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동 위의 전신사조(傳神寫照)
내 앞에 놓인 하얀 한지, 붓을 들고 앉으면 마음이 묵직해진다. 무엇을 그려야 할까. 아니, 그보다 어떻게 그려야 할까. 나는 한참을 멍하니 대가의 그림 속 대나무를 바라본다. 그 그림은 형태를 넘어 어떤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보이는 대로 그리려고 했다. 대나무의 곧은 줄기는 어떻게 뻗어 있고, 마디는 어느 간격으로 나 있으며, 잎새 한 장 한 장은 어떻게 드리워져 있는지. 마치 복사기처럼 대상을 정확히 복제하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사조(寫照)’였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베껴 그리는' 것. 그렇게 한참을 그리다 보면, 이상하게도 그림 속 대나무는 어딘가 낯설게 느껴지곤 했다. 형태는 분명히 같아 보이는데, 그 안에서 느껴지는 생기와 기백이 빠져 있는 듯했다. 나의 마음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다 문득, 다른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잎새에서 느껴지는 청량함, 곧게 솟은 줄기에서 느껴지는 꺾이지 않는 절개,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한데 섞여 풍겨 나오는 독특한 분위기. 그것은 형태로는 도저히 잡아낼 수 없는, 어떤 ‘파동(波動)’ 같은 것이었다. 특정 위치에 고정되지 않고 공간 전체에 퍼져 있는 에너지장처럼, 대나무 숲에서 퍼져 나오는 감정의 기운. 나는 그것을 담아내고 싶었다. 그것이야말로 ‘전신(傳神)’이었다. 대상의 '정신'을 '전하는' 것.
나에게 ‘전신사조(傳神寫照)’는 결국 그 두 가지를 한데 엮는 작업이다. 보이는 형태(입자)를 정확히 묘사하면서도, 그 안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기운(파동)을 불어넣는 것. 양자역학의 파동-입자 이중성처럼, 그림 속 대나무는 형태를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요동치는 정신의 파동을 품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완성된 그림은 더 이상 사물의 단순한 복제품이 아니었다. 그것은 대상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내 마음의 물결을 거쳐 다시 태어난 또 다른 존재가 된다.
대나무를 그리려 붓을 들었지만, 나의 심상은 대나무가 변하여 파이프로 옮겨가고 있었다.
꼿꼿하게 솟아오른 기상, 속은 비었지만 단단한 강인함, 그리고 세월의 흔적을 담은 질감. 이 모든 것이 차가운 쇠붙이인 파이프에 고스란히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김남효, ‘배관파이프와 해바라기‘ 2021
그렇게 나는 파이프를 통해 ‘전신사조(傳神寫照)‘의 문인화를 완성했다.
겉모습만이 아닌, 그 안에 깃든 본질을 그려내고자 했던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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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효 박사(Dr. Namhyo Kim)는 대한민국 출신의 화가이자 건축학자, 그리고 양자파동아트(Quantum Wave Art)의 창시자로,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디자인 석사, 홍대 동양화 석사, 연세대학교에서 MBTI & 건축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대한민국 미술대전 문인화부문 최우수상 수상했다. 대표작은 Quantum Wave Art Series 와 Eye Contact, 등 이며 Qwaf 포럼을 개최한 양자파동 예술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