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여행 with.H / feat.G
고향 성주에서 산 세월보다 서울에서 산 세월이 더 길어지면 나를 서울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게 어색하지 않아 질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제주도에서 만난 G는 인생의 반은 부산에서 반은 서울에서 살다가 제주에서 살기로 마음먹고 얼마 전 이사를 마쳤다. 그는 비등한 세월을 두 개 도시에서 살았지만 누가 묻는다면 부산사람이라고 대답할 것 같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도 아직 한참 남았겠구나. 언제 서울사람 되려나. 서울사람이 되고 싶은가. 아직도 잘 모르겠네.
여타 회사의 워크숍 비슷한 것인데 워크는 하나도 하지 않기 때문에 리트릿이라 이름 붙이고 놀다 오는 회사의 연간 행사가 있다. 어느 날 리트릿 준비 TF에서 소원을 적어 내라기에 별생각 없이 바로 떠오르는 것을 적어서 제출했다. 리트릿 당일 그 소원이 대문짝만 하게 적힌 티셔츠를 선물 받았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의 소원을 살펴보며 재미난 스몰톡 많이 하라는 TF의 큰 뜻이 담겨있던 이벤트였던 것 같다. 내 소원은 "오랫동안 서울살기"였다. 소원을 적어 낼 즈음이 집 재계약 시즌이었기 때문이다.
그걸 본 H가 예전에 유리님이 서울에 살기 싫다고 하지 않았어요? 물었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그 말을 할 때에는 거주지에 대한 고민보다는 회사원이라는 직업을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시기였다. 지금은 사람들이랑 부대껴 일하는 게 나름의 적성에 맞고, 사무실에 출근해서 일하는 게 집중도 더 잘 된다고 느끼지만, 에너지가 언젠가 소진되지 않을까, 내 배터리는 얼마나 남았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했더랬다. 그래서 회사라는 공간을 대충 서울이라고 표현했던 것 같다. 그리고 머릿속으론 한적한 동네에서 혼자 일하는 (무슨 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는) 장면을 그렸다.
모순적인 희망사항. 회사가 있는 서울을 떠나고 싶지만, 집이 있는 서울은 떠나고 싶지 않은가 보다. 실현 가능한 소원인가. 신이 소원 들어줄래도 헷갈리겠다.
제주 여행에서 G를 만난 후 동행인 H와 나는 “근데~ 제주도에 살면~” 으로 시작하는 대화를 여러번 나눴다. 제주도라니 내가 이효리도 아니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데, 제주에 있는 내내 어이없게 희망적인 상상부터 지독하게 현실적인 상상까지 몇번을 왕복했다. 직주근접, 적당한 청결과 안전, 내 월급으로 감당 가능한 월세, 지금 집을 구할 때 주로 생각하는 조건은 매우 현재 중심적이다. 내가 어떤 미래 계획을 갖고 어떤 동네에 살고 싶은지는 집을 선택하는데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미래의 '정착지'가 아니라 현재의 조건 좋은 '매물'을 찾을 뿐이지. 그래서 나랑 다른 결정을 한, 그러기로 마음먹은 G의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아, 여기다." 싶은 마음 가는 정착지를 발견하는 찌릿한 감각이 나에게도 찾아오려나. 한편으로 내가 결국 서울에 찌릿하게 될까 걱정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미 서울에서 찌릿하고 있어서 내 자리를 유지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니까.
아무튼, G의 동네에 있는 해변은 오랫동안 기억날 것 같다. 관광객 없이 제주사람들만 가득한 찐 동네 해변가였다. 그들이 바다를 즐기는 방식은 굉장히 시니컬한데 뭔가 정겨워. 신발은 어딘가 벗어둔 채 맨발로 저벅저벅 물을 밟는 사람들 속에서 겉돌던 외지인 둘과 3일 차 도민 한 명이 모습이 계속 떠올라서, 숙소로 돌아오는 택시에서 H와 나는 거의 눈물을 찔금거리며 웃었다. 언젠가 G도 저벅저벅 바이브 내뿜으며 서로의 신발을 믿고 맡길 수 있는 동네 주민으로 거듭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