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자 실러 | 제1편
나는 그대들을 말살하려고 한 집단에 가입한 사람이었소.
테이블에 한 여성과 한 남성이 마주 보고 앉아있었다. 남성의 입에서 나온 그 끔찍한 말에도 여성은 아무 미동도 없이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마치 태풍이 불어오기 전과 같은 불온한 기운으로 가득 찬 격동적인 시기에 열성으로 나치에 두 번이나 입당하였으며, 전쟁이 끝난 지금도 '나치 당원'이라는 과오에서 벗어나지 못한 오스트리아의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Herbert von Karajan 은 앞으로 자신과 함께 활동할 프로듀서에게 이 말을 던진 채 그의 눈을 응시하였다. 봇물처럼 터져나오는 분노. 절대로 타협할 수 없을 듯한 적개심. 질식할듯한 고통. 홀로코스트에서 생존한 이 유대인 여성의 눈에서 자신을 향해 증오스러운 감정들을 뒤섞어 발산하고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큰 숭고한 무언가가 그 증오들을 억누르고 있음을 카라얀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바로 음악이었다. 이 여성은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친 음악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뒤로한 채 그를 지긋이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성은 아무 말없이 서류를 내밀었다.
주변의 가까운 음반점에 발걸음을 향한 적이 있는가. 우리 주위를 가득 채운 음악을 한 장의 CD에 정성스럽게 담아 선반에 차곡차곡 진열된 그 공간에 서면 마치 도서관에 온 것처럼 차분한 마음으로 이윽고 그 수많은 이야기들이 담긴 그 음반들을 한 장 한 장 귀 기울이게 된다. 가요, 팝, 재즈 등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모든 음악 장르들이 모인 이 공간에서 흔히 서양 고전음악을 가리키는 '클래식'도 당연히 한 코너를 차지하고 있다. 그 클래식 코너에 찾아가게 되면 눈에 가장 먼저 띄어 클래식 코너에 온 것을 실감 나게 만들어줄 수 있는 레이블이 있다. 감각적인 클래식 연주자들의 사진 상단에 노란색 액자 모양의 라벨과 23개의 튤립 왕관이 새겨져 있는 노란색 레이블.
바로 세계적인 클래식 레이블, 도이치 그라모폰 Deutsche Grammophon의 음반들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클래식 레이블을 떠올려보라고 누군가가 질문한다면 우리는 수많은 클래식 레이블 중에 도이치 그라모폰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오늘날에는 살아있는 클래식의 역사로 불리는 이 레이블의 역사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알아가려면 약 120여 년 전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에밀 베를리너 Emile Berliner.
독일에서 태어나 앞으로 그의 손에서 발전할 레코딩 기술의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 발명가의 처음 직업은 단순한 회계사였을 뿐이었다. 1870년, 프랑스의 선전포고로 발생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그는 낮에는 생계를 위해 병을 세척하거나 병을 닦는 등 손에 닿는 모든 허드렛일을 하며 밤에는 틈틈이 물리학 공부를 전념하였다고 한다. 정든 독일을 떠나 찾은 미지의 땅에서, 그는 자신의 새로운 길을 악착같이 개척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물리학에 전념한 그는 어느덧 전화기와 축음기와 같은, 자신의 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오디오 기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일종의 마이크인 전화 송신기를 발명하게 되었으나 비슷한 발명품을 발표한 토마스 에디슨 Thomas Edison과 특허권을 두고 오랜 법정 투쟁을 펼치게 되었고 법원은 결국 1901년, 에디슨에게 손을 들어주며 베를리너는 권리를 뺏기게 되었다.
법정 공방이 너무 길어져서 그랬을까. 베를리너는 전화기에서 눈을 돌려 다른 발명품을 고안하기 시작하였다. 바로 전화 송신기로 긴 싸움을 펼치고 있는 에디슨이 발명한 실린더 기반의 축음기로 눈을 돌린 것이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조그마한 원통 실린더에 담아낼 수 있다니! 에디슨이 당시 발명한 놀라운 발명품, 축음기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축음기와 그 모양이 제법 달랐다. 음악을 담을 디스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납작한 원형 모양이 아닌 입체적인 원통 모양의 실린더의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 실린더에 음악을 녹음해서 저장하면, 수직으로 세워진 톤암을 앞으로 끌어당겨 바늘을 얹어서 소리를 송출시켰다. 인류 역사 최초로 소리를 담아낼 수 있었던 이 놀라운 말하는 박스. 하지만 이 박스를 작동시키기 위한 원통 디스크를 만들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난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원통형의 실린더는 일정한 속도를 유지할 수 있어 균일한 소리를 송출시킬 수 있는 이점이 있지만 녹음 기술에서는 너무나도 까다로워 대량 생산이 불가능했다. 또한 얇은 은박에 녹음을 새기다 보니 일정 시간이 지나면 침압으로 인해 새겨진 소리의 길이 망가지기 일쑤였다. 이 놀라운 기계는 세상에 위대한 혁신을 이루었지만 그 공정이 정교하다 보니 그 공정비용만 해도 어마어마하였으며 이러한 이유로 일반인들이 사용했을 리 만무하고 단지 과학 박람회의 한편에 소개되었을 뿐이다.
베를리너는 분명 이 기계가 본래부터 음악을 사랑하는 인류에게 큰 재산이 될 거라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이 놀라운 기계를 보급할 수 있을까. 베를리너는 실린더 디스크에 초점을 맞추었다. 중력에 의해 소리가 왜곡되고 보관하는데 많은 공간을 차지하며 대량 생산을 하기에는 그 기술이 정교하여 제작비까지 올라가는 이 디스크를 어떻게 혁신적으로 바꿀 수 있을까. 에밀 베를리너는 3차원의 입체적인 원통 디스크를 2차원의 납작한 새로운 모양의 디스크로 변환시키기로 하였다. 바로 원통 디스크를 절단해서 등장하는 납작한 원형 모양으로 만들어 홈을 파기로 결심한 것이다. 측면 절단 레코드 Lateral-cut discs라고 불리는 새로운 모양의 납작한 원형 디스크, 바로 이 디스크가 어느덧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SP, LP, CD 등 모든 소리 기록 매체의 기초가 되었고 그 중심에는 에밀 베를리너가 존재했던 것이다. 지름 5인치의 크기를 지닌 이 디스크는 비록 녹음의 질은 실린더 디스크에 비해 떨어졌지만 녹음의 복사 및 제작이 실린더 디스크에 비해 훨씬 간단한 공정을 거쳤으며 보관 시에도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 데다 훨씬 견고하여 잘 깨지지 않는 많은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이 많은 장점을 가진 디스크는 대량 생산이 시작되었고 에밀 베를리너는 이 새로운 녹음 매체를 그라모폰 Gramophone이라고 명명하며 인류는 레코딩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에밀 베를리너는 자신이 가진 이 혁신적인 기술을 안고 바로 레코드 사업에 뛰어들었다. 자신의 이름과 놀라운 발명품의 이름을 각각 넣어 베를리너 그라모폰 컴퍼니 Berliner Grammophone Company를 설립한 그는 이윽고 자신의 모국인 독일에도 지사를 세우게 세우게 된다. 이 회사가 바로 도이치 그라모폰 게젤샤프트 Deutsche Grammophon Gesellschaft, 바로 오늘날의 도이치 그라모폰의 탄생이 여기서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1898년에 설립된 이 유서 있는 회사는 클래식 레코딩의 역사를 대표하기까지 너무나도 많은 난관에 부딪혔다. 최초로 클래식 음반의 카탈로그를 제작하며 차곡차곡 자신들만의 아카이브를 구축해가며 성장하던 이 회사는 전 유럽을 휩쓴 제1차 세계대전부터 점점 힘이 부치는 경제적 상황과 불안한 정세 속에서 경영을 이어나가야 했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 회사는 그 시대의 황금 같은 클래식 레퍼토리를 묵묵하게 녹음하며 클래식의 역사를 새겨 나갔을 뿐이다. 이제는 좀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윽고 찾아온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결국 본사가 폭격을 당해버렸다. 더 이상 음반을 녹음하고 생산할 수 없는 이들은 결국 회사를 접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발이 닿지 않는 심연의 바다에 빠져도 살 수 있는 길은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1941년, 오늘날 독일의 첨단 산업의 선구자 중 한 회사인 지멘스사의 전신인 지멘스-할스케 Siemens-Halske 사는 폭격으로 안타깝게 사라질 위기에 처한 이 음반 회사에 구원의 손을 내밀었다. 지멘스의 소유가 된 도이치 그라모폰은 폐허가 된 독일에서 새롭게 일어서기 시작했다. 전쟁 이후 패망의 길을 걷는 독일을 다시 한번 부활시키기로 마음먹은 지멘스 사의 창업자인 에른스트 폰 지멘스 Ernst von Siemens는 이 레코드 회사를 통해 다시 한번 독일을 문화 강국으로 일으키기로 마음먹었다.
에른스트 폰 지멘스는 폭격으로 엉망이 된 독일의 오래된 교회들을 돌아다니며 남아있는 음악들을 수집하기 시작한 동시에 패망으로 힘을 잃은 독일인들에게 힘을 주는 밝은 대중음악을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클래식 아티스트들이 연주하는 클래식 음악을 수집하기 시작하기 시작하였다. 에른스트 폰 지멘스는 도이치 그라모폰을 이 세 분류의 음악 수집을 토대로 3개의 회사로 분리시켰다. 수집한 오래된 고음악 레퍼토리는 은색을 상징으로 하는 '아르히브 Archiv' 레이블로, 밝은 대중음악은 빨간색을 상징으로 하는 '폴리도르 Polydor' 레이블,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날을 살아가는 클래식 아티스트들이 만들어 나가는 클래식의 역사를 담아내는 레이블은 노란색을 상징으로 하는 '도이치 그라모폰'으로 말이다.
하지만 어느 세계적으로 저명한 아티스트가 도이치 그라모폰으로 영입되려고 하겠는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주범, 독일의 이름이 새겨진 저 레이블에 말이다. 긴축을 지향한 독일의 정세로 거실에 커다란 턴테이블이 놓여 있는 것만으로도 반사회적인 사람으로 취급되어 그동안 음향 기술면에서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는데 하물며 전범 국가의 이름이 박힌 레이블이라니! 거기에다가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이 사람은 제2차 세계대전에 그 최악이라고 불린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를 건설하고 유대인들을 착취하고 죽음으로 몰고 간 중심인물이 아니었던가. 설립 이래 가장 큰 난항에 빠진 도이치 그라모폰은 한 여성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한다. 한 때 나치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추방당했으며, 친구를 구하기 위해 게슈타포에 자수해 수용소에 끌려갔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여성, 엘자 쉴러 Elsa Schiller에게 말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