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에서의 우리는
일 집 하는 것이
생활의 전부였고,
시드니에서 무언가를
해본 기억이란 없다.
찰리는 곧 있으면 한국으로
떠나야 했기에 돈을 모으는 것에
집중했고,
나도 마지막으로 불태워서,
돈을 모아 워홀이 끝나기 2주전
로드트립을 가기로 마음 먹었다.
우리는 한달 치 월급
받기만을 기다렸다.
보통 호주에서의 잡은
일주일 또는 이주일에 한 번씩
페이를 해주지만,
한인잡의 경우
한국 처럼 한 달에 한번씩
페이를 해준다.
이미 시드니에
떨어졌을 때 부터 돈이란
정말 일도 없었기에
월급날만을 기다렸다.
찰리는 글래드스톤에서
이미 제로가 되었고 ,
내가 가지고 있던 돈도.
거진 200불 가량 밖에 남지 않았다 .
먹고 싶은건 먹지 못하고,
가고 싶은데는 꿈도 꾸지못하는
그런 생활,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우울하진 않았다.
새벽에 남들이 잠든 시각에
청소기와 대걸레를 들고 다니면서
청소를 하는 청소부에 불과하고 ,
사람들이 우리 어떻게 봤을 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이 일은,
우리가 호주 시드니에서
남은 기간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아주 소중한
직업이었기 때문이다.
찰리는 하도 청소를 하니
이제 유리닦기에 달인이 되어 있었다.
서큘라큐웨이에
브런치카페는 완전 통유리에
폴딩 도어라 유리를 깨끗이
닦아놓아야 가게 사장으로 부터
컴플레인이 걸리지 않는데,
지문하나 없는 완벽한 상태였다.
나는 원채 키친 청소를 하다보니,
키친 바 밑에 들어간 조그만한 음식물도
용납하지 못했다.
우리가 이 업에 책임감을
가지고 임했다기 보다는
그렇게 하지 않을 시에
컴플레인이 걸리면
다음 사이트에서 다시 돌아와
미비된 부분을 해주고 가야되는
그런상황이 비효율적인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에,
왠만하면 한번에 끝낼수 있도록
완벽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우리는 한달을 보냈고,
기적을 만나게 되었다.
월급날 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방안에서 핸드폰으로 계좌
확인만 수차례 하고 있었다.
약속된 시간이 다 될무렵엔
나의 통장도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제로에서 4자리 숫자가
찍히는 광경을 우리는
같이 보게 되었고,
우리의 아지트인 방 안에서
숨죽이고 소리를 질렀으며,
그 날 만큼은 요리하지 않고
외식을 하러 한식당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