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괄 프로듀서라는 직업을 가진 가장 이질적인 여자
가장 급격하고 역동적인 발전을 이룩한 20세기.
인류가 새로운 한 세기를 맞이할 때 12개의 음으로 이루어진 서양의 고전 음악 또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사람들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지금까지 콘서트 홀이나 극장에 직접 방문하여야만 비로소 장대한 오케스트라가 뿜어내는 음악을 온몸으로 맞이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양손에 들어오는 둥글납작한 디스크 한 장이면 집 안에서 그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음악을 두 귀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케이스에서 조심스럽게 꺼낸 LP 디스크를 턴테이블 플레터에 살포시 얹는 순간 집은 거대한 콘서트 홀이 될 준비를 마친다. 가느다란 바늘을 디스크 위에 올라가는 순간, 바늘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디스크 위를 유영하며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집 안 가득 채우게 되는 이 마법 같은 기술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놀라움과 감동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마치 통조림처럼 음악을 고스란히 잡아넣어 언제든지 다시 꺼내 들을 수 있는 LP 디스크의 유래 없는 등장으로 사람들은 오직 이 레코드판을 위한 새로운 직업군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하나의 음악회를 기획하기 위해 각종 예술가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면 이제는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새로운 분야의 전문가들이 필요하였다. 음악을 연주할 연주자와 음반을 구성할 클래식 레퍼토리를 프로그래밍하는 기획자를 더해, 이제는 녹음의 음질을 책임지는 음향 기사 및 녹음 감독, 녹음 기기를 다룰 각종 전문 기술자들이 함께하게 된 것이다. 과학과 예술이 만남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쯤에서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지금까지 나열한 이 모든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떠올려보자.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눈을 감고 전문 직종에 종사할 사람을 머릿속에서 세세히 묘사해보라고 요청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정적인 눈빛을 지닌 지적인 남성의 모습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19세기 말에 최초로 여성의 참정권이 대두된 이래 10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남성 중심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데 하물며 여성들이 참정권을 주장하기 시작한 20세기 초에는 오죽할까. 여성 혐오가 만연한 20세기, '방송', 혹은 '음향'이라는 전문 분야에서 여성 종사자를 쉽게 찾을 수 있을까? 그래서 엘자 실러 Elsa Schiller라는 여성의 삶은 우리에게 이질적인 삶으로 다가온다.
도이치 그라모폰 Deutsche Grammophon에 입사한 이래로 유럽의 음악 예술을 정점으로 이끌 유망한 아티스트의 발굴부터 한 장의 LP 디스크에 채울 다채로운 클래식 레퍼토리를 구성하는 것도 모자라, 녹음 과정을 체크하고 음반의 전체적인 방향성을 이끌어 나가는 총괄 프로듀서에 오른 이 여성은 '도이치 그라모폰'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방대한 카탈로그를 구축한 인물이었다. 당시 제2차 세계대전에 패한 전범국, 독일의 이름이 들어간 도이치 그라모폰. 그리고 그 도이치 그라모폰을 인수한 전범기업 지멘스 Siemens. 전범국인 독일의 이름이 붙은 이 레코드 사는 전쟁 이후 많은 예술가들이 이 음반사와 손잡는 것을 매우 꺼려했다고 한다. 다른 경쟁사에 비해 음질 기술에서도, 그리고 클래식 레퍼토리의 양에서도 부족함이 많았던 이 레코드 사에 영입된 엘자 실러라는 이름을 가진 이 여성은 그야말로 그들에게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전쟁 전부터 유망한 피아니스트이자 독일 베를린 내에서 수많은 음악회를 기획하며 음악가로 이루어진 인맥을 촘촘히 엮어나간 엘자 실러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음악만을 위해 나치의 음악제국소에 가입하였음에도 불구하고─음악을 빼앗기고 강제 수용소에 끌려가 운 좋게 살아남은 인물이기도 하였다.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인 이 여성의 놀라운 기획력, 촘촘한 인맥, 그리고 거침없는 추진력을 엿본 도이치 그라모폰의 경영자, 에른스트 폰 지멘스 Ernst von Siemens는 전후 RIAS 방송국에 취직하여 RIAS 오케스트라를 단숨에 독일 정상의 오케스트라로 성장시킨 이 여성에게 당연히 눈독을 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에른스트의 스카우트로 발탁된 엘자 실러는 당시 여성에게 쉽게 열리지 않는 프로듀서라는 문을 열고 그 길을 걸어 나가기 시작한다.
분명 쉽지 않은 길이었을 것이다. 아득한 과거부터 여자는 '변절되고 기형적인 남성'이라는 철학을 따르며 지금도 '여성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것만이 모든 문화의 고양시킬 수 있는 기본 조건'이라 주장하며 과거에 머무르고 있는 사회의 일원으로 발을 디딘 이 여자의 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자 실러는 그런 일은 사소한 일처럼 신경 쓰지 않은 채 자신의 본분만을 위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전범국 독일을 대표하는 음반사에서 홀로코스트의 희생자가 직접 찾아와 내미는 손은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나치와 함께 했던 아티스트들에게 다시 한번 음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안겨주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같은 피해자였던 유대인 아티스트들에게는 전쟁 중 펼치지 못한 음악을 더 큰 무대에 올리는 기회는 물론 인생의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에 대한 용서와 화합의 장을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음악의 날개 아래 모든 인류가 형제가 되는 순간이었다.
엘자 실러라는 총괄 프로듀서의 주위로 모인 아티스트는 그야말로 방대하다. 독일의 음악가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인 프랑스, 헝가리, 소비에트 연방을 넘어 바다 건너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아티스트까지, 세계 지도를 펼쳐 그가 영입한 전속 아티스트들의 출신지를 체크한다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촘촘하게 엮어지지 않을까. 이 여성이 도이치 그라모폰으로 영입한 아티스트와 함께 협업한 음반만으로도 두터운 한 권의 카탈로그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이 말인즉슨, 모든 경쟁사를 제치고 이제는 도이치 그라모폰이 세계 정상의 클래식 레코드 사로 우뚝 세워졌다는 의미인 것이다. 남다른 추진력으로 도이치 그라모폰의 황금기를 이끈 이 여성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당시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가장 이질적인 이야기로 다가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도이치 그라모폰을 세계적인 클래식 음반사의 정상으로 일으켜 세운 이 여성의 삶은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이 여성 또한 사후 너무나도 빠르게 잊혀 전설로 남기는커녕 이제는 하나의 이야기도 찾기 힘들 정도로 조용히 세상에서 지워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여성의 이름은 오직 예술의 정점에 다다른 수많은 연주자들이 남긴 전설적인 명반 속 북클릿 한편에 조그마하게 기재되어 그 존재감을 확인할 수밖에 없다. 과거부터 많은 여성 음악가들이 사후 그 명성이 빠르게 잊히는 것처럼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안된 이 여성의 명성도 빠르게 잊혀 여타 다른 여성 음악가처럼 자료를 검색하면 그 결과가 1페이지도 출력되지 않는 존재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도이치 그라모폰의 경쟁사였던 데카 레코드 Decca Records의 총괄 프로듀서였던 존 컬쇼 John Culshaw나 EMI의 총괄 프로듀서였던 워터 레그 Walter Legge의 족적에 비해 이 여성의 족적은 왜 이리 빨리 잊힐 수밖에 없었던 걸까. 앞서 두 프로듀서만큼 클래식의 대중화에 힘쓰며 도이치 그라모폰의 녹음 스튜디오를 총괄하던 그 여성은 어디로 사라진 건가. 사랑하는 자신의 연인과 함께 잘츠부르크 시립 묘지 한 켠에 누워 조용히 세상에서 지워져가고 있는 이 여성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 여성이 걸은 삶의 족적을 더듬어 글로 남기는 일밖에 없기에 가슴이 먹먹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