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지시한 일이니 보고는 받아야겠지만 이 부장이 사뭇 진지하게 하는 회사 내 동향 파악이라는 이름의 발표는 들으나마나 한 내용뿐이다. 이 부장의 말 대로라면 모두가 의심스럽고 모두가 적인 셈이다. 그 말대로라면 지금 발표를 하고 있는 이 부장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모두를 향한 의심의 눈초리가 자신에게는 향할 리 없다는 저 단순함이 무철은 우습다. ‘이상으로 발표를 마치겠습니다.’라는 말을 기다리며 무철은 습관적으로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데 핸드폰이 진동한다. 핸드폰으로 손을 뻗어 메시지를 확인한 무철의 얼굴에 만족스러움이 구수한 밥 냄새처럼 퍼진다.
"너 편 하기로 함"
이 부장이 발표를 마치겠다는 말을 하자마자 무철은 수고가 많았다는 말로 서둘러 회의를 마무리한다. 그리고 지금처럼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덕분에 회사가 이만큼 돌아간다는 말로 이 부장을 추켜세운다. 지금처럼 다른 곳에서 헛물을 켜고 있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걸 알 리 없는 이 부장은 만족스러운 얼굴이다. 무철은 다른 사람을 통해 지시한 면담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 부장의 횡포와 간계를 떠올린다. 역겹고 하찮은 인간, 이 부장을 볼 날도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사실, 무철은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다.
그저 좋게 말해 ‘안정적’ 이지만 회사 언어로는 ‘우려되는 수준’으로 떨어진 [BREATH]의 판매 수치에 대해 언급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설명하는 몇 개의 수치를 들었다. 예를 들면 부정적인 평가 수치랄지, 구매를 망설이는 이유에 대한 고객들의 주요 반응을 모아놓은 설문 조사 결과랄지, 유사 제품의 시장 진입 증가율 같은 것들. 무철의 의도에 따라 숫자를 선택하고 배열했다. 그 결과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걸 통해 무철은 거짓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내부에 누군가 적이 있다.’
‘내부에서 누군가 [BREATH]를 빼돌렸다.’
만들어진 거짓을 소문으로 퍼트리기 위해 무철은 이 부장을 이용했다. 특별히 보안을 강조하면서 이 부장에게 거짓을 전했고, 이 부장은 이 소식을 안팎으로 열심히 퍼 날랐다. 이 부장이 오직 무철에게만 충성을 약속했을 리가. 이 부장의 입을 통해 두발이 달린 소문이 퍼지고 어느새 사실이 되었다. 무철의 기대보다 빠른 속도로.
처음부터 무철이 원한 건 향미뿐이다. 회사에 흠집을 내는데 필요한 능력을 갖춘 조력자. 향미의 능력이라면 이 회사를 무너트릴 수 있었다. 어머니를 배신한 죄책감을 덮어씌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아버지. 그 사람이 만든 그룹의 가장 존재감 없는 이곳을 이만큼 키워 놨으니 이제는 이것을 폭탄으로 만들어 당신에게 던지리라. 무철은 서랍에서 어머니의 낡은 손수건을 꺼내 손에 쥔다. 손에 힘을 주었다가 편다. 손수건에 주름이 잡혔다가 이내 제 모양을 찾아간다. 구겨진 손수건의 모습이 비틀린 자신 같다고 생각하지만 손수건이 제 모양을 찾아간 것처럼 무철은 제 모양을 찾아갈 수 없을 거라는 걸 안다. 무철은 자신의 원래 모양이 무엇인지 잊은 지 오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