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네 Jun 09. 2022

II. 풍요로운 색채로 물들어가는 삶

엘자 실러 | 제2편


엘자 실러 Elsa Schiller.


이 여성만큼 오늘날 다양한 견해를 가지는 인물이 또 있을까. 어떤 이는 이 여성이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홀로코스트를 자행한 독일의 손을 잡고 그들이 저지른 모든 전쟁 범죄를 아름다운 음악으로 포장하여 결국 망각의 늪으로 몰래 던져 은폐시켰다는 평을 내렸다. 어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음악이라는 고차원적인 예술 안에 서로 다른 이념에 물들어 폭력과 공포의 결과를 맞이하여 더 이상 이전의 평화를 누릴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인류를 화해시켜 다시 한번 화합과 평화를 가져왔다는 평을 내리는 이도 있다. 당신은 어느 쪽에 평가를 내릴 것인가.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이 여성의 놀라운 음악적 안목과 거대한 야망으로 서서히 세상에서 사라져 간 한 레코드 사를 오늘날 명실상부한 클래식 음악계의 황제로 군림할 수 있게 만든 단단한 초석을 다져주었다는 것이다. 이 논란의 음악 프로듀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항상 논쟁과 전쟁이 끓이지 않았던 유럽 대륙에 모처럼 평화가 깃든 벨 에포크 시대에서 말이다. 


 



오스트리아 남쪽으로 26km를 향하면 로마 시대부터 유명한 휴양 도시가 등장한다. 바덴 Baden이라고 불리는 이 지역은 이름을 이루는 핵심 단어인 'Bad', 즉 '목욕'이라는 뜻을 지닌 것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유황온천으로 유명하여 예부터 각국에서 황홀한 휴가를 즐기기 위해 많은 관광객들로 활기찬 지역이었다.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서 '유럽의 중요한 온천 도시 Bedeutende Kurstädte Europas'이라는 이름으로 등록된 11개의 온천 도시 중 하나를 차지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바덴에서 지그문트 실러 Sigmund Schiller는 모처럼 찾아온 평화로운 세상에 녹아들어 오늘도 북적거리는 도시 한 편에 위치한 자신의 가게에 앉아있었다. 아름다운 수공예품과 각종 패션 잡화가 단정하게 진열돼 있는 가게 안으로 맑은 햇살이 유리를 통과해 아름답게 아롱거리는 그 빛깔을 관찰하던 지그문트는 문득 평화를 깨뜨리는 거친 문소리에 깜짝 놀라 입구를 바라보았다. 


아이가 나올 것 같아요. 


거친 문소리와 함께 놀라운 소식을 들고 온 이웃을 따라 지그문트는 자신이 지금까지 실아오면서 겪었던 모든 만감이 교차하며 헐레벌떡 그를 따라 아내에게로 향하였다. 파란 하늘이 아름다운 가을이 한창 무르익어가는 1897년 10월 18일, 바덴에서 수공예품을 판매하는 지그문트 실러와 이다 실러 Ida Schiller 사이에서 사랑스러운 딸이 세상에 나와 우렁차게 울며 이 부부에게 안기게 되었다. 세상을 살며 겪어본 가장 큰 기쁨으로 자신들도 모르게 양 뺨에 타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훔친 이 부부는 자신들의 세상에 빛을 비춰준 사랑스러운 딸에게 '풍요'의 뜻을 지닌 '엘자'라는 이름을 붙여 딸의 축복을 빌어주었다. 풍요로움을 뜻하는 '엘자 Elsa'와 '색채'라는 뜻을 가진 '실러 Schiller'.  '엘자 실러'라는 이름으로. 이름 그대로 이들의 딸의 미래는 풍요로운 색채로 가득하게 된다.


엘자는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여느 아기와 다름없이 하루가 다르게 건강하게 성장하였다. 며칠 후 아기가 눈을 뜨고 조그마한 손과 발을 끊임없이 꼼지락거리며, 따뜻한 음성을 지닌 어머니의 목소리에 방긋거리며 이윽고 첫걸음을 떼면서 나날이 부모의 얼굴에 함박 미소를 안겨주었다. 딸이 안겨주는 축복 같은 하루하루를 즐기던 이 가족은 엘자가 세상에 호기심을 가지며 끊임없이 자신들에게 집요하게 달라붙어 세상 모든 것을 향한 질문을 시작할 즈음 자신들을 따뜻하게 보듬어 준 바덴을 떠나 부다페스트라는 새로운 보금자리로 향하였다. 그리고 부다페스트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즈음 자신의 사랑스러운 딸의 숙명을 위한 첫 계단을 오르게 되었다. 가족들이 부다페스트로 옮겼던 그때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저명한 음악 교육자로 활동한 에르노 포더 Ernő Fodor가 자신의 사명으로 설립한 에르노 포더 음악 학교 Musikschule von Ernö Fodor에 이들의 딸을 입학시켜 피아노 건반에 손가락을 올리게 해 준 것이다. 이 가족들이 평소 음악을 사랑했는지 혹은 아마추어 연주자인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혹은 엘자가 음악에 관심이 있었는지 혹은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부부에게 자랑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날, 엘자 실러는 자신의 조막손으로 누른 건반의 감촉과 그 거대한 악기가 전율하며 내뿜는 감미로운 소리에 매료되어 그 소리를 자신의 이정표로 삼기 시작하였다.




엘자 실러는 에른스트 폰 도흐나니 (좌)에게서 피아노를, 레오 베이네르 (우)에게서 실내악과 음악이론을 배워나갔다.


엘자는 음악을 향한 자신의 헌신을 키워나갔다. 에르노 포더 음악학교를 졸업한 직후 엘자는 자신이 천부적인 음악 재능을 심화적으로 성장시켜줄 최고의 스승들에게 향하였다. 바로 1875년, 프란츠 리스트가 설립한 이래로 헝가리에서 운영되는 가장 권위가 넘치는 음악대학, 부다페스트 국립 음대로 말이다. 현재는 프란츠 리스트 음악원으로 불리는 이 대학교에 엘자는 입학을 하자마자 헝가리를 이끄는 위대한 음악 교수들은 이 여성의 재능에 감탄하며 그의 주위로 다가오기 시작하였다. 엘자가 다니는 학교를 설립한 위대한 피아노의 거장, 프란츠 리스트의 계보를 따르는 헝가리의 피아니스트 에른스트 폰 도흐나니 Ernst von Dohnányi는 이 여성에게 아무도 모르는 피아노의 은밀한 음악적 언어를, 20세기 전반부의 중요한 헝가리 음악 교육자로 손꼽히는 레오 베이네르 Leo Weiner는 자신의 소중한 제자에게 악기의 조화를 도모하는 실내악과 음악의 모든 열쇠가 담겨있는 음악 이론을 체계적으로 전수하였다.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음악에 대한 집념을 드러낸 엘자는 1921년 6월, 헝가리의 민속 음악과 독일의 전통 낭만주의 클래식의 융합을 이끈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음악 교육자인 예노 후바이 Jenő Hubay가 주재한 헝가리 왕국 국가 감사 위원회에서 피아노, 피아노 교육, 음악 이론 및 음악 미학 분야에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점수를 수여하며 자랑스러운 졸업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엘자는 여기서 만족할 수 없었다. 뛰어난 점수로 졸업을 하고 음악학 교사의 칭호를 수여받았지만 그 자신은 더욱 높은 음악의 이상을 갈망하였다. 그래서 이 여성은 졸업을 하자마자 독일의 드레스덴으로 향하였다. 프란츠 리스트의 제자이자 '리스트의 합법적인 후계자'로 인정받은 에밀 폰 자우어 Emil von Sauer가 있는 바로 그곳으로. 그 누구보다도 다정한 매력을 발산한 자우어는 자신을 제자로 받아달라고 찾아온 이 여성의 눈에 담긴 열성적인 음악적 야망을 바로 포착하였다. 자신의 삶은 곧 음악이라는 단호한 결심을 읽은 자우어는 엘자를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여 자신이 지니고 있는 기술을 그에게 전수하였다. 1년이라는 짧은 배움 속에서 엘자는 그에게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그대로 흡수한 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아닌 독일 베를린에 정착하여 자신이 저명한 스승들에게서 흡수한 지식들을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나누기 시작하였다. 그와 동시에 각종 사교계에서는 건반 위의 신사, 에밀 폰 자우어가 받아들인 한 제자에 대한 호기심을 숨기지 못한 채 그를 각종 콘서트에 초대하여 이 여성에 대한 진가를 파헤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엘자는 베를린에서 자신의 삶과 같은 음악을 청중들과 제자들에게 드러내며 서서히 그들의 일원이 돼가고 있었던 때였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 여성의 세상은 음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교계에 갓 데뷔한 한 알토 가수가 엘자에게 자신의 노래에 반주를 맡아주었으면 하는 의뢰를 받아 콘서트가 열리기 전 그 가수를 만나 한 번 호흡을 맞춰볼 계획이었다. 먼저 조그마한 음악 홀에 도착한 엘자는 갓 데뷔한 알토 가수를 기다리면서 굳어있는 손가락을 건반에 올려 풀어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때였다. 그가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에 맞춰 반투명하고 온화한 노래가 호흡을 맞추며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어 홀을 울리기 시작하였다. 엘자는 연주를 멈추지 않은 채 고개를 들어 그 노래가 흘러나오는 원천을 관찰하기 시작하였다. 마치 깃펜으로 그려놓은 듯한 얇고 세련된 눈썹. 그 눈썹을 따라 그인 짙은 쌍꺼풀 아래 속 음악의 황홀함에 빠진 눈동자. 보드라운 콧등과 조그마한 입에서 나오는 순박하고 정직한 독일어의 노래 가사들. 자신에게 찾아와 의뢰를 요청할 당시 그 알토 가수는 독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오늘 함께 음악의 합을 맞추는 순간 자신이 알았던 그 첫인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저 아름다운 음악의 여신이 존재할 뿐이었다. 말 그대로 한 꺼풀의 음악이 자신의 눈을 덮어 그 알토 가수와 주위의 세상을 휘젓은 듯한 감각이었다. 


그렇게 27살의 엘자 실러는 음악으로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애쓴 채 동갑내기 알토 가수, 줄리아 로테 슈테른 Julia-Lotte Stern을 만나 인생의 제2막을 맞이하게 된다. 


<계속>

이전 18화 I. 클래식의 역사를 담은 레이블, 도이치 그라모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