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 타피에스, Künstler gegen die Folter
작업대 앞, 선다.
침묵하는 나무와 마주한 채,
‘Gegen die Folter’ — 고문에 맞서.
이것은 항의가 아니다.
존재의 심연에서 솟구치는
폭력에 대한,
몸과 영혼의 투쟁이다.
흑갈색의 숨결은
색이 아닌,
대지의 무게,
응고된 피,
흙먼지 뒤엉킨 기억의 살결.
붓을 버리고
칼을 든다.
목판 위,
칼날은 고통을 긋는다.
깎여나간 흰 선들,
비명처럼,
신경줄처럼,
사방으로 터져나간다.
어둠과 빛,
존재와 비존재의 격돌.
짙은 어둠 속,
하얗게 드러나는 선은
자유를 향해 몸부림치는
영혼의 마지막 흔적.
물질은 침묵하지 않는다.
그 표면에
고통과 기억을
낱낱이 새긴다.
안토니 타피에스, Künstler gegen die Folter ,1993
세상은
억압과 폭력으로
숨 막혔다.
스페인의 독재,
세계 곳곳의 잔혹함.
예술가로서
고립된 고통을
세상에 드러내야 했다.
판화의 구도는
폐쇄적이다.
무거운 흑갈색은
감옥의 어둠,
침묵의 폭력.
그 안에 갇힌
흰색의 강한 획들,
찢기고 부서지는 몸짓,
속박을 끊으려는
저항의 에너지.
그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다.
흉터이며,
격분의 기록이다.
관람자는
그 흔적 속에서
비명을 들어야 한다.
나무를 깎는다.
부드러운 덧칠이 아닌,
직접적인 대면.
폭력에 대한 역습.
긁어낸 표면,
중앙을 가로지르는
울퉁불퉁한 흰 띠는
일그러진 얼굴,
붕대 감긴 상처.
반복되는 짧은 획들,
폭력의 리듬.
뒤틀리고 교차하며
혼란을 더한다.
오른쪽 하단의 X,
부정과 금지,
익명성과 상처의 봉인.
이에 외친다.
“고문은 안 된다.”
“이 잔혹함은 무효다.”
인쇄기의 압력,
종이에 가해지는 순간,
나는 명상한다.
그 압력은
육체적 고통의 은유.
그러나 종이는 찢어지지 않는다.
저항의 형태로
세상에 드러난다.
이 한 장의 판화가
고립된 고통에
연대하는
작은 벽돌이 되기를.
믿는다.
예술은
말 없는 외침이다.
검고 거친 바탕은 억압과 고통이라는 거시적인 현실을 나타내지만, 그 위를 찢고 지나가는 흰색의 격렬한 획들은 피해자가 겪는 미시적인 내부의 비명과 저항의 에너지를 상징한다. 이 작품은 명확한 형상으로 결정되지 않고, '고통받는 육체'의 상태와 '자유를 향한 갈망‘ 의 상태가 동시에 존재하는 중첩(Superposition)의 영역에 머무르며, 관람자가 이를 바라보는 순간, 비로소 저항의 의미로 수렴(Collapse)된다. 따라서 흰 획과 검은 바탕은 색의 대비를 넘어, 존재(고통)와 반(反)-존재(자유에의 투쟁)의 파동 함수가 끊임없이 요동치는 불확정성(Uncertainty)의 미학적 표현이다.
타피에스 작가 관점에서 그림 읽어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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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화가이자 조각가인 안토니 타피에스(Antoni Tapies, 1923-2012)는 주로 스페인(카탈루냐)에서 활동했으며, 흙, 모래, 대리석 가루 등 비전통적인 재료 를 캔버스에 사용하여 거칠고 질감 있는 표면을 특징으 로 하는 '물질 회화(Matter Painting)'를 개척했고, 그 의 대표작으로는 십자가나 문자 형태를 자주 사용하는 《화이트와 오렌지 바탕의 회색(Gray with White and Orange)》 등이 있다. 이 작품은 1993년에 내가 판화로 새겨낸 <고문에 맞서는 예술가들>(Aus: Künstler gegen die Folter) 포트폴리오의 한 페이지이다. 이 작업은 고통과 저항의 물질성을 탐구하는 철학적 몸짓의 결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