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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네 Jul 14. 2022

VII. 전쟁의 폐허 속에
다시 한번 풍요로움을

엘자 실러 | 제7편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독일에서 활동한 음악가들은 나치가 집권하던 시절, 음악을 포기하지 못하기에 제국음악소에 가입을 한 전적이 있다. 종전 후 서로 이념이 다른 양쪽 진영이 집권하는 이 시기에 나치가 세운 기관에 가입한 전적이 있는 독일 음악가들은 활동에 제약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번 독일 음악의 부흥을 꿈꾸는 에른스트 폰 지멘스에게 이 점은 큰 걸림돌로 작용했다. 그래서 에른스트 폰 지멘스는 유대인이면서도 나치의 제국음악소에 가입한 전적이 있는 엘자 실러를 눈여겨볼 수밖에 없었다. 전범국가인 독일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이념을 통합시키고 화합의 이미지로 변신할 수 있는 훌륭한 가교 역할을 해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에른스트의 그런 은밀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엘자는 과거를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따져봤을 때 이 음반사가 지닌 가능성을 예측했지 않았을까. 그리하여 자신이 그리던 RIAS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준 지휘자 페렌츠 프리차이와 도이치 그라모폰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여 음반 계약을 체결하게 도와주었다. 이윽고 다음 해인 1949년 9월, 페렌츠 프리차이의 이름을 달고 베를린에서 가장 오래된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LP 레코드,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제5번을 발매하였다. 이 음반으로 인해 지금까지 침체되고 있었던 도이치 그라모폰 게젤샤프트는 새로운 강자로 부상할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이 부상을 이루게 해 준 프로듀서. 더불어 새롭게 태어날 도이치 그라모폰은 이 모든 것을 이룩할 수 있는 유대인 프로듀서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엘자 실러가 어떻게 도이치 그라모폰 게젤샤프트에 입사하였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전쟁 전 수많은 음악회를 기획해 수많은 무명 음악가를 발굴한 이 여성이라면, 그리고 전쟁 후 체계가 잡히지 않은 라디오 오케스트라를 유럽 정상으로 올린 이 여성이라면 도이치 그라모폰이라는 레코드계의 원석을 먼저 예리한 감각으로 포착했을지도 모른다. 엘자 실러가 언제 도이치 그라모폰의 경영자인 에른스트 폰 지멘스를 만나 자신의 운명을 바꿀 결정을 내렸는지에 대한 사실도 정확하게 남아있지 않다. 아마 독일의 음악을 사랑하는 에른스트가 저명한 음악가들을 사시사철 초대한 베를린의 한 멘션에 엘자도 초대되었다고 예상할 뿐이다. 어쨌든 엘자 실러는 도이치 그라모폰의 입사 제안에 결심하게 되었다. 비록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렸지만 독일 음악의 부흥이라는 같은 목표를 가진 그 음반사의 경영자와 함께 하기로 말이다. 이리하여 엘자 실러는 1952년, 도이치 그라모폰 게젤샤프트의 총괄 프로듀서가 되어 이 음반사를 세계 정상으로 이끌기로 결정하였다. 


총괄 프로듀서라는 파격적인 대우로 도이치 그라모폰에 입성한 엘자 실러는 즉시 이 음반사가 처한 현실을 살펴보기 시작하였다. 첫 번째, 지멘스에 인수된 이후 좋은 싫든 전쟁 속에서 유대인을 착취하여 많은 돈을 번 이 회사의 자금력은 따로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문제는 이 점 때문에 많은 이들이 등을 돌릴 것이라는 점. 두 번째, 다른 레코드 사에 비해 빈약한 아티스트와 레퍼토리를 소유한다는 점. 마지막으로 나치의 치하 아래 사치는 허용되지 않은 독일의 사회 분위기로 각 거실마다 축음기가 갖추어진 가정이 많지 않아 다른 레코드 사에 비해 녹음의 질이 떨어진다는 점. 


엘자 실러는 모든 상황을 분석한 이후 가장 먼저 한 일을 바로 선택하게 되었다. 첫 번째 문제점은 '엘자 실러'라는 자신의 존재로 해결될 수 있었다. 마지막 문제점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그래서 엘자는 두 번째 문제점부터 해결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RIAS 오케스트라에서 살펴봤듯이 도이치 그라모폰 또한 회사를 이끌어준 유망한 아티스트들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엘자는 즉시 자신의 특기, 즉 숨겨져 있는 독일의 원석을 발굴하기 시작하였다. 아티스트를 발굴하는 일은 쉬운 일이었다. 나치의 산하에 들어간 전적으로 인해 전쟁이 끝난 지금, 많은 제약이 걸린 음악가들에게 유대인인 자신이 손을 내민다면 그들은 음악을 다시 한번 손에 쥘 수 있는 명분이 생기는 것을 당연한 일이었기에. 또한 전범기업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인 자신이 손을 내민다면 유대인들 또한 다시 한번 고려해볼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에. 




엘자는 도이치 그라모폰에 입사한 이후 RIAS 오케스트라를 이끈 페렌츠 프리차이를 비롯해 그와 함께한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Dietrich Fischer-Dieskau를 영입하여 즉시 다양한 레퍼토리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 강한 추진력을 가진 여성은 종전 이후 얼마 되지 않은 1949년에 결성된 한 4중주단을 영입하기 위해 그들 앞으로 직접 찾아가기도 하였다. 나치의 산하 아래에 놓였던 시절,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강제수용소에 끌려가 이어진 인연으로 탄생한 아마데우스 4중주단 Amadeus Quartet은 누구보다도 독일인들을 증오하였지만 엘자 실러를 만나며 마음을 바꿔 도이치 그라모폰의 아티스트로 활동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엘자 실러를 이렇게 기억한다. 


20세기 최고의 4중주단으로 손꼽히는 아마데우스 4중주단. 


엘자 실러는 매우 약싹 빠른 유대인이었다. 
독일인들을 위해 녹음하는 건 좀 불편한 일이지만, 지기*의 아버지는 다하우**에 거주 중이었다. 
내가 반대할 사람이 누구인가?

- 마틴 로베트 Martin Lovett. 아마데우스 4중주단의 첼리스트

*지기 : 아마데우스 4중주단의 리더, 지그문트 발터 지기 니셀 Siegmund Walter "Sigi" Nissel 을 가리킴
**다하우: 독일 뮌헨 근교에 있는 작은 도시


도이치 그라모폰이라는 레코드 사 안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맡은 엘자 실러의 아티스트 발굴은 계속되었다. 루마니아계 유대인 피아니스트이자 다발성 경화증으로 온몸이 뒤틀리고 척추측만증으로 몸이 엉망진창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음악을 놓지 않은 천재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 Clara Haskil, 레코드 녹음만큼은 선호하지 않았지만 엘자와 함께한 소비에트 연방의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Sviatoslav Richter, 페렌츠 프리차이의 후계자로 불린 젊은 유대인 지휘자 로린 마젤 Lorin Maazel까지 이 지면에 다 채우기도 힘든 수많은 아티스트가 엘자와 함께하며, 도이치 그라모폰의 레퍼토리는 어느 레코드사와 견주지 못할 만큼 방대한 카탈로그를 형성해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쌓아 올린 거대한 레퍼토리의 탑을 구축한 엘자는 드디어 이 레코드사가 정상을 향할 수 있는 위한 마지막 조건을 갖출 때가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전쟁이 끝난 지 어언 10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패전 후 빠른 회복을 보이기 시작하는 독일의 각 가정에 드디어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오디오 시스템이 구축되기 시작하였다. 세계의 가장 저명한 레코드 사인 EMI와 데카 Decca가 자랑하는 놀라운 고품질의 음질을, 도이치 그라모폰도 추구할 수 있는 시장 여건을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이 레코드사는 다른 레코드 사보다 조금 늦게 1957년부터 모노에서 스테레오 사운드로 교체하는 변화를 만들어나가기 시작하였다. 엘자는 수많은 경력을 통해 쌓은 연륜이 머릿속에서 속삭이고 있었다. 모노 시대는 이제 과거가 될 것이고 스테레오 시대가 현재가 될 것이라고. 앞으로 레코드를 지배할 스테레오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새로운 아이콘이 나타나 대중들의 환호를 이끌어내야 할 것을 말이다. 


엘자는 새롭게 다가 올 스테레오 시대를 대표할 아티스트 후보를 물색하기 시작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실된 클래식 레퍼토리를 다시 한번 체계적으로 수집한 도이치 그라모폰. 특히 방대한 길이의 오케스트라 레퍼토리를 구축해 간 도이치 그라모폰의 이미지에 맞는 인물을. 서양 고전 음악의 역사에 등장한 광범위한 시기의 음악을 소화해낼 수 있는 인물을. 그리고 선진적인 녹음 기술에 호의적인 인물을. 엘자는 이윽고 이 모든 후보들 중 한 사람으로 좁혀질 수 있었다. 나치 치하 당시, 이미 도이치 그라모폰 게젤샤프트와 한 번 계약하여 음반을 출시하였지만 종전인 1945년 이후부터 활동을 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은 아티스트를. 바로 두 번이나 나치에 가입을 시도하려는 전적이 있었던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Herbert von Karajan을. 


엘자는 과거로부터 몰아쳐오는 심연의 고통을 애써 잊으며 스테레오 시대로 새롭게 태어날 도이치 그라모폰의 아이콘으로 그를 선택하였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오늘날 우리는 위대한 마에스트로, 디지털 레코딩의 선구적인 아티스트, 클래식 대중화에 앞장선 지휘자, 그리고 도이치 그라모폰의 노란 라벨을 먼저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만큼 도이치 그라모폰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그는 당시 나치에 두 번이나 입당하려고 노력한 행적으로 지금까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라는 걸 알았을까. 당시 나치의 치하 아래 음악을 하려면 나치에 입당해야 하는 것은 필수 불가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일례로 유대인이었던 엘자 실러와 줄리아 로테 슈테른도 음악 활동을 위해 나치를 선택하였으니까. 당시 수많은 음악가들이 나치에 어쩔 수 없이 입당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지만 유독 카라얀이 지금까지 나치의 신봉자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이 지속된 것은 아마 어떻게든 나치의 일원이 되기 위해 두 번이나 노력한 사건 때문일 것이다. 


카라얀은 음악 경력을 위해 그토록 원하던 나치에 두 번의 시도만에 입당하였다. 그 결과 최연소로 독일 아헨 Aachen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어 아헨의 극장에서 오페라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특권을 누렸다. 또한 베를린 필하모닉으로 화려하게 데뷔하며 베를린 국립 오페라단과 나치가 사랑하는 작곡가들인 베토벤의 오페라인 피델리오 Fidelio, Op.72와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 WWV 90을 지휘하며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이 시기에 도이치 그라모폰 게젤샤프트는 그와 계약하여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Die Zauberflöte, K.620를 녹음하여 화려한 음반 데뷔를 알리기도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엘자는 이중 천장 아래에 조용히 숨죽이며 살아갈 때도, 수많은 음악가들이 전쟁이 닿지 않은 인근 국가와 대서양을 넘어 미국으로 피신할 때도 카라얀의 화려한 경력을 계속되었다. 카라얀의 말에 따르면 이미 나치 지도부의 호의를 잃었다고는 하지만 그는 아돌프 히틀러에게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Staatskapelle Berlin의 음악감독을 수여받아 로마를 순회하였으며 베를린에서 각종 콘서트를 지휘하며 자신의 음악 경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하지만 나치의 영광은 영원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나치의 오만한 만행들은 하나 둘 정의의 심판대에 올랐고 나치의 가호 아래 음악을 누렸던 카라얀 또한 심판대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종전 이후 카라얀 또한 피해 갈 수 없었던 탈나치화를 위한 과정은 지극히 단순했다. 카라얀은 '충분히 고통을 겪었으며' 오직 음악을 위해 살아왔다는 주장에 따라 서면 증거도 없이 석방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석방되어 음악 활동을 재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세간에서는 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 같다. 카라얀은 1946년에 ─비공식적으로는 이미 익명으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참가하였다고 한다.─공식적으로 비엔나에서 첫 콘서트를 가졌으나 소비에트 점령군은 이 지휘자에게 음악 활동 금지 조치를 내려 공식적인 음악 활동을 재개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버렸다. 카라얀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음악을 할 수 없는 가장 어두운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카라얀의 음악은 멈추지 못했다. 이듬해인 1947년에 카라얀의 음악 활동 금지가 해제된 후 그는 즉시 어떠한 오케스트라도 매끄러운 도자기처럼 흠 하나 없이 완벽한 음악을 만들어내는 자신의 특기를 살려 베를린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 비엔나 국립오페라의 예술 감독이 되어 왕성한 활동을 이어나가며 국제적인 경력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나갔던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세계 최고의 마에스트로라고 찬사를 받는 그는 자신의 과거에 벗어날 수 없었다. 1955년 미국 순회에서는 나치 당원이었던 이 지휘자 한 명 때문에 디트로이트의 공연이 금지되며 전면 취소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필라델피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인 유진 오르먼디 Eugene Ormandy는 카라얀이 내민 악수를 거절한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으며 연주회를 위해 뉴욕의 카네기 홀을 방문했을 땐 그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피켓을 들며 나치 당원이었던 그를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 어느 지휘자보다도 논란이 많은 그 지휘자.

하지만 그 어떤 지휘자보다도 음악을 가장 아름답게 빚어내는 지휘자. 


준비는 모두 마쳤다. 1959년, 그의 예술성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엘자 실러는 새로운 바람을 불고 올 논란의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을 영입하기 위한 준비를 모두 마쳤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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