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네 Jul 21. 2022

VIII. 음악의 날개 아래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노라

엘자 실러 | 마지막편

가장 뜨거운 논란의 중심에 있는 전 나치 당원인 그 지휘자를 만나러 가면서 엘자의 심중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서로 부딪혔을까. 하지만 음악을 위해서라면 나치에 입당했던 자신의 삶과 카라얀의 삶이 겹치는 것 또한 부인할 수는 없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그는 비록 용서받을 수 없을지라도 엘자와 마찬가지로 음악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엘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카라얀이 앉아있는 응접실 문을 열고 마침내 그 앞에 앉게 되었다.


나는 유대인 말살을 자행한 나치에 입당한 사람이었소. 


카라얀은 조용한 분노가 눈동자 속에서 나지막이 불타오르는 유대인 여성을 바라보며 이 여성에게 가졌던 당연한 의문을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을까 싶다. 엘자는 그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의문을 듣는 순간 심연 속 낡은 고통이 다시 한번 몰려오기 시작하였다. 


음악만을 위해 유대인을 증오하는 제국음악소의 일원으로 입당하였지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배제되며 더 이상 음악을 잡을 수 없었던 그 일이. 자신의 생계를 책임진 음악 교사 면허를 박탈하여 꿈도 희망도 없었던 그날이. 면허가 없이도 가르칠 수 있는 성인들에게 음악을 가르쳤지만 무면허로 교습을 했다는 터무니없는 나치의 주장으로 하루하루 살기 힘든 이 여성에게 어마어마한 벌금을 청구한 것도 모자라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피아노와 하프시코드를 몰수해간 그 고통이. 이제는 더 이상 빼앗을 것이 없는 이 가여운 유대인을 말살하기 위해 강제 수용소로 강제로 끌고 간 그들의 만행이. 한 겨울밤 그 추운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던 매서운 밤이. 


엘자는 잠시 눈을 감았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인생이었지만 음악이라는 한 줄기 빛으로 오늘날까지 올 수 있었다. 신의 날개 아래에서 인류는 모두가 형제가 아니던가. 엘자는 자신을 오늘날을 이끌어 준 음악의 날개 아래에서 음악에 목숨을 맡긴 모든 형제자매를 끌어안기로 하였다. 


유대인이 내민 구원의 손길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상임지휘자를 맡은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다시 한번 도이치 그라모폰과 전속 계약을 맺기로 하였다. 스테레오의 시대로 새롭게 태어나는 도이치 그라모폰을 대표하는 아티스트의 역할도 함께 도맡으면서 말이다. 




도이치 그라모폰의 총괄 프로듀서를 지내며 열심히 달려온 엘자 실러는 어느덧 희끗해진 머리와 함께 어느덧 예순의 나이로 접어들게 되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Richard Strauss의 '영웅의 생애 Ein Heldenleben op.4'로 당당히 도이치 그라모폰의 위풍당당한 입성을 알린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유려하고 매끈한 연주는 그들의 이름이 새겨진 음반을 출시할수록 회사의 명성에 화려한 빛을 안겨주었다. 패전 이후 서서히 이름이 잊혀가는 중이었던 한 음반사는 그 어느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클래식 음반사로 우뚝 자리 잡게 되었다. 


이제는 조금 편안하게 인생을 즐겨도 되지 않을까 싶지만, 엘자 실러는 여전히 음악을 따라 바쁘게 움직이며 회사를 이끌어 나갔다. 오늘도 이 여성은 예술의 정점에 오른 아티스트를 찾기 위해 유럽의 무대를 오가며 조금도 자신의 쉴 틈을 제공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만난 수많은 아티스트 중 한 번 자신의 마음에 들어오는 음악을 발견하게 되면 그 즉시 자신이 속한 이 회사로 영입시키기 위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곤 하였다. 그것이 바로 엘자 실러, 그가 사랑하는 음악을 위해 몸을 불살라야 할 숙명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원수나 마찬가지인 나치 당원의 의혹을 받는 카라얀을 품기 전인 1957년, 함부르크의 어느 연주회에 오른 검은 머리를 가진 16살 여자 아이 또한 놓치지 않아야 될 귀중한 인재였다. 함부르크에 막 데뷔한 아이가 무대에 오르는 순간 이미 그 음악의 포로가 된 엘자는 연주회가 끝나자마자 홀린 듯이 그 아이에게 다가가게 되었다. 무대에 억지로 올라온듯한 이 아이의 음악은 어쩜 이렇게 자유로울 수 있는 걸까. 엘자는 이 아이가 가진 예술적인 재능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모자라지만 세상에서 바라봤을 땐 어마어마한 계약금을 제시하며 전속 계약을 권유하였다. 물론 이 아이가 녹음하고 싶은 그 어떤 레퍼토리도 다 받아들여 프로그래밍을 진행해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까지 제시하며 말이다. 


'생각은 해볼게요.'


젊은 피아니스트가 세계적인 음반사, 도이치 그라모폰의 총괄 프로듀서인 엘자 실러의 앞에서 이렇게 답하였다. 이제 막 유럽에 갓 데뷔한 아르헨티나의 아티스트가, 입성만 해도 성공의 가도를 걷는 도이치 그라모폰의 제안에 생각해봐야겠다는 답변을 주다니. 젊은이들 특유의 무심한 거절을 받은 엘자 실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당돌한 피아니스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엘자는 그 일 후 얼마 되지 않아 회사의 내로라하는 고위 간부들을 보내어 다시 한번 설득을 시도하였지만 돌아오는 것은 다시 한번 되돌아온 명백한 거절뿐. 엘자는 결과를 듣고는 지긋한 미소를 지었다. 벌써부터 자신만의 예술적 철학을 가진 이 젊은이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확고한 철학을 가진 아티스트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 엘자는 음반 제작을 원하면 얼마든지 연락을 달라는 부탁과 함께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기로 하였다. 


마르타 아르헤리치 Martha Argerich


그리고 예상은 적중했다. 엘자가 함부르크에서 파격적인 제안을 요구한 지 3년 만에, 어린 피아니스트는 어느덧 성인이 되어 도이치 그라모폰에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활발한 연주 활동 속에서 자신의 예술이 어느 정도 무르익은 것 같으니 음반으로 자신의 소리를 새겨도 되겠다는 이야기와 함께 말이다. 엘자는 바로 계약을 체결하였다. 과연 이 아티스트가 계약서를 제대로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자신이 원하는 레퍼토리를 연주한다는 조건 하나만을 내세우며 3년 만에 도이치 그라모폰의 제안을 받아들인 아르헨티나의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 Martha Argerich는 이렇게 엘자 실러의 눈에 들어 도이치 그라모폰에 입성하게 되었다. 


녹음실로 들어가 모리스 라벨 Maurice Ravel의 '물의 유희 Jeux d'eau'를 수려하고 세심한 손길로 연주하는 젊은 피아니스트를 바라본 엘자 실러는 문득 젊은 시절의 자신을 추억하게 되었다. 언제나 피아노 앞에 앉아 열 개의 손가락으로 음악을 탐구해 나가던 그 시절. 풍요로운 색채로 자신의 삶을 오색빛깔 감싸 준 음악.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만나게 해 준 음악. 그리고 이제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자신의 모습. 모든 레퍼토리를 세 번 씩 연주할 테니 알아서 골라달라는 아르헤리치의 요구에 웃음이 나온 엘자는 추억을 되새기는 자신의 모습을 마주 보고 깨달았다. 이제는 어느 정도 자리 잡은 도이치 그라모폰에 더 많은 젊은이들로 가득 채워져야 한다는 것을. 




페렌츠 프리차이, 칼 뵘 Karl Böhm, 로린 마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오이겐 요훔 Eugen Jochum, 프리츠 레만 Fritz Lehmann, 아마데우스 4중주단, 마르타 아르헤리치, 빌헬름 캠프 Wilhelm Kempff, 피에르 푸르니에 Pierre Fournier,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Dietrich Fischer-Dieskau,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Mstislav Rostropovich. 이 지면에 다 싣지 못할 정도로 예술의 정점에 다다른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자신의 삶이 담긴 음반을 출시할 때 그 뒤에는 항상 엘자 실러가 있었다. 


도이치 그라모폰과 손을 잡은 후 10년이 넘게 함께 일한 엘자 실러는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문을 두드렸던 그날로부터 5년이 지난 1965년, 자신의 손으로 가꾼 음반사를 은퇴하게 되었다. 이제는 중천에서 해거름으로 접어든 자신의 삶이 찬란하게 만들어내는 황혼의 빛깔을 만끽하기 위해서였다. 엘자는 퇴사 후 가장 먼저 항상 자신의 곁은 지켜준 소중한 친구, 줄리아 로테 슈테른에게 향하였다. 이미 15살 연하인 네덜란드의 테너 가수, 코넬리스 반 딕 Cornelis van Dijk과 결혼한 줄리아 로테.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남편과 함께하기로 서약한 그는 당시 엘자가 근무하던 하노버까지 이주까지 실행하며 항상 혼자였던 엘자의 곁을 지켜주었다. 첫 만남부터 항상 엘자의 곁을 지켜준 이 단아한 목소리를 가진 여성은 하노버로 이주한 지 몇 년 후 결국 이혼을 맞이하게 되었다. 서로 성격 차이로 인해 이혼을 했는지, 혹은 엘자와 두터운 우정을 쌓아가는 모습이 그의 심기에 거슬려서 이혼을 요구했는지 그 연유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은퇴 이후 엘자 실러와 줄리아 로테 슈테른은 잘츠부르크의 변두리에 있는 호프 베이 잘츠부르크 Hof bei Salzburg에서 자신들이 살아갈 보금자리를 다시 한번 만들기로 하였다. 이제는 자신들의 보금자리에 쳐들어 올 게슈타포도, 그리고 익명의 고발자도 없는 진정한 보금자리를. 아름다운 풍경에 녹아든 자신들의 보금자리에서 엘자는 음악으로 인해 풍요로운 색채로 가득한 자신의 삶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 줄리아 로테 슈테른과 함께 되짚어보며 그 아름다운 공간을 웃음으로 가득 채워나갔다. 물론 이 와중에도 세계를 이끌어가는 유망한 아티스트들이 만들어 나가는 다채로운 클래식 음악도 방 안을 함께 채워나가면서 말이다. 


삶의 끝에서 황금빛이 도는 행복으로 물들어가는 이 두 사람은 이미 자신들이 평생을 함께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20대 후반에 무대 위에서 만난 두 사람은 서로의 음악이 어우러졌을 때 이미 그들도 모르게 한 타래의 실에 묶여버렸으니까. 하지만 이별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삶의 황혼기에 다시 만나 함께 보금자리를 꾸려나간지 3년이 지난 어느 겨울, 줄리아 로테 슈테른은 암으로 인해 잘츠부르크의 한 병원의 침대에서 생을 맞이하였다. 13일을 간격으로 태어났는데 죽음도 똑같이 찾아오면 안 되는 걸까. 엘자는 전쟁 중 겪었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온몸으로 맞으며 줄리아 로테의 주검 앞에 하염없이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엘자 실러와 줄리아 로테 슈테른이 함께 잠들어 있는 묘지. ⓒ Androom, 1995-2022


엘자가 그로부터 세상을 떠난 날은 7년이 지난 1974년의 한 겨울이었다. 줄리아 로테가 떠난 이후에도 음악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 Ernst von Siemens Music Prize을 받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은 엘자 실러는 쓸쓸히 뮌헨의 한 호텔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하였다. 엘자가 마지막으로 유언을 남겼는지는 모르겠다. 항상 자신의 곁을 지켜준 줄리아 로테 슈테른을 먼저 잃은 지 7년 만에 엘자는 다시 사랑하는 사람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오늘도 잘츠부르크 시립 묘지 한 켠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함께 새겨진 묘비가 검은빛을 반짝거리며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한다. 형형색색의 꽃이 심긴 이 묘비 아래에 눈을 감고 있는 이 두 사람은 오늘도 유럽의 무대에 오르는 수많은 젊은 아티스트의 음악을 감상하며 숨겨진 원석을 예리한 두 눈으로 발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독일의 음악을 사랑한 유대인이자 한 여성을 마음에 품은 레즈비언, 엘자 실러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당신은 이 여성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나치의 음악제국소에 입당을 시도하였으며 전쟁 이후 전범국인 독일인을 품은 예술 감독으로 평가할 것인가. 아니면 원수들로 가득한 소굴에 입당할 정도로 자신의 삶과 같은 음악을 놓치지 않으며 전쟁 후 음악의 날개 아래 피해자인 유대인과 가해자인 독일인을 모두를 품은 예술 감독으로 평가할 것인가. 


하지만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 전에 '엘자 실러'라는 이 유대인의 이름은 사후에 빠른 속도로 잊히게 되었다. 이제는 50년대에서 60년대 사이에 출시된 도이치 그라모폰의 음반 속 북클릿의 한 귀퉁이나 그 시대를 이끌어나간 위대한 음악가의 자서전에서 우연히 그 이름을 접할 수 있을 뿐이다.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수많은 아티스트를 영입하여 200장이 넘는 음반을 구상한 총괄 프로듀서 엘자 실러. 혹시 책장 한편에 오래된 도이치 그라모폰과 눈이 마주친다면 오늘날 클래식 음악계를 이끌어나가는 이 음반사의 황금기를 일구어 낸 이 여성의 이름을 떠올려주었으면 한다. 음악이라는 풍요로운 색채로 인생을 그려나간 이 여성의 인생은 아직 빛이 바래기엔 너무나 아까우니까. 


엘자 실러 (1897. 10. 18 ~ 1974. 11. 27)  ⓒ Deutsche Grammophon





참고자료

LexM, Universität Hamburg

Norman Lebrecht : 'Life and Death of Classical Music'

The Androom Archives


이전 24화 VII. 전쟁의 폐허 속에 다시 한번 풍요로움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