름의 나열 ch.2
제법 덥다. 6월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달이다. 여름으로 들어서는 초입의 날씨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추위를 많이 타는 체질 탓에 태양에 적당히 달아오른 날씨도 따뜻하게 느껴질 정도다. 여름은 참 시끄러운 계절이다. 모든 생명력이 가장 강하게 발산되는 시기라서, 부쩍 많아진 풀벌레와 꽤나 짙푸르게 자란 잎사귀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까지 모든 것이 소란스럽다. 이를 아는 것처럼 마치 더욱더 움직이라는 듯 여름의 해도 하루 안에 오래도록 머물다가 돌아간다. 요즘은 같은 시간에 퇴근을 해도 햇빛이 눈부시고 발 밑에 그림자가 있다. 기지개를 쭉 켰다. 나도 뭔가 하고 싶다. 밤이 찾아오기 전에.
내가 혼술의 재미를 알게 된 것은 20대 후반 즈음의 여름이었다. 『와카코와 술』 은 당시 내가 정말 즐겨보던 일본 드라마다. 주인공 와카코가 퇴근 후 피로를 풀기 위해 혼자 맛있는 안주와 술을 찾아다니는 내용인데, 원작인 만화나 애니메이션도 있었지만 역시 매회 등장하는 안주를 실감 나고 맛있게 보기 위해선 드라마가 최고다. 혼술을 하면 남들 장단에 맞춰 먹을 필요도 없으니 자기 주량에 맞게 마시게 되고 지갑 사정도 생각해서 적당히 조절할 수 있다. 그리고 뭣보다 눈치 볼 것 없이 나 혼자 즐기는 맛있는 안주! 한창 회사생활이 지겨워질 3년 차 직장인이던 나는, 숨 쉬듯이 들러붙은 매너리즘과 스트레스가 차가운 하이볼에 씻겨 내려가는 상상을 했다. 가뜩이나 일식과 일본 술도 좋아해서 상상만으로도 행복했다. 스트레스는 이렇게 푸는 거지. 여름의 해는 너무나 길고, 그래서 집에 일찍 들어가기 싫으니까. 나도 와카코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서 오세요. 몇 분이세요?”
“저어… 한 명이예요.”
바로 와카코가 되어 보기로 했다. 나름 열심히 회사 근처 선술집을 찾아보고 가장 작고 한적한 분위기로 보이는 곳을 선택해서 들어갔다. 패기 있게 맘먹을 때와는 다르게 막상 가게 입구에서 쭈뼛쭈뼛 들어가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혼자 왔다고 말했지만 익숙하다는 듯 직원은 나를 다찌 쪽으로 안내했다. 다찌는 텅 비어있었지만 왠지 모를 민망한 기분에 구석에 자리를 잡아서 앉았다. 손바닥만 한 나무 의자와 폭이 좁은 테이블… 생각보다 아늑하다! 나는 평소 먹어보고 싶었던 꼬치구이 안주와 제일 좋아하는 하이볼을 한 잔 주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이 차가운 하이볼과 기본 안주를 가져다줬다. 기본 안주로는 달달하고 짭짤한 간장이 잘 배어있는 곤약무침, 그리고 대여섯 개의 콩. 정확히는 껍질 채 삶아진 콩이다. 이렇게 선명한 연두색의 콩은 완두콩 말고 아는 것이 없어, 나는 그게 껍질 채 삶아진 완두콩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익히 알던 동그란 완두콩과 다르게 이 놈은 작고 납작한 강낭콩 모양이고… 이 콩의 이름이 에다마메, 그러니까 풋콩이란 사실은, ‘완두콩’을 더 주실 수 있냐는 내 말에 직원이 웃으며 알려준 덕분에 알게 됐다. 된장을 만들 때 쓰는 대두의 덜 익은 상태로, 완두콩과 아예 종자가 다른 콩이라고 했다.
우리 집은 항상 잡곡이나 콩을 넣어서 밥을 짓기 때문에 콩을 자주 먹고 자랐지만, 안주로 만들어진 에다마메는 처음 먹어보는 맛이었다. 통통한 콩 껍질을 가르면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매끈한 콩이 두세 알 들어있는데, 한 알씩 입에 넣고 꼭꼭 씹다 보면 짭짤한 맛에 특유의 풋내가 나는 듯하다가 이내 고소하고 달큼한 맛이 돈다. 모양새도 아주 맘에 쏙 드는데, 맛도 취향에 잘 맞았다. 한 알, 두 알, 세 알… 내가 먹는 콩마다 속으로 숫자를 붙였다. 얘기할 상대도 없으니 말없이 음식에 집중했다. 멍하니 콩 한 알과 함께 그날의 하루를 입 안에 넣고 곱씹었다. 또 눈물 나게 속상했던 순간들과 내가 너무 미웠던 순간들이 생각나면 콩을 더 털어 넣고 더욱 꼭꼭 씹어냈다. 나는 오늘의 나를 계속 콩과 함께 꼭꼭 씹었다. 입 안이 텁텁하게 느껴질 때 술 한 모금 머금어 모든 것을 헹구고 씻어냈다. 지나간 일은 두 번 다시 없어질 수 없지만 그저 기분이라도 마치 다 씻어냈단 듯. 나는 그날 총 서른 개의 콩을 먹었다. 다른 테이블의 도란대는 대화들과 가게에서 은은하게 틀어놓은 음악과 반대로 내가 앉은 다찌의 구석은 하이볼 잔에 부딪히는 얼음 소리를 제외하곤 너무나도 조용했다. 하지만 적어도 뻔한 위로나 주제넘은 조언들로 기분이 공허한 일은 없다. 때로는 이렇게 혼자 힘든 일을 작은 콩과 술로 씹고 삼킬 때가 필요할 것 같았다. 가벼운 맘으로 시도했던 혼술로, 나는 그걸 배웠다.
나는 요즘도 선술집을 좋아한다. 해가 긴 여름이 돌아왔으니, 다시 와카코가 되어보는 계절이다. 내가 혼자 편히 앉을 다찌 자리가 있고 안주가 저렴하고 맛있는 곳을 찾아본다. 다만, 이제 기본 안주로 꼭 내가 좋아하는 에다마메를 주는 곳을 골라서 가기로 했다. 더 달라는 말에 눈치 주지 않고 듬뿍 내어주는 곳이라면 더욱 환영이다. 나는 아직도 꼭꼭 씹어낼 하루의 후회가 참 많은 나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