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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ri May 30. 2024

교사가 미워도.

반 아이가 팔 한 쪽을 못 쓰게 되었다.

며칠 간의 결석 뒤 학교에 온 날,

점심시간에 다섯 명의 남학생이 신체 장애와 관련된 영상을 틀어 보여 주고

‘팔이 없는 주제에’라는 노골적인 말로 조롱하였다. 

순간의 자극과 즐거움을 위해 갓 고난을 겪은 마음을 할퀴었다.


교무실로 불려 온 아이들 중 누군가는 순간 분위기에 휩쓸린 자신의 모습에 후회하거나 겁을 먹기도 하고,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 속에 무심히 서 있던 한 아이가 자신이 학폭의 가해자가 될 수 있는지를 먼저 물었다. 팔을 못 쓰게 된 아이의 지난 언행도 그리 훌륭하지 않았다며 날을 세웠다. 

담임 교사는 부모님의 지도가 함께 필요한 사안이라고 판단했고, 방과 후 차례차례 전화를 걸었다. 진심으로 사과하게 하겠다는 부모님, 착하기만 한 우리 아들이 한 나쁜 행동에 놀라 울음을 터뜨린 부모님이 있었다. 그리고 무심했던 아이의 부모님은 사실 자체를 믿지 않았다. 교사가 직접 본 일인지, 목격자는 누구인지, 혼자 한 말은 아닌지. 불신을 바탕으로 한 이어지는 질문 끝에, 팔이 없어서 없다고 말한 게 잘못인지 반문했고 만약 이 일로 우리 아이가 학폭의 가해자가 된다면 상대 아이도 과거에 욕설을 자주 한 적이 있다며 먼저 학폭 신고를 할 거라는 엄포로 전화를 끊었다. 

담임 교사는 그날, 명백한 잘못에 대한 지도를 학부모와 함께 하고 싶었을 뿐이다. 순간의 재미와 자극에 휩싸인 잘못의 엄중함을 학교와 가정에서 반복하여 짚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학교에서 혼나고 무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가 한 번 더 부모님의 엄한 말씀을 들어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루 종일 무겁고 불편한 마음으로 지내다가 다음 날 사과하고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는 반성의 과정. 한 아이는 끝내 그 과정의 시작도 밟지 못했다. 


어떤 학생, 학부모가 나쁘다고 말하는 건 쉬운 일이다. 생각보다 이런 일은 많이 일어나고, 이런 학생도 학부모도 많다. 가슴이 답답하고 그들이 밉고 상처도 받지만 이런 감정들은 덮어둘 수 있다. 정말 중요한 문제는 이 과정에서 학생에 대한 ‘지도’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학생들은 매일 잘못을 한다. 선생님은 이를 지적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책임지게 한다. 우선 반성의 빛이 보이면 된다. 반성하고 뒤돌아서 금세 잘못을 되풀이하면 크게 혼나기도 하지만 이 역시 그 크기만큼 다른 방법을 강구하고 책임지게 하면 된다. 학부모에게 일일이 말하지 않는 학교의 일상이다. 

이 일상에서 담임 교사가 부모님께 전화를 하는 때는 가정에서의 지도가 함께 필요한 경우이다. 아이의 잘못을 공유하고 방법을 논의하려는 것이다. 학교에서의 행동의 맥락을 파악하고, 필요한 지도 방법을 제시하는 것은 전문가의 영역이다. 담임 교사가 엄하게 혼내고 부모님은 마음을 어루만지며 이야기를 들어 줄 수도 있고, 아이에 따라 반대의 경우가 더 적절할 때도 있다. 정교하고 세심하게 이러한 방안을 논의하고자 상담을 하는 것이다. 교사와 학부모 상담의 중심은 언제나 학생이어야 한다. 


그런데, 

정말 그랬나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증거가 있나요? 목격자는 누구인가요? 목격자는 믿을 만한가요?

CCTV가 있나요? 우리 아이는 아니라는데 다른 아이 말만 듣고 그러시는 거 아닌가요?

같은 잘못을 한 다른 아이가 있나요? 그 아이는 어떤 벌을 받았나요?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다 보면 본질이 사라진다.

명확하게 대답할 필요가 없는 소모적인 질문이다. 특히 다른 학생을 어떻게 지도했느냐는 질문은, 차별하는 교사로 만들어 잘못을 덜어내려는 시도이다. 우리 아이의 잘못을 덜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잘못을 지적하는 교사를 무능력하고 허술한 사람’으로 만드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말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아이의 잘못은 공중에 흩어지고 반성할 기회를 놓친다. 

겁먹었던 아이는, “맞아, 잘못은 선생님이 했고, 나는 하지 않았지.”라는 결론을 내린다. 


교사가 밉고, 믿고 싶지 않다. 

이 불신과 미움은 어디서 온 것일까?


학부모가 학생이던 시절이 있었다. 

누군가는 교권이 강했던 시절이라 하지만 나는 교사의 폭력과 강압이 용인되던 때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교권의 실현과 교사의 폭력에 순응하는 것은 다르다.

체벌이 훈육의 한 방법이었고 교실은 무서웠으며, 폭력으로 통제하는 방법이 가능하던 때. 학생들은 대부분 순응했고, 그 중 몇몇은 더 거친 폭력으로 맞섰다. 이 시절에도 교사 중 일부는 폭력과 통제는 진정한 교권이 아니라고 이야기했고, 학생들 중 일부는 문제의식을 가졌다. 평화롭고 민주적인 교실을 위해 진정한 교권과 학생인권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소수의 목소리였다. 그 일부와 일부의 작은 목소리가 씨앗이 되어 인권조례가 탄생하고 체벌이라는 이름의 교사의 폭력은 교실에서 사라졌다. (학생인권조례가 교권을 무너뜨렸다면 학생만 교사의 권리를 무시했어야 한다. 교사가 고통받는 가장 큰 원인이 학부모라는 점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비합리적인 해석이다.)  


지금의 학부모들은 교사가 밉다. 교사의 폭력과 통제 속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학생들에게 교사를 미워하지 말라고 하기 어렵다. 

이 미움 위에,

약자를 대상으로 한 갑질로 인정 욕구를 채우고

타인의 권리와 권한을 제한함으로써 자신을 방어하며

타인의 전문성과 능력을 의심할수록 자신을 강하게 보이게 할 것이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사과하지 않는 것이 강자의 덕목이라는 믿음이 쌓였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지난 시간 폭력을 권리로 행사했던 교사들에 대한 미움이 표출된 것이다.

교사는 교육 전문가이지만,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권위로 인정하기에는 애매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같고 설렁설렁 쉬워 보인다. 교사에게 많은 권한을 주고 싶지 않다. 누구보다 소중한 우리 아이를 교육하는데 엄청난 능력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권리와 권한을 제한하고 싶고, 전문가로서 무한한 믿음을 주거나 인정하고 싶지 않으며 함부로 대해도 쉽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약자로 만들기 쉬운 존재이다. 


미울 수 있다. 

선생님은 우리 아이가 잘못했다고만 하는데, 좋은 점도 많은 아이이다.

좋은 모습을 더 많이 보고 신경쓰고 알아주었으면 한다.

나쁜 아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볼 것만 같아 불안하다. 

평소에 특별히 관심도 없다가, 잘못을 하면 알려 주고 반성하게 하자고 하니 원망스럽기도 하다. 


이러한 학부모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교사로서 하소연도 하고 싶다. 

하지만 한 명의 직업인으로서 ‘내 일이 힘들다, 반 아이들 수도 많고, 업무도 많고 수업 시수도 많다.’라는 이해를 학부모님에게 구할 수는 없다. 모든 일은 어렵고 쉽지 않기에.  

교사의 업에 개선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이를 요구해야 대상 또한 학부모는 아니다. 


부디 하고 싶은 말은, 교사가 미워도 잠깐만 밀어두고 일단 아이부터 지도하자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잘못은 퇴색되고 합리화만 남는다. 아이를 어떻게 지도하면 좋을지 가장 좋은 방법을 찾자. 

그것만 하기에도 많은 에너지가 든다. 소모적, 방어적 질문으로 힘 빼지 말고 아이에게 맞는 가장 정교하고 적절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더불어 아무리 교사가 밉고 부족해 보이더라도 아이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한다. 

부모님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교사’의 지도는 조금도 아이에게 닿지 않기 때문이다. 

반성의 시작을 차단한다. 


부모님께 먼저 상담을 요청하는 교사는 적어도 함께 지도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직업인이자 전문가’인 교사로서 부모님과 협력하려 하는 마음이다. 

이를 받아들인다고 약자가 되는 것도 아니며, 무조건적으로 타인을 높이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것이 한 아이를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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