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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유서

by 기연 Jan 30. 2025

터질듯한 감정을 억누르고 컴퓨터를 켠다. 쓰고 싶은 말들이 머릿속을 돌아다니며 서로 엉키고 그 안에서 작고 큰 모순의 파도가 몰아친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됐는지 모른 채로 나는 망가졌고, 그렇게 인생이라는 길에게 쫓기게 되었다.


1. 나의 안에는 많은 내가 있다. 자제할 수 없는 '나'라는 존재는 '나'를 잡아먹고 '나'를 깨운다. 무엇이 본질인지도 잊어버리고 그렇게 아침을 맞이하고 밤을 반기며 새벽을 지새운다. 어떤 것도 바뀌는 것 없이 그대로.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은 어떠한 감정도 가지지 않은 채 원래의 자리에 그대로 놓여있다.


2.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만 나의 눈동자는 멈춰있다. 돌아가는 머리 위로 나의 생각은 멈춰있다. 꿈도 꾸지 않는다. 현실보다 어두운 악몽 따위 없어진 지 오래되었고, 눈을 뜨면 현실에 대한 고민과 나의 하찮은 현실이 무섭게 나를 다그치기 시작한다.


3. 어떠한 아침을 바라지는 않는다. 아주 오래전에는 조금 더 나아질 하루하루를 바라고 기도했던 적이 있었다. 터무니없는 나의 욕심들은 전해지지 않고 그저 말로 마무리가 되어 공중에 흩어졌다. 세세한 것 하나하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그때의 나는 적어도 희망을 갖고 있었으리라.


4. 희망을 잃는 건 무섭지 않다. 죽음 또한 무섭지 않다. 다만, 그 결과로 향하는 길에서 변해져 가는 나의 모습을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이 무섭다. 더 이상 떨어질 곳 없는 곳에 서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아래에는 더 깊은 심연의 어둠이 나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고, 나는 그대로 잡아먹혔다.


5. 빠져나올 수 없는 감정의 요동침과 끝없는 우울감, 그리고 무기력으로 무장한 나는 다시 일어날 수 없다. 어떠한 일들을 해낼 수 있는 힘 따위 가지고 있지 않다. 어느 무엇도 이겨낼 수 없는 약함을 지닌 채로 그렇게 시간 위에 누워있다.


6. 도착할 곳 없는 여정은 끝없는 미로 안으로 나를 데려갔고, 어디선가 통과하는 방법을 알았었지만 적용하지 못하고 갇혀버리는 어리석음을 들키고 말았다. 창피함과 수치스러움, 그곳엔 점점 작아져 흐려지고 있는 내가 있다. 차라리 없어지는 게, 잊히는 게 나으려나 싶다.


7. 글을 쓰는 건 매일 유서를 쓰는 일과 같다. 현재의 나는 미래의 나를 보장할 수 없다. 한순간에 나는 존재하지 않는 생명체가 될 수도 있다. 알고 있지만, 그래도 열심히는 살았다.


8.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질 수 있었던 건 참으로 축복이었지만, 그 안에 '나'는 없었다. 나는 나를 미워했고, 답답해했고, 부끄러워했다. 도저히 나아갈 힘조차 없어졌을 때도 위로와 걱정은커녕 당연하다는 듯이 실망과 채찍을 건네주었다. 그렇게 나는 나를 미워했고, 나를 밀어냈다.


9.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저 떠나고 싶다. 어디로든, 누군가를 기다리지 않고, 기대하지 않고,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모든 것에게 잊혀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10. 일종의 유서는 일종의 일기이고, 하루를 요약한 문장이며, 현재의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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