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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빠와 딸의 좌충우돌 미국 여행

아무것도 모르는 한국인 가족 둘의 의기투합

by 신잔잔

계획쟁이 완벽주의자인 아빠는 장시간의 비행이 지치지도 않는지, 숙소를 찾기도 전에 한국에서 사 둔 티켓들을 못 받으면 어떡하냐며 티켓을 먼저 수령하자고 했다. 한국인들이 애용하는 사이트인데 사기를 왜 치겠냐고 아무리 말해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불안하단다. 계속 그렇게 전전긍긍하시더니 티켓을 받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만약 사기를 당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도 자유여행의 일부라고 말하며 또한번 아빠의 신경을 거스르는 소리를 한다. 다행히 서로 아직은 싸우지 말자는 암묵적 룰을 기억하고선 겨우 넘어갔다.


티켓을 찾고 나서야 드디어 숙소에 도착했다. 이 숙소도 사실 한국에서 어렵게 결정한 곳이었다. 숙소를 정할 당시 어디로 가야 할지 둘이서 난감했었던 기억이 난다. 아빠는 당연히 편안하게 호텔로 가는 것을 원했는데, 성별이 다른 가족인 탓에 나는 한 방에서 일주일간 생활하는 것이 상상만으로도 불편했다. 더군다나 맨해튼은 땅값이 어마 무시하게 비싼 곳이었기에 아무리 좋은 호텔도 좁을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의 어색한 시간을 상상해 보니 한국에서부터 몸이 오그라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더 좋은 선택권이 보이질 않는다. 결국 그나마 가격이라도 합리적이라 느껴졌던 'WolCott'이라는 호텔로 정하게 되었다. 나름 시내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던 이 호텔은, 좁고 낡긴 했지만 그 깔끔함 만큼은 유지하고 있었다. 들어오자마자 시차와 장시간의 비행으로 인해 아빠와 나는 두 시간 정도의 낮잠을 청했다.


비몽사몽 잠에서 깬 뒤 아빠와 함께 밖에서 밥을 먹을만한 곳을 찾으러 나갔다. 미국은 처음이라 그 흩날리던 공기마저 서늘하고 어색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말을 걸면 어떡하나, 혹은 총기가 많다던데 내 앞에서 꺼내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한 생각으로 쪼그라든 채 걷게 되었다. 여기서는 뭔가 잘 알아들어야 하고, 잘 대답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다. 그래서 항상 긴장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걸어 다니다가 보이던 Wendy라는 햄버거 가게를 갔다. 주문을 하는데, 주문받던 직원이 뭐라 뭐라 말하는 것이었다. 무슨 말인지 몰라 다시 한번 물어보았다.

"Pardon?"

여전히 무슨 말인지 웅얼거리듯이 말을 하는 것이다. 누가 봐도 여행 온 사람 같아 보이면 천천히라도 좀 말해주지.. 그들의 서비스 정신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결국 무슨 말인지 몰라 'YES'라고 그냥 대답했다.


시간이 지나 우리가 주문한 햄버거가 나왔는데, 아뿔싸, 햄버거가 3개나 있었다. 대체 저 사람은 무슨 말을 내게 했던 걸까. 줄은 길지, 뭐라고 할 만한 영어실력은 안 되지. 미국에서 약자였던 아빠와 나는 결국 둘이 그렇게 햄버거 3개4만 원을 넘게 쓰고 와버렸다. 아빠는 그 중 2개를 억지로 먹고는 하루 종일 속이 부대끼다고 했고, 거기서 콜라 대신시킨 커피는 당연히 아메리카노라 생각했건만 느끼한 라테로만 3잔이 나왔다. 감자튀김은 너무 짜서 먹지 못할 수준에 이르렀지만 아까운 마음에 내가 다 먹어서 하루 종일 물을 마시고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하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그렇게 영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약자였던 아빠와 나는 꾸역꾸역 뉴욕에서의 최악의 첫 끼를 때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첫인상 부터 좋지 않은 모습을 뒤로한 채, 우리는 엠파이어 빌딩으로 향했다. 엠파이어 빌딩.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사실 혼자라면 오지 않았을 법한 곳이다. 원래 나는 도시 여행을 크게 좋아하진 않기 때문이다. 내가 있는 곳도 서울 한복판인데 거기서도 다 볼 수 있는 건물들을, 다른 나라의 빌딩 위에서 본들 뭐가 다를까 싶었다. 그래도 이곳을 가는 이유는 여행 계획을 짰던 아빠가, 숙소에 오후에 도착하게 되면 그 이후에 갈 곳이 마땅찮아 엠파이어 빌딩도 코스로 넣었다고 말했던 것이었기에 군말 없이 따라야 하는 일정이었다. 나는 계획도 짜지 않은 불효녀니깐 아빠한테 태클을 걸 자격이 없었다. 엠파이어빌딩 꼭대기에 올라가, '여기가 나름 미국이구나,' 생각하고 보면 아름답긴 했다. 물론 여전히 빌딩 위에서 도심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풍경은 아니다. 나는 차라리 푸르른 자연환경을 내려다보거나, 아니면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과 대화 나누며 알아가는 것이 좋아하니깐.


엠파이어 빌딩에서 바라본 맨해튼의 전경


엠파이어 빌딩 꼭대기에는 다양한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 많아서 겨우 그 큰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사진을 남기긴 했지만, 하필이면 내가 사진을 잘 찍지도 못했던 시기라 휴대폰 사진마저 별로 예쁘지 않다. 어쩌면, 내가 도시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그 마음이 잘 담기지 않았던 것이었을 지도. 그래도 이렇게 사진을 찍어놓고 추후에 돌아보니 당시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아빠와도 그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의 사진을, 다른 사람들이 나오지 않도록 찍어주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지. 이 사진을 볼 때면 그때의 아빠와 내 모습이 생생하다. 풍경 그 자체는 사진보다는 실제로 두 눈으로 보는 것이 훨씬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나, 사진을 이렇게 돌아보다 보면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영원으로 간직되어 있다. 아마도 그래서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 순간을 가리켜 '순간을 영원으로 만드는 행위'라고 하는가 보다.


엠파이어 빌딩 안에서는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 매우 긴 줄에 서서 기다려야 했는데, 준비성이 철저한 아빠의 성격 상 미리 티켓을 끊어놨던 지라, 줄을 서지 않고 바로 엘리베이터에 탑승할 수 있었다. 이럴 땐 또 아빠의 꼼꼼함이 참 감사하다. 내가 계획을 짰다면 '대충 줄 서면 되지 뭐~'라고 생각해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을 텐데. 준비성 철저한 아빠 덕분에 시간을 아낄 수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하다.


숙소, 그리고 아빠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스텔라 맥주와 몇몇 안주들.


엠파이어 빌딩을 나와 호텔 근처에서 24시간 마켓에 들렸다. 그곳에서 물, 맥주, 과일, 견과류 등 아빠와 내가 필요한 물건들을 조금 샀다. 좁은 호텔로 돌아와 사온 주전부리를 아빠와 마주 앉아 먹기 시작했다. 성인이 되고 가장 좋은 점은 부모님과 이렇게 맥주라도 한 잔 하며 조금 더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현실은 둘만 있는 공간에서 마주 보고 있어도 막상 할 말은 하다. 다행스럽게도 이 날 시차 적응 불가로 아빠와 나 둘 다 피곤해서 맥주 한 모금이 들어가자마자 바로 잠에 빠져 들었다. 얼른 먹고 빨리 자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기에, 둘 다 별말 없이 그 어색한 시간들을 넘길 수 있었다.


그렇게 뉴욕에서의 첫째 날 밤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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