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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우할배 Feb 04. 2022

'아도'였답니다

추억이 아름다운가요 #3

형제가 다섯이나 되는데 서울대 하나 못 들어간 건 집안의 수치랍니다. 선생님보다 무서웠던 큰형은 재수해서 또 떨어진, 깜냥도 안 되는 나를 위협했습니다. "넌 죽을 때까지 재수를 하더라도 딴 학교는 안 돼."라고.    

운 좋게도 합격을 했고, 시골에 내려갔습니다. 서울대 마크가 들어간 교복을 입고서 말입니다. 금의환향이라 할 수 있었을까요?     


상당히 우쭐한 기분이었습니다. 종가에 가서 판교 할매를 뵀을 때, 원촌 아재가 할머니한테 말씀드렸습니다.    


"어매, 야가 이번에 초시했니더."라고    


그런데, 다섯째 종조모를 뵈었을 때는,


"자가 아도 아이라?"    


라는 이상한 말을 하셨습니다. 의외라는 의미가 많이 담겨 있는 말이었습니다.     


어렸을 적 내 별명이 '아도'랍니다. 좀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있는 별명입니다. 하는 짓이 신통치 않은 데다가 늘 땟국에 절어 있고 머리통만 커다랗고 배는 톡 튀어나와 인간이 될 것 같지 않았나 봅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애두, 어쩜 저 모양이지?'이고, 여기에서 뒷말을 생략하여 '애두'인데 그걸 경상도 말로 '아도'라 한 것입니다. 종조모의 말속에는 '거참, 아도가 어떻게 대학에 갈 수 있었지?'라는 의문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아도'가 맞습니다. 셋째 형님 손에 이끌려 초등학교에 들어갔지만, 공부를 해 본 적이 없습니다.

통지표에는 온통 양과 가로 깔려 있었는데, 하는 짓도 어머니 말대로 '꿩장사'고 '어리배기'였습니다.     


나가서는 언제나 맞고 들어왔습니다. 옥수수를 삶으면 형과 동생은 잘 여문 것들만 먼저 골라 자기들만의 장소에 숨겨두고 먹는데, 나는 나중에 알이 빠지거나 덜 여문 것들을 챙겼고, 숨기는 장소도 먼지 구덩이인 석판 뒤였답니다.     


한 마디로 공부도 못하는 것이 힘도 없고, 하는 짓도 덜 떨어졌다는 것이지요. 학교만 가면 연필을 잃거나 공책을 잃어버리고, 더러는 신발이라든가 그 귀한 비닐우산 등을 잃어버리는 등 제 물건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교과서는 잃어버릴 우려가 없었습니다. 없었으니까요.

왜 그렇게 방치했는지 지금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만,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나에겐 교과서가 없었습니다. 많은 다른 애들처럼 준비물을 가져가 본 적도 없고, 시간표에 따라 책보를 다시 쌀 필요도 없습니다. 교과서는 책 두 권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기억납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초등학교 입학해서 처음으로 구입했던 교과서 한 권, 그 자연책 첫머리의 별자리 그림이 너무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교과서를 사 달라고 한 적도 없었고, 이유는 모르지만 사 주시지도 않았습니다.     


책은 늘 광식이한테 빌려서 썼습니다. 광식이는 한 학년 위였는데, 책 빌려 주는 것이 유쾌하지는 않았나 봅니다. 다른 과목은 그림이 있다고 안 빌려 주고, 재미없는 국어와 산수책만 빌려 주었습니다. 그것도 표지는 떼고 알맹이만 이었습니다. 표지는 빳빳한 종이어서 종이 딱지를 접으면 힘이 세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이 광식네보다 틀림없이 잘 살았는데 왜 책을 빌려야만 했는지 정말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더러 셋째 형님이 '다섯째는 내가 업어서 키웠어.'라는 말을 하셨는데 기억은 없지만 그랬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초등학교를 셋째형 손에 이끌려 입학했었고, 4학년 때인가는 여름방학 방학책을 사지 못한 나를 위해 백노지에 방학책 전체를 옮겨 써서 숙제를 할 수 있게 한 분이 셋째형이었습니다.


마을에서의 생활 형편으로 봐서 방학책을 못 살 정도의 가정 형편은 아니었을 텐데, 참 이상합니다.    


얘기가 다른 곳으로 흘렀습니다만, 이러니 통지표에는 거의 모든 과목이 '양과 가'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가까운 촌수의 또래 아이들- 사촌 ㅊㄴ, 외사촌 ㅈㄴ, 외오촌 ㄱㅈ이의 겯고틀던 발군의 성적은 나의 학교 부적응을 대조적으로 두드러지게 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어머니나 아버지가 성적을 잘 챙기시지 않았을뿐더러 그것으로 인한 꾸중도 별로 없었다는 점입니다.     


가끔씩 작은어머니가 다녀간 후이면 어머니는 속상해하셨습니다. 작은어머니가 사촌 누나 ㅊㄴ이의 성적을 자랑했기 때문입니다.     


서정주 '자화상'의 첫머리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었다'는  

구절이 떠오릅니다.     


나는 몇 할이었을까요?        


    

<< 그때 부모님이 나에게 관심을 가졌더라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교과서를 사 주었으면 공부를 좀 했을까 하고 가정해 봅니다.     

내 대답은 "아니다."입니다. 지금의 내 모습으로 보아 공부보다는 노는 것을 훨씬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방치한 부모님이 고맙습니다. 내가 공부를 못한 이유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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