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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wain Oct 15. 2024

불사

15

"췌장암 말기네요.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겠습니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 반년이었다. 정한은 이대로 죽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미련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던 무색무취 지겨웠던 일생. 솔직히 바로 죽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그에겐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에 꼭 남아있어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가장으로서의 책임. 그에겐 이제 막 중학교에 들어간 아들이 있었고, 과음한 날에만 유독 섹시해 보이는 6살 연상의 아내가 있었고, 상환기간이 25년도 더 남은 아파트 대출이 있었다. 자신을 평생 괴롭혀 온 가난의 고통을 대물림할 수 없었다.


그래, 이대로 편안히 눈 감을 순 없다. 정한은 아주 결연해 보이는 표정으로, 왼쪽 팔뚝에 꽂힌 링겔 침을 앞니로 물어 뽑아냈다. 탁한 빛깔의 핏줄기가 천장으로 찍 솟았다.

'아, 그냥 간호사한테 빼달라고 할 걸 그랬나.'


드라마 같은 걸 보면 간호사와 의사가 아주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퇴원을 가로막던데 이 병원은 섭섭할 정도로 냉랭한 반응이었다.

"다 해서 174만 6천8백 원입니다."

정한은 나중에 아들 명훈의 대학 등록금으로 쓰일 예정이었던 적금 통장을 갈기갈기 찢어 자신의 입원비로 지불했다. 그는 병원 코디가 카드를 뺏어 긁는 그 짧은 순간에 훗날 자신의 유골함에 대고 '그때 그냥 잠자코 죽지 왜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치고 지랄이야 지랄은!'이라며 울부짖을 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미안하다 아들. 아빠가 뭐라도 해보려고 그런다. 뭐라도 해보려고..'

정한은 왼손으로 복부를 부여잡으며 곧장 집으로 향했다. 와이프는 학원에서 돌아올 아들을 기다리며 고추장찌개 한솥을 끓이고 있었다. 암으로 몸져누운 남편을 두고 뭐가 그리 즐거운지 아내의 콧노래는 벌써 2절을 향해 가고 있었다.

"저, 여보 나 퇴원했어.."

정한의 메마른 목소리가 그녀의 콧노래를 끊어냈다.


와이프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남편의 자발적 퇴원에 적잖이 놀랐는지 몸을 공처럼 둥글게 말아 바닥에 엎어진 상태로 갑자기 찬송가를 불렀다. 정한은 그 노래를 반주 삼아 자초지종을 침착하게 설명했다.

"저, 내가 길게 살아 봐야 6개월 살 수 있나 봐."

"주님의 노옴고~"

"근데 내가 계속 병원비나 축내서 뭐 하냐고. 남은 시간 동안이라도 조금이라도 더 벌어야지."

"위대하심으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걱정하지 마. 나 죽기 전까진 먹고 싶은 거 편하게 먹고 몇천은 무리더라도 준혁이 학원비 정도는 벌어놓고 죽을 테니까."

아내의 찬송가가 멎었다. 거짓을 조금 보태자면, 아내가 엎드린 바닥에 노아의 방주를 띄울 수 있을 만큼 흥건하게 눈물이 고여있었다.

"준혁이는?" 정한은 아들이 몹시 보고 싶었다. 그동안 가장으로서의 말뿐인 다짐이었지만

이제 정말 자신의 존재 이유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학원 갔다가 친구 집에서 자고 온대요. 우선 밥부터 먹어요."

그날, 정한은 꽤 오랜만에 나트륨과 고춧가루가 가득한 식사를 즐겼다.


아침이 밝자, 아내는 어디서 이렇게 많이 구했는지 약초 꾸러미를 건넸다.

"어유, 이거 다 먹으면 췌장 녹을지도 몰라."

"아무 말 말고 일단 먹어요. 혹시 몰라 10년은 더 살지."

아내는 정한의 입속에 다짜고짜 새파란 풀잎과 누런 뿌리를 집어넣었다. 병들고 지친 몸이 덩치 좋은 중년 여성의 야무진 손아귀를 이길 리 만무했다.

"우리, 좀 이따 무당집에 가요."

모태 크리스천이었던 아내가 말하는 무당집은 그녀의 덩치만큼 무거운 신앙심마저 무너뜨릴 정도로 명성이 자자한 곳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워 탭댄스를 추게 했다질 않나, 귀머거리에게 영어 듣기 시험 만점을 받게 하질 않나, 심지어는 시한부 판정받은 환자가 손주까지 보고 죽게 해줬다는 풍문도 들려 정한이 가지 않을 이유는 좀처럼 찾기 힘든 일이 되었다.

"아니, 구한말 때부터 대대손손 무당일로 밥벌이했으면 믿을 만하잖아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긴 정한은 대충 옷을 걸치고 밖으로 떠났다. 10월의 가을바람은 매콤달콤했다. 칼바람처럼 매섭게 불다가도 금세 살랑살랑 평화를 되찾는 것이 꼭 암 투병과 비슷했다. 아내가 말한 장소에 다다랐을 때 정한은 솔직히 안도했다. 촛불 두 다스를 켜고 시퍼런 칼날 위를 미끄러질 줄 알았는데 무당집의 외관은 매스컴에 등장하는 것처럼 음침하지 않았다.


'어떠한 장애든 완치를 약속드립니다.' '평생 죽지 않게 해드립니다.'

-기적이 일어나는 곳, 불로장생 연구소 『진시황』

정한은 그 어이없는 문구를 보고 있자니 한숨부터 나왔지만, 어차피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으니, 발걸음을 더 지체하지 않았다.


"혹시 전단지 보고 오셨어요?" 입구 쪽으로 양복 입은 남자가 걸어 나왔다. 아내는 지인의 소개로 왔다고 말했다.

"남편분만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정한은 무서웠다. 무엇보다도 아내가 이 집단에 자신을 흔쾌히 넘기는 게 가장 무서웠다. 훗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날 정한의 아내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보험사에 전화해 남편 앞으로 얼마의 보험금이 책정되었고,

언제 받을 수 있는지 꽤 오래도록 상담했다고 한다.


남자는 별다른 설명도 없이 정한을 검은색 가죽 의자에 앉히고 팔과 다리를 사슬로 묶었다. 정한의 허벅지가 후들후들 떨렸다.

"열심히 살 땐 잘 와 닿지 않다가 막상 죽을 때가 되면 죽음이라는 게 참 무섭게 다가오지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남자는 적어도 정한이 머물던 병원의 간호사보다 친절했다. 남자가 조명을 끄자, 정한은 점점 더 깊고 습한 곳으로 빠져드는 듯했다. 마치 아주 깊어서 숨조차 잘 쉴 수 없는 심해로 빠져드는 것처럼 고막은 먹먹해졌고 가슴이 답답했다. 불사라니 믿을 수도, 믿기지도 않는 헛소리였지만 왠지 여기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가능할 수 있겠다는 아주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초현실적인 분위기에 압도된 정한은 이 모든 상황이 악몽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 남자가 입을 열었다.

"오신 이유는 묻지 않겠습니다만, 신중하게 선택하셔야 합니다. '불사 의식'이 완전히 종료되면 되돌리실 수 없거든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으니까요. 아, 물론 마지막 기회를 한 번 더 드리긴 합니다."


남자가 설명하는 '불사 의식'이란 다음과 같았다. 칼로 상처를 내어 총 9번 피를 쏟아내는데, 8번에서 그만두면 그대로 죽을 수 있지만, 끝까지 참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 불사의 몸을 얻게 해준다는 것.

"고통만 잘 참고 이겨내면 어떤 고통도 느낄 수 없고 불로장생할 수 있습니다."


'고통 참기라..'

그것은 정한에게 있어서 누워서 식은 죽을 꿀떡꿀떡 삼키는 일보다 쉬웠다. 어려서부터 견뎌온 아버지의 폭력, 학교에서의 괴롭힘, 극심한 가난 등 고통이든 외로움이든 무언가를 참는 것은 그에게 전혀 고통이 아니었던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장장 48년 동안 죽음을 참아온 그였으니까. 매 순간 스멀스멀 숱하게도 피어오르던 자살 충동을 참아왔던 그였으니까. 그리고 그런 끔찍한 고통을 자식에게 결코 물려줄 순 없었던 그였으니까.

정한은 유한한 삶의 고통을 아들에게 대물림하느니, 홀로 무한한 괴로움을 감내하기로 했다.


그리고 마침내, 의식이 시작되었다.

서걱서걱 살이 썰리고, 푸식푸식 피가 튀기는, 잔혹한 멜로디가 들려왔다.


흐려진 의식 너머로 아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고마워! 나, 아빠 덕분에 돈 걱정 없이 잘살고 있어!"

중학교 교복이 아직도 어울리지 않는 앳된 얼굴. 그것은 정한의 삶에 가장 큰 동력이었다.

정한은 아들의 얼굴을 더 자세히 보려고 눈을 부릅떴다.

"정신이 드세요? 이제 8번째입니다. 마지막 한 번 남았습니다. 계속할 건가요?"

고통이 너무 극심했던 나머지 기절한 것이었다. 정한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또다시 잃은 정신을 되찾았을 때 정한은 건물 입구에 쓰러져 있었다. 그는 몸을 일으키려다 다시 앞으로 고꾸라져 멀건 위액을 토해냈다. 정한은 양손을 마구 휘둘러 뺨을 때렸다. 몹시 아팠다.

'이거 확실히 꿈은 아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정한은 집이 아닌 동네 저수지로 향했다. 그리고 수심이 가장 깊은 곳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그곳은 정한에게 만큼은 남다른 장소였다. 어렸을 때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가난의 괴로움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여러 번 몸을 던졌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아무리 깊이 저수지를 들어가도

숨이 막히지도, 숨통이 끊어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물속은 물과 달리 고요해서 수만 가지 생각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죽지 않는 몸이니 돈을 많이 주는 험한 일을 해볼까. 무슨 일을 해야 돈을 많이 벌 수 있지. 가족들에겐 어떻게 말할까. 먼 훗날, 모든 가족이 죽고 나만 살면 그땐 정말 견딜 수 없이 외로워지진 않을까. 그렇게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탐할 때쯤 물속에서 익숙한 것을 보았다.

'아아.'

너무나 익숙해서 아름답고,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자꾸 눈물짓게 하는, 나를 쏙 빼닮은 얼굴. 언제부터 물에 빠져있던 건지 알 수 없었으나 아들의 얼굴은 불지도 않고 형체가 선명했다. 울부짖으며 아들을 뭍으로 끌고 나온 정한의 핸드폰에 부재중 전화 수십 통과 문자 메시지가 얹어있었다.


[준혁이 책상 서랍에서 유서를 발견했어요.]

정한에게 아내의 메시지 내용은 아홉 번의 칼질보다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그날 밤, 늦은 시간까지 한참 동안 옷 속을 뒤지는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뭐 찾으세요?” 말을 걸던 경비는 깜짝 놀라서 주저앉았다. 가까이에서 보니 내장이 축 늘어진 남자가 뱃속에 손을 집어넣고 뒤적거리고 있었다. 남자는 울지도 웃지도 않는 흐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 암이요."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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