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에어컨을 켰다 껐다, 선풍기를 켰다 껐다,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다 보니 아이도 잠이 달지 않았는지 일찍 잠에서 깼습니다. 일찍 깨서 혼자 방에서 놀다가, 책을 펼쳤다가, 괜히 슬리퍼를 발로 찼다가 심심했는지 밥을 먹자마자 학교에 가겠다고 나섭니다. 평소보다 30분쯤 이른 시간이라서 교실에 아무도 없을 수도 있다고 말해보지만, "에이, 어린이는 그렇게 게으르지 않아!"라며 정말 학교에 갔습니다.
이런 행운의 시간이! 이 30분을 어찌 보내야 하나 설레는 마음으로 흐트러진 물건들을 정리하고 커피를 한 잔을 만듭니다. 그런데.... 아이가 가고 나니 제일 먼저 아이 생각이 나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이가 있을 때는 혼자 있는 시간을 그리워하고, 아이가 가면 아이 생각을 하는... 참 충실히도 없는 존재와 시간을 탐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침대를 정리하다가 아이가 읽다가 두고 간 책이 보입니다.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주로 책 등을 봅니다), 책을 빌려 오는(빌린 책을 다 읽는 일은 굉장히 드뭅니다) 것을 좋아합니다. 아이 책도 욕심을 내어 대출 한도만큼 꼭 빌려오는 편입니다. 그 가운데 아이와 함께 읽는 책은 절반이 되지 않고, 아이가 정말 좋아해서 다시 읽어달라고 하는 책은 한 두 권입니다.
이유는 모르지만 아이가 참 좋아한 책들을 떠올려 보면, 일관성이 없습니다. 그 책이 왜 좋은지 물어봐도 그냥 재밌다고만 합니다. 아이의 사랑을 받았던 그림책들을 떠올려 봅니다.
백희나의 [어제저녁]은 소장하고 있는 책이라서 잊을만하면 다시 주 읽는 책입니다. 병풍처럼 넓게 펼쳐볼 수도 있는 책이고, 왼쪽을 펼쳐서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면 다시 오른쪽으로 펼치며 읽는 책입니다. 제본이 정말 특별한 책입니다.
책의 내용은 말 그대로 '어제저녁'에 벌어진 아파트 주민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서로 얼굴을 마주하지는 않지만 아파트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서로의 저녁에 어떤 영향을 끼칩니다. 엄청난 사건은 아니지만 소소한 절망과 기쁨과 안도의 사건들입니다.
아이는 내용을 다 기억하고 있을 만큼 이 책을 좋아하고, 반복해서 읽어달라고 합니다.
저는 이 책에서 가장 뒤에 있는 판권면을 가장 좋아합니다.
책 요정 이기섭은 백희나 작가의 손자가 아닐까...
큰 도움을 준 백광주, 한광희는 부모님이 아닐까..
초콜릿 3단 머드케이크는 자매님이 만드셨나?
영감과 응원의 박홍비, 박범준은 작가님의 아이들이 아닐까? 특히 '홍비'라는 이름은 무려 [구름빵]의 주인공이니 그럴 것 같다...
암묵의 응원의 박상태님은... 남편이 아닐까?
이런 생각들을 하며 어머니와 아내이자 작가로서 '백희나'의 삶이 이 판권면에 녹아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뭉클해지기 때문입니다.
조원희의 [미움]도 정말 여러 번 읽은 책입니다. 읽으면서 '미움'이라는 감정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던 책이라서 저도 참 좋아한 책입니다.
이 책은 읽고 나서 아이가 생선을 먹다가 잔가시가 목에 걸린 일이 있었는데 그게 얼마나 답답한 일인지 실제로 느끼게 되기도 했습니다.
미움의 대상보다 미워하는 마음을 가진 자신이 더 괴롭다는 것, 그리고 미움이 달린 채로 지내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일인지를 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미움을 잘라낼 수 있는 것은 상대방의 사과나 상대방의 행동이 아닌 바로 미워하는 마음을 가진 '나'라는 것이 얼마나 담대한 삶의 지혜인지요!
이억배의 [이야기 주머니 이야기]입니다. 제가 목소리를 바꿔가며 이야기를 읽어주다 보면 목이 너무 아파서 두 번 이상 읽기가 힘들지만 아이는 꿋꿋이 '한 번 더'를 외칩니다.
특히 '혼뜨검을 내주마' 부분에서 자지러지게 웃습니다. '청실배'나 '산딸기' '옹달샘'과 같은 아름다운 낱말들을 소리 내어 읽으면 그 소리 자체가 즐거움을 줍니다.
이 책은 정말 입말의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진짜 '이야기'책인 것 같습니다. 아마 이억배 선생님께서도 여러 번 입말로 소리 내어 이 이야기를 다듬으셨을 것 같습니다.
토비 리들의 [달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는 도서관에서 빌렸던 책인데 "엄마, 사 줘"라는 강력한 요청으로 소장한 책입니다.
사람들로 둘러싸인 대도시에서 사람들로 인해 오히려 고독한 두 친구의 우정과 소외된 존재들의 존엄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아이는 도시에 잘 적응하지 못한 험프리가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피아노를 운반하는 일을 하는 장면을 좋아합니다. 레스토랑에서 험프리는 아름다운 로마의 사진을 보며 음식을 나르다가 쏟고 그 옆으로는 기울어진 피사의 사탑 그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험프리에게도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는 안목과 욕구가 있지만 도시의 삶은 그에게 생존 이상의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던 두 친구는 우연히 '달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라는 공연의 초연 티켓을 줍게 됩니다.
"공연의 광휘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웃어야 할 부분에서 웃고, 한숨지어야 할 부분에서 한숨지으며...... 마침내 극이 달콤쌉싸름한 결말로 치닫자, 험프리는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공연을 보고 나온 험프리와 클라이브는 "여기는 우리의 도시야!"라고 외치며 스스로 '도시는 누구의 것도 아니다'라고 선언합니다. 소외받고, 도시의 소모품으로 쓰이기만 했던 그들은 도시의 주인으로 당당히 '존재'하는 시간을 보냅니다. 그들이 "빛과 소음이 명멸하는 도시의 밤 속"을 지나 "갈림길에 이르렀을 때" 서로를 꼭 안아주며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네는 마지막 장면에서 단단해진 두 사람의 모습은 참으로 멋집니다.
이 글을 쓰다 보니 행운의 30분을 넘기고 말았습니다. 이제 저도 출근해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