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네 Jun 16. 2022

III. 나치의 통제에도 포기 못하는 것, 바로 음악

엘자 실러 | 제3편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시간의 학문, 음악으로 하나가 된 슈테른 가족. 

엘자 실러의 마음을 흔든 이 사랑스러운 여성, 줄리아 로테가 속한 슈테른 가문을 살펴보면 이 여성이 왜 자연스럽게 음악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는지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브루노 발터 Bruno Walter, 에드윈 피셔 Edwin Fischer, 클라우디오 아라우 Claudio Arrau. 서양 고전 음악의 황금기를 이끌어간 이 아티스트들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들이 같은 학교 출신, 즉 동문이 바로 그 공통점이다. 줄리아 로테 스턴의 할아버지는 오늘날 베를린 예술 대학으로 운영되는 슈테른 음악원 Stern Conservatory의 설립자인 줄리어스 슈테른 Julius Stern이었다. 독일의 중심, 베를린에서 독일 음악계를 이끌어나갈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유대인 작곡가이자 지휘자, 그리고 음악 교육가였던 것이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음악적 재능은 그의 아들한테 전해지지는 못했다. 혹은 음악적 재능은 출중했어도 고통스러운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바라보며 다른 진로를 모색했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줄리아 로테의 아버지인 리차드 슈테른 Richard Stern은 그 인생의 갈림길에서 악보로 가득한 음악 대신 글자로 가득한 법률을 선택하였다. 변호사 리차드 슈테른은 음악과는 동떨어졌지만 사회에 필요한 길로 차곡차곡 계단을 밟고 나갔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슈테른 가문이 서약한 음악은 슈테른 가문의 일원인 그의 삶조차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이윽고 법률이 필수적으로 필요한 회사 경영에도 큰 재능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음악이라는 학문에 모든 재능을 바치는 슈테른 가문에 일조하게 된다. 당시 베를린에 위치하여 점점 국제적인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한 자일러 피아노 Seiler Piano가 제작되는 공장을 경영하게 된 리차드 슈테른은 폴란드의 어느 한 유서 깊은 도시에서 탄생한 자일러 피아노를 독일의 저명한 음악원과 음악 축제의 무대에 올리며 피아노 사업에 열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피아노를 판매할 때 함께 연계해서 판매할 수 있는 악보를 출판하기 위해 새로운 음악 출판사를 설립하게 된 리차드는 승승장구하며 슈테른 가문의 사명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이루어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나날이 바쁜 나날을 지내며 사업에 열중한 변호사이자 경영자, 그리고 음악출판사장인 리차드 슈테른. 그 수많은 일들을 처리하며 다른 곳에 눈을 돌리지 못했던 그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사랑의 손길이 어느덧 그에게 다가온지도 모른 채 그 손길을 피할 여력도 없이 무참히 정복당하게 되었다. 어느 날 자신 앞에 등장한 한 성악 교사에게 마음을 송두리째 뺏겨 인생의 새로운 막이 펼쳐진 그는 사랑의 결실로 맺어져 자신의 품에 안긴 딸을 바라보며 눈물로 가득 찬 미소를 선사하였다. 




줄리아 로테 슈테른 | 그를 홍보하는 광고 전단지 ⓒ Nachlass Julia-Lotte Stern


베를린의 피아노 제작 공장과 음악 출판사를 운영하는 아버지 리차드 슈테른과 노래 교사이자 합창단의 음악감독인 어머니 안나 에밀리 안토니에 슈테른 Anna Emilie Antonie Stern의 첫째 딸이자 부드럽고 온화한 목소리를 지녀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길을 따라가게 된 사랑스러운 줄리아 로테 슈테른은 다방면으로 예술적 재능을 가진 여성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와 이모까지 음악을 사랑하는 슈테른 가문에 속하며 평소 음악을 자주 접할 수 있었던 줄리아 로테는 유럽을 휩쓴 제1차 세계대전의 막바지가 보이는 16살부터 슈테른 가문의 보금자리였던 베를린에서 자신이 지닌 천부적인 재능이었던 노래와 함께 피아노, 그리고 음악 이론과 음악사까지 자신이 배울 수 있는 모든 음악적 지식들을 개인 레슨을 통해 키워나갔다고 한다. 이 사랑스러운 아이는 음악을 공부하기에도 버거웠을 건데 자신이 사랑한 음악의 친척인 문학에도 놀라운 재능을 보이며 문학과의 사랑도 키워나갔다. 유년 시절부터 시를 좋아했던 이 여성은 다양한 시를 썼으며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시들은 훗날 '내 영혼의 거울 Spiegel meiner Seele'이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였다고 전해진다. 


줄리아 로테 슈테른은 자신이 유년시절부터 건축해 쌓아 올린 문학적 감각을 노래로 옮겨 부를 수 있는 가수였다. 엘자의 음악적 본능이 말해주었다. 이 여성의 노래는 다른 가수들과는 다른 색다른 호소력이 있다는 것을. 줄리아 로테 또한 자신만의 해석으로 선보이는 노래를 다채로운 색채로 채워주는 이 피아노 반주에 황홀한 기쁨을 얻었다. 마치 자기의 입에서 나오는 노래와 피아노가 한 몸인 듯 한치의 오차도 없이 서로의 음악을 풍요롭게 채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이 피아니스트와 함께라면 무엇이든 다 이룰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엘자 실러와 줄리아 로테 슈테른은 첫 번째 만남 이후부터 서로의 부족함을 음악으로 채워주는 음악 동료로 평생을 함께하게 된다. 




엘자 실러의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추진력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피폐해진 독일 사회 속에서 큰 빛을 발하였다. 당시 마르크가 휴지 조각으로 변해버린 대인플레이션의 강타로 정신이 혼미해졌지만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서서히 회복하고 있었던 독일 사회에서 이 유대인 여성은 자신의 뮤즈와 함께 베를린에 오를 수 있는 모든 소규모 무대에 다 오르기 시작하였다. 닥치는 대로 모든 소규모 콘서트홀에 올라 자신의 이름을 알린 이 피아니스트와 알토 가수는 점점 그들을 찾는 규모가 커져 어느새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이름에서 유래된 베토벤 홀 Beethovenhalle, 많은 독일의 낭만주의 음악가들이 거쳐간 징아카데미 Singakademie, 피아노 제작사로 유명한 그로트리안 슈타인베크홀 Grotrian-Steinweghalle 까지 점령하게 되며 청중들을 아름다운 음악의 세계로 인도하였다. 엘자가 자신의 뮤즈와 함께 무대에 올린 성악 레퍼토리들도 그의 이름처럼 풍요로운 색채를 발하였다. 프란츠 슈베르트, 로베르트 슈만, 요하네스 브람스와 같은 1세기 전 작곡가들의 소박하고 정직한 음악뿐만 아니라 당시 서양 음악사를 새롭게 써나간 졸탄 코다이 Zoltán Kodály,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Richard Strauss, 막스 폰 실링스 Max von Schillings까지 새로운 음악까지 수용하여 청중들에게 소개하는 통역가의 의무를 철저히 수행해나갔다고 한다. 이 놀라운 통역가들은 이윽고 베를린 너머 북쪽의 네덜란드와 동쪽의 헝가리까지 뻗어나가 현대음악의 새로운 아름다움을 그들에게 통역해주었다. 


이들이 함께 한 시간이 어느덧 1년을 넘어 2년, 그리고 차곡차곡 쌓여 많은 해가 넘어가며 이들의 우정은 어느 누구보다 깊게 영글어가고 있었다. 슈테른 가문에서 배출한 신인 알토 가수는 해를 넘어가며 음악적 경험을 쌓아 올린 노련한 베테랑 가수로 성장하였고 엘자의 피아노 연주 실력 또한 무르익어가며 베를린 음악 사회 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하였다. 앞으로의 미래가 없을듯한 독일 속에서 이 두 명의 유대인 여성은 무대 위에서뿐만 아니라 무대 아래에서도 서로를 의지하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음악적 지식을 학생들과 공유하기 좋아한 엘자는 줄리아 로테 또한 자신의 지식을 학생들에게 공유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김을 알게 되며 큰 기쁨을 느꼈다. 음악에 모든 것을 바친 슈테른 가문의 일원답게 사립 성악원의 선생으로 활동 중인 줄리아 로테는 자신의 음악 세계의 반쪽과 같은 엘자와 함께 다양한 커리큘럼을 구상하기 시작하였다. 엘자가 평소 정기적으로 진행했던 피아노 레슨, 그리고 실내악 수업을 활용한 다양한 커리큘럼은 어느 순간 줄리아 로테와 함께 합쳐져 풍성한 음악적 지식으로 후학을 양성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길러낸 후학들과 함께 진행한 정기적인 합동 콘서트를 준비하며 이 두 사람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이들의 이야기가 이대로 행복을 맞이하면 좋겠지만 당시 전쟁의 패배 이후 다양한 이데올로기가 난무하는 독일 사회는 이들의 행복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





전쟁 이후 패배의 기운이 감도는 독일. 끊임없는 폭동과 반란. 그리고 지불할 능력이 없었던 전쟁배상금. 대인플레이션으로 하루아침에 휴지 조각으로 변해 돈 구실조차 못한 마르크 다발. 그리고 대공황과 무능한 정부. 독일의 국민들은 자신들의 구세주를 기다렸다. 누가 미래도 없는 이 독일을 구원해줄 수 있는가. 그 순간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많은 실업자와 기업가, 그리고 꿈도 희망도 없는 청년들 앞에 펼쳐진 달콤하고 부드러운 케이크가 눈앞에 던져졌다. 독일은 위대한 국가요 다시 한번 부강해질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며 유럽에서 가장 부강했던 이 나라를 갉아먹은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을 척결하겠다는 나치의 젊은 수장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 반유대주의를 내세우며 독일의 부강을 약속한 이 궤변가는 1933년, 독일의 수상이 되며 독일의 문화를 찬란하게 빛내주는 음악에도 그 손을 뻗어나가기 시작하였다. 


음악으로 사회를 지배할 수 있는가. 유년 시절부터 그림을 그리며 바그너와 그의 오페라를 신봉한 그는 당연히 그 질문에 긍정으로 답했을 것이라. 전쟁으로 독일의 부흥을 다시 한번 꿈꾸는 이 남자는 1933년 1월, 독일의 수상이 되어 일당독재체제를 확립한 이후 예부터 서양 고전음악을 이끌어 나간 선진적인 독일의 음악에 자신들만의 이데올로기를 입혀 정치적 도구로 이용할 작업을 개시하기 시작하였다. 예술을 사랑하는 히틀러인 만큼 이 일은 확실하고 정확하게 진행하여야 했다. 누구에게 이 일을 적임 해야 할까 고민한 그는 이윽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이미 독일의 언론을 장악한 자신의 절친에게 일임하기로 하였다. 바로 자신이 이전에 통솔자로 활동하였던 제국 선전부 Reichspropagandaleitung의 차기 통솔자이자 이미 화려한 말솜씨로 언론을 장악한 나치의 두뇌부, 요제프 괴벨스 Joseph Goebbels에게. 


부처는 독일의 지적 동원을 수행할 임무가 있다. 국방부가 국방의 임무를 수행하듯 내면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영적 동원은 사람들을 물질적으로, 군사적으로 구금하는 것보다 더 필수적인 영역일 수 있다. 

-요제프 괴벨스


주도면밀하고 냉철한 사람, 얼음처럼 차가웠고 악마적이었던 이 남자는 이미 자신의 우상의 의도를 이미 파악하고 그가 수상으로 임명된 직후 위대한 나치, 위대한 독일을 위해 지향하는 길로 향하는 새로운 정부 기관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었다. 대중계몽 선전 국가부 Reichsministerium für Volksaufklärung und Propaganda. 집회, 대중 건전, 청소년, 인종, 방송, 언론, 영화, 미술, 음악, 연극까지 문화에 관한 모든 부서로 가득한 기관. 유럽에서 가장 고귀한 독일인들을 승리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 이들의 지식과 영혼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 언론뿐만 아니라 문화와 지식까지 통제하기 위한 기관. 하지만 대중계몽 선전 국가부에서 광범위한 예술을 다루기에는 그의 마음에 채워지지 않았던 것일까. 괴벨스는 자신이 몸과 마음을 바쳐 따르는 히틀러를 위해 그가 수상으로 임명된 해의 가을, 모든 문화생활의 이데올로기를 더욱 세밀하게 합치시키기 위한 전문 기관, 제국 문화 회의소 Reichskulturkammer를 따로 설립하여 더욱 세밀하고 보다 강력한 통제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음악을 전문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제국 음악소 Reichsmusikkammer'.  대중계몽 선전 국가부에서 괴벨스는 단지 음악을 검열했을 뿐이었지만, 제국 문화 회의소 산하에 설립된 제국음악소에서는 확실하게 음악을 나치의 선동 도구로 확실하게 변화시키고 음악가들을 통제시키는 기관으로 성장시키기 시작하였다. 


독일 음악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이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우리 찬란한 독일인들의 가장 위대한 예언적 인물이다. 우리는 몇 세기 전부터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루트비히 판 베토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그리고 안톤 브루크너와 칼 오르프와 같은 찬란한 음악가들로 가득한 문화의 정점에 서있는 민족이다. 그러니 구스타프 말러,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 그리고 아놀드 쇤베르크와 같은 유대인들이 만들어내는 퇴폐적이고 천박한 음악은 듣지도, 쳐다보지도 말길.




1933년 9월에 설립된 제국음악소로 인해 독일에서 활동하는 음악가들은 큰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독일의 음악을 이끌어가던 이들이 과연 몰랐을까. 겉으로는 수위한 독일을 이끌어 갈 전문 음악인을 양성하겠다는 제국음악소가 사실은 가장 존귀해야 할 음악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통제하고 권력의 도구로 사용할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이 음악가들은 자신의 삶을 바치기로 서약한 음악을 버리고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저 끔찍한 정부 기관의 등을 돌리는 순간 더 이상 음악 활동을 펼치지 못하게 된 음악가들은 많은 고민의 늪으로 던져지게 되었다. 하물며 유대인인 엘자는 어떠했겠는가. 저 치들이 끔찍하게 혐오하는 유대인인 엘자 실러. 하지만 자신은 그들이 위대하고 찬란하다고 선전하는 그 독일의 일원이지 않은가. 자신은 그들이 외치는 고귀한 독일의 음악계를 이끌어나가는 독일의 일원이지 않는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음악을 포기하기엔 자신의 삶, 자신의 신념이 포기할리가 없었다. 그리고 줄리아 로테. 인생에서 만나기 힘든 음악의 뮤즈와 함께 만들어 나가는 꿀송이보다 달콤한 음악 세계를 단지 저들 때문에 잃고 싶지 않았다. 줄리아 로테도 같은 마음일까?


1933년, 유대인 엘자 실러는 자신의 음악 동료, 줄리아 로테 슈테른과 함께 '비 아리아인'으로 등록되어 제국음악소의 일원이 되었다. 이렇게 엘자 실러와 줄리아 로테 슈테른이 포함된 1,024명의 '비 아리아인' 회원들은 약 170,000명의 독일인 음악가 회원들과 함께 제국음악소라는 배에 몸을 싣고 끝이 보이지 않는 불안한 긴 항해가 시작되었다. 


<계속>

이전 19화 II. 풍요로운 색채로 물들어가는 삶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