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 리그_코와 눈의 더블 플레이

골절 데뷔전 2

by 하다

구급차는 처음이다.


만약 눈을 가리고 탄다면 나는 분명 화물차에 탄 줄 알았을 것이다.

절대 안정을 요하는 위급 환자를 실어 나르는 구급차가
이렇게 심하게 흔들리고 덜컹거려도 되는 건가 싶다.

평소 약골로 유명한 내 위가 울렁거리기 시작한다.
누우면 좀 나을 것 같은데, 코피 때문에 앉아 있어야 한단다.

저녁을 먹으러 가던 길에 사고가 났으니 속은 빈 상태다.
의자는 왜 또 하필 뒤보기 상태로 놓여 있는 건지…
울렁증이 생기기 알맞은 조건이 완성된다.

그래도 울렁증 덕분에 코와 얼굴의 통증은 잠시 잊는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시간이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건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물리적 시간은 관찰자의 속도가 빠를수록
느리게 흐른다. 그런데 심리적으로 볼 때 시간의 상대성은 또 다르다.

내가 움직이는 속도와 상관없이 괴롭거나 지루하고 빨리 벗어나고 싶은 상황에서는
시간이 극도로 느리게 흐른다. 결론적으로 실제 구급차를 탄 시간은 약 40분 남짓이지만,
나는 체감상 구급차를 종일 탄다.


차에서 내리자 속은 곧 가라앉는다.
울렁증이 사라지자 이번에는 얼굴에 마취주사를 맞을 때처럼 얼얼한 통증이 밀려온다.
거기에 더해 앞으로 내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들이 머릿속을 점령한다.

TV에서 보던 응급실은 긴박하고 드라마틱했는데,
현실의 응급실은 무료할 정도로 조용하고 사무적이다.


구급대원들은 다음 호출을 위해 빨리 가야 할 텐데

의사가 나와 사인을 해 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단다.

피곤할 텐데 계속 서서 기다리는 구급대원을 보니 마음이 불편하다.


“좀 앉아서 기다리세요~”


내가 말한다. 구급대원은 웃으며 대답한다.


“아니에요. 앉아서 기다리면 말이 나와서요...”


승차감이 최악인 구급차를 하루 10시간 넘게, 때론 종일 타고 다니며
멀미가 나기도 한다고, 또 차량 고장이 너무 잦다고 한다.

그런데 의자에 앉지도 못하게 한다고? 누가?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하시는 분들인데
정작 본인들의 건강과 안전은 담보로 하고 일하는 게 아닌지 걱정스럽고 화가 난다.

‘그래 다 좋은데, 넌 네 코가 석 자지 않니?’
라는 내면의 소리가 들린다.

그래, 내 코가 부러졌을지도 모르는 판에 남 걱정할 때가 아니지...
다시 내 걱정 모드로 전환한다.




드디어 의사가 나와 몇 가지 질문을 하더니

구급대원들을 해방시켜준다.

나도 빨리 해방되고 싶지만 아직 더 기다리란다.

갑자기 소변이 마렵다.
조심조심 화장실에 들어가 볼일을 보고 나와 손을 씻는다.

습관적으로 보던 거울을 바라보는데
용기가 필요할 줄은 몰랐다.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 거울 속 오징어와 눈을 마주친다.


헙!

정확히 20배 못생겨진 내 얼굴과 오래 눈 맞추는 건 일종의 고문이다.
얼른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화장실에서 나온다.

물가에 내놓은 애 보듯 화장실 앞까지 쫓아온 신랑이 얼른 손을 잡아준다.

이 얼굴을 보고도 손을 잡아주고 걱정해주다니,
찐사랑이다.




의사가 “정하다 님~” 하고 나를 부른다.

어떻게 자빠졌는지, 몇 시에 자빠졌는지 등 몇 가지 질문 끝에
나는 잠시 해방되어 엑스레이와 CT를 찍으러 간다.

앞 보고, 옆 보고, 고개 들고, 고개 숙이고
다각도로 머그샷을 찍고, 소름 돋는 CT를 찍는다.

마음 졸이며 기다리는데
대기실 의자에 누워 끙끙 앓는 아주머니가 계속 신경이 쓰인다.

‘보호자도 없이 혼자 데굴거릴 정도로 아프면 얼마나 서러울까.’

지나가는 쌤을 붙들고 아파 죽겠다며 빨리 진료를 보게 해달라고 애원하는데 마음이 아프다.

그러다 극심한 통증으로 응급실을 찾아도 대기실에서 무한정 대기해야 하는

응급실 시스템에 또 분통이 터진다.

‘얘! 그런데 아직도 네 코가 석 자지 않니?’

또 들리는 내면의 소리.

그저 그분이 빨리 진통제라도 맞을 수 있게 되길 바라며
나는 다시 내 걱정을 시작한다.






이번에는 제법 빨리 내 이름이 불린다.

나는 내심 부러진 건 아니라거나, 조금 부러져서 그냥 저절로 붙게 조심하라거나 하는
결과를 기대하며 파릇파릇 젊은 의사 앞에 앉는다.

의사는 대뜸 말한다.


“코가 많이 부러졌고요.”

“안와도 여기 보시면 부러져서 안 보이죠?”

“수술해야 되고요.”


내겐 앞으로 몇 달의 운명이 걸린 중대한 결과를

“어, 휴지가 떨어졌네.” 정도의 톤으로 말한다고???

나는 아찔해지는 이 소식을
“모기에 물리셨네요. 버물리 바르세요.”라고 말하듯
덤덤하게 말하다니!!!

순간 의사가 야속하지만, 의사가 응급실에 오는 환자들에게 감정적으로 이입한다면
그것 또한 문제겠지 싶어 마음을 누그러뜨린다.



수술을 하게 되면 수술 시간은요?
수술 후 회복 기간은요?
안와골절 수술은 어떻게 하는 건가요?
눈은 혹시 가려야 하나요?



내 질문 공세에 그 파릇파릇한 의사는
“제가 그거까지는 잘...”이라고 한 발 뺀다.

내일 성형외과 전문의 진료를 받고 확실히 결정해야 한다는 거다.

집과 너무 먼 병원이라 소견서를 받아 응급실을 나온다.
드디어 일단 해방이다.





외식한다고 신나서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나,
악몽 같은 사고와 무섭게 흐르던 피, 걱정으로 가득 찬 남편의 눈,
덜컹거리는 구급차, 피곤한 구급대원, 안타까운 대기실 풍경,
더 피곤해 보이는 의사...


단 몇 시간 만에 벌어진 일들이라니.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또다시
비현실감에 빠져든다.


택시 기사님은 내 오징어 몰골에 놀라셨는지
혀를 끌끌 차며 어쩌다 얼굴을 그랬냐고 묻는다.

그러지 않아도 오징어 돼서 속상한데
굳이 알은체를 하는 기사님이 얄밉다.


그때, 눈치도 없이 남편이 구구절절 썰을 푼다.

‘그래, 남편도 몇 시간 동안 찐하게 한 맘고생을 누군가에게 풀고 싶은 거겠지.’

그래도 말을 섞고 싶은 기분은 아니라
창밖으로 눈을 돌린다.

눈 밑으로 붙여둔 반창고가 그마저도 방해한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다.

앞으로 다가올 고난의 파도에도 넘어지지 않게
마음을 단단히 먹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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