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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네 Jul 07. 2022

VI. 전쟁 이후 새로운 모습을 다가온 음악의 삶

엘자 실러 | 제6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패전을 맞이한 황량한 독일은 두 갈래로 나뉘게 되었다. 한 갈래는 엘자 실러를 강제수용소에서 벗어나게 도와준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성향을 보이는 소비에트 연방의 손으로 다시 태어난 사회주의의 독일로, 한 갈래는 자유가 보장된 자본주의의 체제를 지향하는 미국 및 서방국가 연합의 손에 다시 태어난 민주주의의 독일로 갈라지게 된 것이다. 특히 독일의 중심인 베를린은 소비에트 연방이 지배하는 동쪽과 미국이 지배하는 서쪽으로 갈라져 결국 이념이 다른 두 연방의 냉전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치열한 무대로 변모하게 되었다. 폐허가 된 독일 위에서 부딪히는 이 두 나라는 수많은 분야에서 미묘한 신경전이 발생하였는데 독일인들에게 정보를 전달해하는 중심축인 라디오 방송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1957년 하늘에서 찍은 베를린의 브로드캐스팅 하우스 ©Hübner+Oehmig


베를린의 베스텐트 지구에는 불과 십여 년 전, 나치가 지배했던 광란의 시절에 제국 선전을 위해 건립한 브로드캐스팅 하우스 Haus des Rundfunks 건물이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며 우뚝 자리 잡고 있다. 2개의 면이 곡선을 이루는 삼각형의 이 건물은 제국 선전을 포함한 모든 라디오 방송 제작이 여기서 이루어지게 되며 훗날 독일 최초로 TV 방송이 제공되는, 그야말로 독일 언론의 중심 공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방송뿐만 아니라 음질이 중요한 음악 송출을 위한 스테레오 사운드의 발전까지 기인하게 되며 다양한 분야에서 큰 발전을 가져다준 이 방송국은 독일의 패전 이후 새로운 뜨거운 감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연유는 이러하였다. 베를린의 베스텐트 지구는 이름 그대로 베를린의 서쪽에 위치한 지역이다. 이 말은 결국, 서쪽을 차지한 연합국 중 영국이 차지한 지역이니 브로드캐스팅 하우스 또한 연합국 아래 운영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다양한 변수에 흔들리는 법이다. 독일 패전 이후 소비에트 연방은 빠르게 나치가 선전하였던 이 거대한 방송국을 차지하고 '베를린 라디오 Berliner Rundfunk'라는 방송국을 설립하여 앞으로 갈라지게 될 베를린 동쪽 지역과 동독을 위한 방송을 송출하며 자신들의 정치 선전 도구로 사용하게 되었다. 영국을 비롯한 연합군은 당연히 가만히 보고 있지는 않았다. 현재 연합국이 점령한 땅에서 어떻게 소비에트 연방이 방송국을 독차지할 수 있단 말인가. 방송국은 그야말로 새로운 냉전의 격전지로 부상하게 되었다.


미국은 즉시 소비에트 연방을 향해 연합국이 차지한 지역에 세워진 브로드캐스팅 하우스는 자신들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있으니 연합국을 위한 방송 시간을 할애하길 요청하였다. 하지만 이미 나치의 사례를 통해 언론의 힘을 깨달은 소비에트 연방은 쉽게 양보할리 없었다. 독일 이후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한 미국이 과연 계속 소비에트 연방을 향해 거듭되는 부탁을 건네었을까? 그럴 리 없었다. 미국은 더 이상 베를린 라디오 방송국을 향해 허리를 굽히는 것이 아닌 새로운 방법을 선택하였다. 그 결과, 미국 정보 통제국 US Information Control Division의 감독 하에 1946년 2월, 연합국이 차지한 서독을 위한 새로운 방송국이 설립되었다. 새로운 방송국의 이름은 '미국 부문의 라디오 Rundfunk im amerikanischen Sektor'. 줄여서 RIAS로 더 많이 불리게 될 이 방송국은 새롭고 혁신적인 프로그램들로 큰 인기를 끌게 되어 새로운 언론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독일의 패전 이후 누구보다도 소중한 줄리아 로테 슈테른과 함께 엘자 실러는 1933년 이전의 황금기를 다시 한번 재현하고 있었다. 테레지엔슈타트 강제수용소에서 돌아온 엘자는 즉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나치의 정권 아래 음악 경력이 끊긴 지크프리트 보리스 Siegfried Borris, 러시아계의 첼리스트인 아르투르 트뢰스터 Arthur Tröster, 점령된 프랑스에서 나치 선전 콘서트를 열었던 독일의 스트럽 4중주단 Strub-Quartett의 비올리스트로 활동한 헤르만 허쉬펠더 Hermann Hirschfelder 등 다양한 계층의 음악가들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모인 음악가들은 엘자 실러의 지휘 아래 '베토벤 *마티네'를 시작으로 '브람스 마티네', '크리스마스 마티네', 혹은 '브람스 이브닝'과 같은 다양한 콘서트를 개최하며 패전 이후 황량한 베를린에 활기를 불어넣기 시작하였다. 콘서트의 개최 횟수가 거듭날수록 베를린의 유명 음악가들은 콘서트의 프로그래밍의 중심에 있는 엘자 실러와의 촘촘한 인맥을 엮어나가기 시작하며 그가 개최한 콘서트에 함께 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가곡과 아리아, 그리고 독주와 실내악이 어우러진 이 콘서트의 중심 가수였던 줄리아 로테 슈테른은 점점 자신의 한계에 다다른 것을 예감하였다. 줄리아 로테는 전쟁 당시 위태위태한 엘자를 위한 피나는 헌신, 그리고 세월이 흐를수록 함께 앗아간 체력은 더 이상 1933년 이전의 반짝반짝 빛나던 자신의 상태가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이를 느끼는 것은 줄리아 로테뿐만 아니었다. 엘자는 자신의 뮤즈의 지친 모습을 바라보며 지금 한창 무르익어가는 콘서트 계획에 큰 고민에 빠졌다. 엘자의 주위에는 수많은 음악 동료가 있지만 그 중심에는 줄리아 로테가 있어야 했다. 그 무엇보다 자신의 심장을 뛰게 만들며 듣는 순간 세상이 멈춰버리는 듯한 그 목소리를 어떻게든 붙잡아두고 싶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알고 있었다. 음악이란 구속하는 순간 빛이 사라지며 한 순간에 죽어버리는 존재가 아니던가. 아니, 더 가까이 살펴본다면 나치로부터 억압을 받았던 순간 자신의 인생이 무채색으로 변하는 과정을 겪지 않았던가. 


그래서 엘자는 줄리아 로테의 뜻대로 콘서트를 중단하기로 결정하였다. 줄리아 로테는 노래를 노래하든, 혹은 노래하지 않든 이미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줄리아 로테와 함께 만들어나갈 음악 경력을 잃어버리게 된 엘자는 자신의 음악 경력을 조금 바꾸기로 하였다. 콘서트의 프로그램을 기획해 큰 호응을 이끌어 내며 많은 음악가들과의 네트워크를 구축한 자신의 능력을 더 큰 세상에서 활용해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1947년 겨울, 자신이 기획한 콘서트에 여러 번 함께한 지크프리트 보리스 Siegfried Borris를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작곡가로 활동하면서 한창 다양한 매체의 발달로 점점 대중화되는 음악에 큰 관심을 가진 이 음악학자가 몸담고 있는 RIAS 라디오 방송국으로 함께 따르기로 결심한 것이다.


*마티네 Matinee : 음악, 영화, 미술 등 주간 상영을 가리키는 말.




1946년에 개국한 RIAS 방송국은 개국하는 즉시 라디오 방송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다채로운 음악을 연주할 오케스트라를 설립하였다. RIAS 심포니 오케스트라 RIAS Symphonie-Orchester라고 불리는 이 오케스트라는 연합군 아래 놓인 독일인들을 위한 다채로운 음악을 연주하면서 활동을 펼쳐나갔지만 이들에게는 이들을 이끌어 줄 음악감독, 즉 상임 지휘자가 없었다. 상임 지휘자가 없이 객원 지휘자들을 따라 그들을 대표할 고유한 개성을 끌어내지 못한 채 녹음실 안에서 상업적으로 찍어내는 음악을 엘자 실러가 놓칠 리 없었다. 현재 지크프리트 보리스와 함께 음악 부서장으로 일하는 엘자 실러는 음악가의 눈으로 방송국 내에서 포착하지 못한 문제들을 하나하나 고쳐나가며 RIAS 라디오를 명실상부한 음악의 중심지로 위상을 높이는 중인데 그중 가장 중요한 오케스트라의 체계가 잡혀있지 않다는 것은 엘자에게 큰 고민으로 다가왔다. 이들을 이끌어 줄 첫 번째 음악감독. 항상 첫 번째는 중요하다. 초대 지휘자는 앞으로 이 오케스트라가 가질 고유한 청사진을 제작하는 큰 임무를 맡기에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함을 아는 엘자는 조심스럽게 후보들을 물색해나가기 시작하였다. 


엘자 실러(좌)는 RIAS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위해 당시 새롭게 떠오른 젊은 지휘자, 페렌츠 프리차이(우)에게 상임 지휘자의 자리를 제안한다.


엘자 실러는 고민한 끝에 많은 상임 지휘자 후보 중 한 젊은 지휘자를 주목하게 된다. 자신과 같은 오스트리아-헝가리 태생의 유대인이며 15살에 지휘자로 데뷔하여 나치의 휘하 아래에서 살아남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고트프리트 폰 아이넴 Gottfried von Einem의 '당통의 죽음 Dantons Tod'을 초연한 계기로 국제적인 명성을 쌓아 올린 30대 지휘자, 페렌츠 프리차이 Ferenc Fricsay에게 말이다. 엘자는 RIAS 심포닉 오케스트라를 이끌 초대 상임 지휘자로 그를 선점하고 즉시 행동으로 나섰다. 그리하여 페렌츠 프리차이는 엘자의 권유에 RIAS 심포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로 임명되어 이 오케스트라의 위대한 행보를 위한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프리차이는 단원들을 기진맥진하게 만들며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이상적인 소리와 어긋나는 부분들을 끈질기게 연습시켰다. 그러나 특유의 강렬하고 엄격한 작업 중 생생하고 상상력이 풍부하여 마치 은유적인 동화 같은 해석을, 어법이 어긋난 유창한 독일어로 그가 말하는 순간 공간은 쾌활함으로 가득 채워져 분위기는 순식간에 밝아진다. 

-엘자 실러 


엘자의 예감은 적중했다. 아름다움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이 젊은 상임 지휘자는 바로 엄격한 훈련으로 오케스트라를 이끌기 시작하였다. 이 지휘자는 방송에서 꼭 필요한 연주 이 외에도 악단들을 이끌고 외부의 콘서트를 개최하며 이들의 실력 향상과 서로 간의 하모니를 위해 열정적으로 움직였다. 또한 독일 제국 시절 금지된 소위 '타락한 음악'들을 부활시키기 위해 애썼으며 서양 고전음악의 정전뿐만 아니라 20세기 현대 음악의 부흥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음악이 가져다주는 아름다움 앞에서 뭔가가 하나라도 어긋나면 이 초대 상임 지휘자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향해 커다란 분노를 표출시키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까다로운 지휘자의 요구를 맞추는 어려움을 이겨내고 녹음실 안에서 연주를 하는 순간 음악은 투명하고 명확한 해석과 서양 고전음악이 가져다주는 형식의 아름다움, 그리고 생동감 넘치는 선율로 변하여 모든 이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하였다. 엘자의 뜻대로 RIAS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독일을 넘어 세계로 뻗어나갈 만큼 최고의 실력을 가진 오케스트라로 성공한 것이다. 


한창 성장하는 오케스트라를 바라보며 방송국에서 음악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엘자 실러에게 그날이 찾아왔다. 자신의 풍요로운 색채로 채워간 자기의 삶이 정착할 곳을 알게 되는 그날이. RIAS 오케스트라가 설립된 이후 최고의 주가를 자랑하며 한창 왕성한 활동을 이어간 1948년의 어느날, 한 음반사가 젊은 상임 지휘자, 페렌츠 프리차이의 연주를 레코드에 담아내고 싶은 의사를 밝히며 RIAS 방송국의 음악 부서를 찾아오게 된다. 엘자는 그 음반사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아니 유대인이라면 알 수밖에 없는 음반사였다. 1941년, 새롭게 노란색의 튤립 왕관으로 새롭게 태어난 음반사. 수많은 유대인들을 독가스실로 몰아넣은 음악 애호가, 에른스트 폰 지멘스 Ernst von Siemens가 독일 음악의 부흥을 다시 한번 꿈꾸며 새롭게 탄생시킨 음반사. 바로 도이치 그라모폰 게젤샤프트 Deutsche Grammophon Gesellschaft. 그 이름이 바로 엘자 앞에 선 음반사의 이름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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