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자 실러 | 제5편
엘자의 단 하나밖에 안 남은 행복을 한순간에 짓밟은 히틀러의 앞잡이 게슈타포는 제국음악소에 즉시 돈만 밝히는 더럽고 불결한 유대인, 엘자 실러가 무면허로 음악 교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발하였다. 언제부터 성인들을 가르치는데 교직 면허가 필요했단 말인가! 다른 이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안되지만 엘자에게는 커다란 문제가 되는 이 연유를 제국음악소를 향해 아무리 하소연해도 그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엘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저들은 아리아인이고 우리들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이렇게 박해받을 수 있단 말인가. 스스로 독일의 사회에 당당한 일원이라 생각하고 오직 음악만을 위해 바라봤다. 오직 음악만 허락해준다면 다른 것은 필요 없는 이 여성에게 나치는 얼마만큼 더 이 여성을 심연 속으로 질식시키려고 하는 걸까.
제국음악소는 마지막 한 떨기의 희망을 붙잡기 위해 몇 개월 동안 절절하게 호소하는 이 여성의 주장을 단 한 톨도 귀에 담지 않고 즉시 기각시켰다. 역시 유대인은 근본부터 글러먹은 족속이었다. 감히 제국음악소의 명령을 고의로 위반하다니. 엘자의 오만방자한 반항에 제국음악소는 1000 제국 마르크라는 벌금을 부과하여 이 여성에게 순종이라는 덕목을 가르치기로 하였다. 하지만 음악이 곧 삶인 이 여성이 과연 이 판결을 받아들였을까. 모두가 예상했겠지만 엘자는 절대로 수긍할 수 없었다. 엘자는 즉시 당시 저명한 변호사였던 프라이헤르 폰 뤽딩하우젠 박사 Dr. Freiherr von Lüdinghausen를 통해 벌금에 대한 항소를 시작하였으나 나치는 아리아인을 오염시킨 이 유대인의 말을 들어줄 리가 없었다. 결국 엘자의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돌아온 건 엘자의 유일한 보물들이었던 벡슈타인 그랜드 피아노와 노이페르트 하프시코드가 압수되어 텅 비어버린 이중 천장 밑 자신의 공허한 방뿐이었다. 그렇게 나치는 엘자의 삶, 음악을 송두리째 빼앗아버렸다.
자신은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음악을 사랑하는 것이 잘못한 일일까. 아니면 단지 유대인이라는 핏줄 때문인 걸까. 그것도 아니면 남성보다 여성을 소중하게 여기는 자신의 성향 때문일까. 자신의 음악 경력을 도려내고 악기를 압수해 자신의 몸에서 억지로 음악을 적출시킨 독일은 이제 아무것도 안 남은 자신에게 무엇을 또 빼앗아갈까.
긴 싸움이었다. 1943년, 행복으로 가득했어야 했던 새해에 터져버린 나치와의 본격적인 싸움은 긴 시간을 거쳐 11월이 되어 끝이 나게 되었다. 물론 이 긴 싸움의 승자는 다시 한번 자신의 삶, 음악을 되찾기 위해 재항소한 엘자 실러가 아닌, 같은 해 11월 4일 갑작스럽게 쳐들어 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 속 침묵을 받아들인 엘자를 체포해 간 게슈타포였다.
베를린 미테 지구에 '관용의 골목'이라 불리는 그로세 함부르거 스트라세 Große Hamburger Straße라는 이름의 거리가 있다. 유대교와 개신교, 그리고 천주교의 건물이 옹기종기 모여있어 관용의 골목이라 불리는 이 400m 남짓한 이 거리는 서로 이념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 아끼며 도우며 살아간 명망 있는 거리였다고 한다. 이 거리에 관용과 선의를 위해 세워진 학교와 양로원은 20세기 초, 나치가 점령하게 되며 많은 유대인들을 이송하기 위한 임시 수용소로 전락하였고 관용의 골목은 '관용과 죽음의 길'로 변모하게 되었다.
11월 4일, 게슈타포의 연행으로 끌려온 엘자는 그로세 함부르거 스트라세 임시 수용소에 이송되어 최종 선고를 기다리게 되었다. 엘자가 배정받은 방에는 이미 이전에 이송된 수많은 동포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에 서려있는 공포와 희망을 엘자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은 알고 있었다. 그로세 함부르거 스트라세 임시 수용소에 이송된 모든 유대인들은 테레지엔슈타트나 아우슈비츠에 세워진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어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엘자를 포함하여 한 방에 함께 있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정해진 운명을 애써 외면한 채 침묵 속에서 자신들의 인생을 곱씹으며 최종 선고를 기다릴 뿐이었다. 며칠이 지났을까.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의 침묵을 깨고 임시수용소의 관리인이 엘자 실러를 지목하며 따라오라고 명령하였다. 줄리아 로테 슈테른이 엘자 실러를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함께 전해주며 말이다.
엘자는 한시름 놓았다. 지금까지 자신을 돌봐주고 지원해준 줄리아 로테가 혹시 자신 때문에 불이익을 받는 것이 아닌지, 혹은 지금은 슈테른 가문의 힘으로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아리아인들이 누리는 삶을 자신 때문에 한순간에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나 이렇게 아무 탈도 없이 자신을 면회하러 와줬다는 것이 그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줄리아 로테는 모를 것이다. 아직 강제로 이송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건만 마치 한 달은 흘러간 듯 그 어느 누구보다도 아끼는 이 여성이 걱정 가득한 눈으로 엘자를 바라봤을 때 엘자는 가슴 한구석에서 몰려오는 안도와 함께 깊은 슬픔이 밀려와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오늘이 줄리아 로테 슈테른을 바라보는 마지막 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도달한 엘자는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이 진심으로 아낀 이 여성의 모습을 하나하나 가슴에 새겨 넣고 있었다. 만약 그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의 수용소로 끌려간다고 해도 지금 자신 앞에 앉아있는 이 사랑스러운 나의 뮤즈를 떠올리면 고통 또한 사그라들 것이라.
언제 마지막 날이 될지 모른 채 서로의 안부와 행운을 빌어준 엘자 실러는 면회장을 떠나는 줄리아 로테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자신의 두 눈에 그 모습을 새긴 채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방으로 돌아온 엘자는 면회를 다녀온 자신을 호기심으로 바라보는 자신의 동포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정작 자신을 반기는 건 텅 빈 방뿐이었다. 텅 빈 방. 항상 음악으로 가득 찬 방을 사랑한 엘자에게 공허함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임시수용소에 이송된 이후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엘자는 순식간에 자신의 몸이 알 수 없는 공포에 지배당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즉시 연유를 파악하기 위해 주변의 사람들에게 정황을 물어본 엘자는 이윽고 자신의 몸을 지배한 알 수 없는 공포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엘자가 오늘이 마지막 만남일지도 모를 줄리아 로테 슈테른과의 소중한 면회를 이어나갈 때, 자신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동료들은 상부의 명령에 따라 건물 밖으로 끌려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아무 이유 없이 전원 사살 명령 하나로 자신의 동료들은 한날한시 세상을 떠나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엘자는 온몸이 삐죽 소름이 돋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벌레 죽이듯이 죽일 수 있는 것인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한 순간에 사라진 자신의 동포들을 하나라도 더 기억에 새겨 넣지 못했는지, 라는 여러 생각과 함께 말이다. 한 편으로는 안도를 느꼈다. 엘자 그도 만약 그 시각, 자신의 동포들과 함께 침묵의 방에서 하염없이 발령을 기다리고 있었다면 그도 겨울바람에 휩쓸리는 낙엽처럼 한순간에 생을 마감하지 않았을까. 사랑하는 줄리아 로테. 엘자 실러에게 있어서 음악의 뮤즈일 뿐만 아니라 엘자 실러라는 사람의 구원자였던 것이다. 임시수용소에서 한 번 죽음을 맞이할 뻔한 엘자 실러는 목숨을 건진 채 11월 15일, 103번째 수송차에 몸을 싣고 새로운 수용소로 향하게 되었다. 그가 예상했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가 아닌, 테레지엔슈타트 강제수용소로.
테레지엔슈타트 강제수용소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비해 사뭇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는 유대인 말살이 목적이었다면, 테레지엔슈타트 강제수용소는 아리아인들 사이에 속한 유대인들을 분리해 한 곳으로 모집한 '모범적인 유대인 정착지'에 가까운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나치 또한 그러한 점을 외국인들에게 소개하며 자신들은 사회에서 척결해야 할 불결한 유대인들에게 적절한 관용을 베푸는 이타적인 집단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고 한다. 그 말인즉슨, 다른 강제수용소보다 비교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강제수용소와 다르게 비교적 자유로웠던 이 수용소는 문화에서도 자유로웠는데 음악, 미술, 스포츠, 종교, 철학과 같은 다양한 분야에 2,000여 명의 포로들을 투입시켜 문화 행사를 진행해 나갔다고 한다. 물론 유대인을 위해서가 아닌, 나치의 관대함을 선전하는 도구로 사용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이유야 어쨌든 이제는 더 이상 음악이라는 고귀한 학문에 직접 다가갈 수 없을 거라 예상한 엘자 실러는 뜻밖의 선전 행사 덕분에 다시 한번 피아노를 손에 잡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비록 외부적으로는 유대인 자치 정부의 지휘 하에 운영된다고 하더라도 나치가 운영하는 강제수용소였다. '노동이 그대를 자유케 하리라 Arbeit Macht Frei'라는 구호 아래 다윗의 별을 단 유대인들은 고된 노동을 버텨야 했었고 추운 밤에는 불 하나 없는 열악한 수감소 안에서 추위와 싸우며 죽음과 싸워 이겨냈어야 했다. 추위와 싸우는 것은 그나마 괜찮은 축이었다. 한 번 전염병이 수감소 안을 돌기 시작하며 수감자들은 하루라도 더 삶을 연명해나가기 위해 모진 병과 싸워나가며 전의를 다지고는 하였다. 한 때 베를린의 음악계를 휘어잡은 엘자 실러라고 해도 이러한 환경을 피해 갈 순 없었다. 낮에는 운모를 채집하기 위해서, 밤에는 칠흑 같은 수감소 안에서 자신이 누구보다도 소중하게 여기는 이와 함께 다시 한번 음악의 여정을 떠날 수 있는 날이 찾아오기만을 바라며 줄리아 로테가 몰래 보내주는 음식 꾸러미를 통해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음악! 엘자는 나치가 억지로 적출한 음악을 강제수용소라는 심연의 바닥에 다다라서야 다시 부분적으로 이식을 받는 뜻밖의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 줄리아 로테가 정기적으로 보내주는 음식 꾸러미 덕분에 어떻게든 살아남아 음악을 연주할 기회를 더욱 많이 만들어주었다. 어쨌든 여기는 단지 소모품에 불과한 포로 예술가들로 이루어져 있으니 말이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할수록 더 많은 연주의 기회를 누릴 수 있음을 알게 된 엘자는 힘든 나날로 인해 몸은 지치지만 삶을 포기할 이유가 없었다. 밤마다 열리는 테레지엔슈타트 정기 연주회를 통해 엘자 실러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타나'들을, 그리고 프란츠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연주하며 진정 자유를 느꼈다. 무채색이었던 자신의 삶에 다시 한번 채색을 더하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연주회의 기회가 많아질수록 음악은 엘자의 삶의 의지를 불태우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음악이 나를 자유케 하리니 어떻게든 살아남으리라.
음악이 만들어 낸 삶의 집념은 실로 위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이 여성이 소속된 집단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은 바로 엘자 실러, 그 한 사람밖에 없었으니까 말이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엘자 실러는 전쟁에서 해방된 1945년 여름, 베를린으로 돌아가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한 자신의 뮤즈, 줄리아 로테 슈테른과 재회하며 다시 한번 자유를 되찾게 되었다. 독일의 만행으로 심연의 밑바닥까지 가라앉은 이 여성은 이제 겨울이 지나고 살얼음이 녹아 생명이 움트기 시작하는 지상을 향한 부상을 이루기 위해 폐허가 돼버린 황량한 베를린의 시가지를 바라보며 입술에 가벼운 호선을 그리며 미소를 지었다. 강제수용소에서 주문처럼 끊임없이 외었던 그 문구를 떠올리며.
음악이 나를 자유케 하리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