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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우할배 Feb 06. 2022

동생의 죽음

추억이 아름다운가요 #6

손이 떨렸습니다. 4학년 1반 교실 문은 조심스럽게 열었는데도 드르륵 소리가 크게 울렸습니다. 학생들의 시선이 모두 문 쪽으로 쏠렸습니다. 학교 행사에서 풍금을 도맡아 치시던 동생의 담임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뭐냐?"

"저기요.... 제 동생이 죽어서 이젠 학교에 못 나와요."

"니 동생이 누군데?

"변O원이요."

"응, 알았어."    


나는 목소리를 떨면서 동생의 죽음을 통보했고 동생의 담임은 원인을 묻지도 않고 문을 닫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어젯밤에 동생은 주검이 되어, 창자를 끊어내는 듯한 어머니의 통곡 소리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의 등에는 뻣뻣한 동생의 주검이 업혀 있었구요. 그리고, 그날 밤중으로 동생은 거적에 말려 비서머골 우리 산등성이에 묻혔습니다.    


발이 얼어 사흘째 학교를 못 가고 콩가루 푸대에 발을 넣고 누워 있던 동생의 숨소리가 이상함을 느낀 것은 낮 무렵이었답니다.     


어머니는 11살 동생을 들쳐 업고 십 리길을 뛰어, 봉화 읍내의 몇 안 되는 의원들을 다녔지만 모두 고개를 흔들었답니다. 좀 더 큰 도시 영주로 나가 보라지만 갈 수 있는 교통수단이 없었습니다. 늘 출입이 일이신 아버지께는 물론 연락도 안 되었습니다.    

별 수 없이 예배당골 칠촌 아저씨 내압아재네 집으로 갔을 때, 동생은 어머니 품에서 몸부림쳤습니다. 그리고 헉헉거리며 힘들게 소리쳤답니다.     


"어메, 날 좀 살려 주게. 어메가 왜 날 못 살리는고?"

함께 있던 재종조모께서 안타까이 말했답니다.

"에이구 야야, 어메가 안 살릴락고 안 살리나?"라고.

그리고 동생은 꼬르륵 마지막 숨을 거두었답니다.     


디프테리아랍니다. 목구멍에 허옇게 백태가 끼여 숨을 쉴 수가 없어지는 법정 전염병입니다.     

죽던 날 아침, 동생은 그르릉거리며 힘들게 호흡을 했습니다. 나는 동생에게 말했습니다.    


"야, 입으로 숨 쉬지 말고 코로 쉬어. 입으로 쉬면 병균이 속으로 들어간대."

"어, 알았어."    


이것이 동생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동생은 머리가 컸습니다. 나보다 두 살 아래지만 학년은 세 해가 늦습니다. 나이 차 때문에 넷째형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그래서 결석도 거의 없었습니다. 공부도 곧잘 해서 나의 학교 부적응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여기서 다룰 얘기는 아닙니다만, 내가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중간학교(학교에 가는 도중에 노느라 결석함)를 한 것은 순전히 넷째형 때문이었습니다. 형은 땡땡이의 선수였으니까요.    


일요일 날 아침 상방(안방 옆 상청을 차렸던 방의 이름)에 엎드려 동생과 나는 바닥이 드러난 된장찌개 냄비에서 멸치를 건져 먹으며 내기를 하였습니다.     


함께 읽은 한 권 짜리 '삼국지'의 인물을 누가 많이 외우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과는 늘 동생의 승리였습니다.     


동생은 경쟁 상대였고 나에게 언제나 패배의 아픔을 안겨 주었습니다. 나와는 달리 동생의 통지표에는 평어가 대부분 수와 우였습니다.    


그렇게 추운데 학교 가는 길 중간쯤에 불 질러 놓고 언 몸을 좀 녹이며 중간학교하면 될 것을, 기를 쓰고 학교에 가더니 동상에 걸린 바보 같은 놈이었습니다.     


아버지께 걸려 개꼬리비로 혼나기 전까지 넷째 형은 끔찍이도 중간학교를 많이 했습니다. 나는 형을 따라 다니느라 형만큼 결석을 했지만, 동생은 나이 차 때문에 형의 영향에서 벗어났습니다.     

'형의 영향 속에 있었더라면'하고 아쉬울 때도 있습니다. 그랬더라면 동상도 디프테리아에도 안 걸렸을지 모릅니다.    


동생이 시체로 돌아오던 날, 엉엉 소리 내어 울긴 했었지만 이상하게 눈물은 나지 않았습니다. 슬픈지도 몰랐습니다. 시체를 마주 보는 것이 무서웠고, 그래서 묻히는 곳에 함께 있지도 않았고 다음날이 되어서야 쭈삣거리며 그곳엘 가 보았습니다. 전보를 받은 형님들이 모여들었고 집안은 또 한 번 통곡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도 회한의 눈물을 흘리셨구요.    


얼마 뒤, 우리 안마당에서는 푸닥거리가 있었습니다. 마을 무당 덕구어메가 이상한 차림으로 펄쩍펄쩍 뛰며 무어라 중얼거렸고, 어머니 또한 알 수 없는 말을 하면서 열심히 옆에서 빌었습니다. 막대기를 잡은 넷째 형의 손이 마구 떨렸던 걸로 기억됩니다.     

아마도 동생의 극락왕생을 비는 씻김굿과 비슷한 굿이었나 봅니다. 그렇게 갔습니다.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녀석은 떠나갔습니다.


신라 경덕왕 때 여동생을 먼저 보낸 고승 월명사의 '제망매가'가 생각납니다.    


  삶과 죽음의 길은

  여기 있으매 두려워

  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이르고 갔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서

  가는 곳 모르겠구나.    

 

  아, 극락세계에서

  만날 나

  도 닦으며

  기다리겠노라.    


삶과 죽음에 대해 명확한 인식이 없던 시기이지만 동생의 빈자리는 날이 갈수록 크기를 더해갔습니다.     

남은 된장찌개의 밑바닥 멸치도 더 이상 먹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삼국지를 읽어도 기억을 겨룰 내기 상대를 잃은 독서는 재미가 없었습니다. 누룽지도 국시거리도 전보다 할당량이 많아졌지만 그 맛은 떨어져 갔습니다.    


가끔씩 비서머골에 가서 녀석이 묻힌 곳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왔습니다. 한 달 가량 지났을 때에야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O원아, 이 추위에 너무 힘들지? 니가 없으니까 너무 심심해, 재미있는 것이 없어.'    


그렇게, 그렇게 내 동생 O원이는 가기 싫은 그 먼 길을 영영 홀로 떠나갔습니다.    



서정주의 '귀촉도'입니다.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리

  흰 옷깃 여며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지 못 하는

  파촉 삼 만리    

 

  신이나 삼아 줄 걸

  육날 미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하략)    


사별한 임의 가시던 모습과 이승과 저승의 이득한 거리를 묘사한 후, 못 다한 사랑의 회한을 토로한 시적 자아의 심정을 이해할 듯도 합니다.     

상황도 다르고, 정인의 죽음도 아니지만 전혀 예기치 못한 동생의 죽음은, 죽음이란 삶과 붙어 있으면서도 너무나 멀리 있다는 것을 체득시킨 기막히게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이 내 중학교 1학년 말의 일이었습니다.    

    


《글을 쓰는 내내 늙은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마르고 또 그렇게 됩니다. 늙긴 늙었습니다.     

죽은 동생이 남긴 우체국 예금 통장에는 60원이 저축되어 있었습니다. 참 철이 없었습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기에 찾아서 그냥 군것질로 다 써 버렸습니다.     

조금만 동생을 생각했더라면 무덤 앞에 국화빵 하나라도 가져다 놓았을 텐데. 어쩔 수 없는 ‘아도'였습니다. 참 슬픈 존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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