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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wain Sep 30. 2024

다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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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민은 인생의 20%를 출퇴근길에서 보낸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서울 사람들은 안타까워하는 표정 뒤에 음흉한 비웃음을 숨기고, 경기도민들은 서로에게 자조 섞인 위로를 건넨다.


평생을 닭장 속에서 살다가 뜨거운 기름 속에서 운명하는 닭들도 불쌍하지만 사실 그보다 불쌍한 것은 경기도 직장인이야.


닭장보다 작은 지하철에 얼기설기 끼어서 짧게는 30분, 길게는 한 시간이 넘도록,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생전 처음 보는 남이랑 부비적거려야 하잖아. 그래서 꽤 많은 사람이 지하철보다는 버스를 선호한다.


그런데, 나는 그게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도대체 왜? 세상에 지하철만큼 재미있는 게 어디 있냐고?


오전부터 깔끔하게 잘 차려입은 멋진 신사와 숙녀들, 가끔씩 볼 수 있는 행위 예술들의 무료 공연, 경기도와 서울 어디든 구석구석 닿을 수 있는 편리성, 게다가 내가 직접 운전하지 않고도 단돈 1,400원에 수십 혹은 수백 킬로미터를 달릴 수 있는 극강의 가성비까지.


이렇게 재미있고 신나는 곳을 두고 지루하다니, 불쾌하다니 하는 볼멘소리를 들고 있으면 참으로 힘이 빠진다. 특히, 내가 가장 사랑하는 지하철의 묘미는 사람 구경이다.


언제나 내 시선을 훔치는 형형색색 화려한 옷차림의 젊은 사람들과 돌아가신 우리 엄마가 떠오르게 하는 경로석의 노파들, 그리고 나처럼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오늘도 썩은 간을 간신히 부여잡고 출근길에 나선 가장들의 새까만 얼굴까지.


이 좁디좁은 공간에 어찌나 많은 삼라만상이 담겨있는지. 볼 때마다 충격적으로 새롭고, 즐겁다. 다른 사람들은 출퇴근길 표정이 죽상이던데 나는 지하철에 몸을 욱여넣는 지금, 이 순간이 하루 중 가장 생기 있는 시간이다.


특히 요즘 내가 푹 빠진 것은 옆 사람들의 핸드폰 화면을 구경하는 것이다. 스마트폰이 생기고 나서부터 사람들은 이 네모난 화면에 눈을 떼질 않는다.


어찌나 화면에 너무 열중했는지 하차 역을 지나쳐서 화내거나 당황하는 사람들도 여럿 봤다.


작은 지하철 칸에 세상의 삼라만상이 다 담겨있듯이,

작은 스마트폰에 한 사람의 모든 이야기가 다 담겨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핸드폰 화면을 보는 건 그들의 일상을 보는 것이다. 훔쳐보는 게 아니다. 관찰하는 것이지.


한 존재의 일상을 은밀히 들여다보며 같은 인간으로 은은한 위로를 보내는 것, 그것은 어느새 내 일상의 유일무이한 즐거움으로 자리 잡았다.


내 앞에 있는 양복 차림의 아저씨는 비트코인에 투자했나 보다. 와이프가 메시지로 ‘어제가 아이들 학원비 내는 날이었는데 왜 안 빠져나갔지?’라고 물었는데 읽지도 않고 한숨만 내쉬며 차트를 뚫어져라 보고 있다.


또, 내 옆의 교복 입은 남학생은 대낮부터 최근 화제가 된 모 연예인의 직캠을 두 손가락으로 확대까지 해서 자세히 보고 있었다. 그러다 곧 내 시선이 느껴졌는지 황급히 화면을 가슴에 얹어 가렸다.


내 왼편의 여자도 같은 영상을 보고 있었다. 여자는 이윽고 메마른 표정을 지으며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댓글을 달았다.

‘나도 남잔데, 내가 봐도 얘는 엉덩이 수술한 게 너무 티 남. 목소리도 별로고 얼굴도 별론데 왜 인기 있는지 모르겠음. 이게 바로 마케팅의 힘인가? 역시 대기업을 가야 댐 ㅇㅇ’


각자의 뇌를 작은 화면에 옮겨 담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마치 신이라도 된 듯한 기분에 심취했다. 그러다가 어떤 남자의 화면을 보고, 나는 얼어붙었다.


남자는 구글에서 어떤 단어를 계속 검색하고 있었다.

‘금정역 살인 사건’ ‘여성 살인 사건’ ‘시체 유기’

검색어마다 끔찍한 단어뿐이다.


그의 양 엄지손가락이 ‘살인 사건 최고 형량’을 완성했을 때, 나는 ‘끅’ 소리와 함께 참았던 숨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가 내 파열음을 들었는지 내 쪽으로 고개를 획 돌렸다.


나는 그 타이밍에 맞춰 눈을 감고 소리 없이 길게 하품을 내쉬는 척 연기했다. 이는 내가 누군가를 훔쳐보다 걸렸을 때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다.


남자의 촉은 나의 노하우보다 빠르지 못했다. 남자는 화면 밝기를 최소로 떨군 채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입이 양쪽으로 찢어지며

입가에 기분 나쁜 미소가 담겼다.


따라가야 하나? 일단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만약 경찰이 어떻게 알게 되었냐고 물으면 뭐라고 말하지?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렇다고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그냥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소시민의 무리에

섞이기엔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갑자기 조금 전까지 떠오르지 않던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위험해지진 않을까? 내가 죽으면 우리 가족은? 아니지, 저 살인범 때문에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면? 그게 내 가족이 될 수도 있잖아? 아니야, 지금도 피해자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유가족들은 어떻겠어?


오만가지 생각이 육만, 칠만으로 불어날 때쯤 안내음이 들렸다.

“이번 정차역은 가산디지털단지, 가산디지털단지역입니다.”

가장 많은 인파가 나가고 들어올 이번 역에서 반드시 결단을 내려야 한다!


나는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 남자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자 남자는 매우 당황한 표정으로 내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저, 저기요.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나는 아무 말 없이 있는 힘껏 그를 끌어당겼다. 수많은 인파에 밀려 우리 둘은 지하철에서 내렸다.


그리고 나는 아주 불쾌한 표정을 짓는 남자를 향해 마치 형사라도 된 것처럼 그동안 내가 혼자서 은밀히 수집한 범죄의 증거에 대해 쏟아냈다.


“이봐 당신, 내가 아까부터 지켜봤어. 당신 살인했지? 맞잖아, 금정역에서 사람을 죽였잖아. 시체는 어디다 숨겼어?”

위풍당당한 목소리, 사무실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쫙 핀 어깨. 그때의 나는 형사를 넘어 중생을 심판하는 신과 같았다.


내 기세에 눌렸는지, 아니면 여전히 사태 파악이 안 되는지,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자신의 완벽한 범행에 차질이 생겼는지, 남자는 알 수 없는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박장대소하며 말했다.


“우와, 진짜였네. 아저씨가 ‘1호선 관음 종자’ 맞죠?”

남자는 웃음기가 쉽사리 멎지 않는지 배를 부여잡으며 웃고 있었다.


“뭐? 1호선 관음 종자?”

나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상한 말에 두려움까지 느꼈다.


“네네, 저 진짜 아저씨 팬이에요. 인터넷에서 진짜 유명한데.”

남자는 웃음을 간신히 꺼트리고 나에게 핸드폰 화면을 내밀었다.

3년 전에 게시된 영상의 조회 수는 600만 회가 넘었고 수천 개의 댓글이 달렸다.


남자가 보여준 화면 속에는 나를 닮은 남자와 몸에 딱 달라붙는 원피스를 걸친 늘씬한 몸매의 여성이 담겨있었다.


내가 영상을 재생하자, 화면 속 남자는 여성의 전신을 음흉한 눈빛으로 훑었다. 그 표정이 어찌나 불쾌하고 엉큼했던지 영상으로 봐도 구역질이 났다.


그다음 영상에서는 남자가 주변 사람들의 핸드폰 화면을 슬쩍슬쩍 훔쳐보는 장면이 담겨있었다.

“이, 이게 다 뭐죠?”

나는 믿기 어려운 이 상황에서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고 물었다.

“아저씨잖아요. 진짜 몰랐어요?”


“인터넷에서 <‘1호선 관음종자’ 잡는 미끼 만들기> 영상도 유명해요. 금정역이랑 가산디지털단지역 사이에서 계속 이상한 단어 검색하거나 악플 같은 거 쓰고 있으면 누가 기웃거릴 거라던데. 진짜였네요. 혹시 괜찮으면 같이 사진 찍어도 돼요? 저도 은근 관종이라서 커뮤에 인증하려고요. 아, 제가 말하는 관종은 관음종자가 아니라 관. 심. 종. 자. 저는 아저씨처럼 관음증은 없거든요.”


나는 남자의 말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내가 큰 오해를 했다는 사실만은 정확하게 이해했다.


남자는 지나가던 역무원에게 부탁까지 해가며 나와 사진을 찍었고, 사진을 찍는 내내 내게 고맙다는 말을 연신 내뱉었다.


영상 속에서 사람들을 구경하며 아이처럼 웃던 표정과 달리 남자의 눈동자에 비친 내 표정은 그다지 유쾌해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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