편의 외도 증거를 모으는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 상간녀와의 카톡에서 상간녀는 아들에게 레고를 사줬는데 함께 해줄 사람이 없다고 했고 남편은 어렸을 때 레고 좋아했다며 흔쾌히 자기가 가서 같이 해주겠다고 했다. 그게 내가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을 때였다. 남편은 우리 아들과 마주 앉아 레고를 조립했던 것처럼 상간녀의 아들과도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레고를 조립했겠지. 아니, 시간 상으로 보자면 상간녀의 아들과 마주 앉아 레고를 조립했던 것처럼 우리 아들과 마주 앉아 레고를 조립하는 셈이다. 아이들은 죄가 없으나 그 더러운 감정의 찌꺼기들을 레고를 매개 삼아 집에 들였다는 생각에 바닥에 흩어져 있는 레고 조각들을 보고 있자면 지독한 미움이 올라온다.
완전한 이별은 미움마저 잊을 때
남편의 잘못이 아닌 것에도 남편에게 화가 난다. 우리는 몇 년 전 새 집으로 이사하면서 블라인드나 소파, 서랍장 모두 같이 상의해서 구매했고 디자인에도 만족했고 서로 잘 샀다고 칭찬까지 했었다. 그런데 창문 블라인드를 올리다가도 올리고 내리기 불편한 우드 블라인드를 선택했던 남편이 짜증 나고 아들이 소파에 음료를 흘려 얼룩이 생기자 밝은 색 소파를 골랐던 남편이 미워지고 수도 필터의 빈 박스를 버리지 않고 서랍장에 그대로 둔 모습에 화가 나고 거실 서랍장 문이 잘 닫히지 않자 실용적이지 않고 겉보기에만 그럴싸한 서랍장이 꼭 전 남편 같다는 생각에 분노가 올라온다.
밤늦게까지 잠들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보고 있을 때면 4년 전 나에게 무선 이어폰을 선물했던 남편에게 갑자기 화가 난다. 깊어진 주름과 늘어진 피부를 보고 있으면 갑자기 그 책임이 남편에게 있는 것 같아 미운 마음이 든다. 드레스룸에서 한참을 고민해도 마땅히 골라 입을 그럴싸한 옷 한 벌, 구두 한 켤레 없는 구질구질한 상황이 남편 책임인 것 같아 화가 난다. 나는 4년 간 아주 요긴하게 무선 이어폰을 쓰고 있고 남편은 나에게 피부관리기기도 사줬으며 옷은 좋은 것을 사서 오래 입는 게 낫다며 한 벌을 사더라도 제대로 사라고 했었는데 말이다.
그런 면에서는 남편은 죄가 없다. 늘어진 뱃살도 칙칙한 얼굴도 남편이 그저 이쁘다고 하니 정말 이뻐하는 줄 알고 살아온 내 죄다. 주름이 깊어져도 피부가 칙칙해져도 피부과에서 관리받지 않았으며 옷이나 신발은 인터넷이나 홈쇼핑으로 몇 벌을 사 교복처럼 입고 다녔다. 부부가 모두 제대로 된 밥벌이를 늦게 시작했고 자식도 어리니 남부럽지 않게 아기 키우고 부모 봉양하고 여유 있는 노후를 위해서라면 쓰는 것보다 한 푼 두 푼 차곡차곡 열심히 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생각은 나 혼자 했었나 보다. 남편은 원래부터 그런 면에서 상당히 무심했었는데 왜 나 혼자 김칫국을 마신 걸까.
남편에 대한 분노의 마음을 오래 가져갈 생각은 없다. 점점 과거의 기억이 왜곡되어 가는 것 같고 나 스스로 피해자라는 생각에 우울해진다. 요즘 애청하는 프로그램 '나는 솔로' 돌싱 편에 출현한 한 여성 출연자가 결혼생활과 전 남편에 대한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걸 보고 있자니 불편한 감정이 들었다. 결혼생활과 전 남편에 대한 거친 표현이 아직 그 아픔 속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모습처럼 보였다. 그 여인과 나는 아직 그 아픔 속에 있다. 아직 편안한 상태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주문을 외운다. '나의 평온은 남편에 대한 미움도 잊는 것으로 완성된다. 그러기 위해서 나에게 집중하자. 내 몸과 마음에 집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