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침 노을 Oct 06. 2022

술.

삶이 힘들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내뱉는 푸념이자 한탄. 이를 해소하기 위해 사람들은 술을 찾곤 했다. 술은 건강에 안 좋다. 하지만, 건강만을 고려할 수는 없다. 그런 논리라면 정말 많은 것을 놓치고 살 수밖에 없다.      

술은 뇌를 유혹한다. 뇌는 알코올과 키스한 뒤, 자신의 ‘인간성’을 벗는다.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 우리가 매일 쓰는 페르소나, 인격 역시 벗는다.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은 ‘동물성’. 술 마시면 개가 된다는 것은 논리적이다. 술을 마셔도 정신을 차리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술의 법칙 위반이다. 술의 제1 법칙: 정신 못 차릴 때까지 마셔라!      


고프만은 연기하는 몸에 대해 얘기한 바 있다. 융은 페르소나를 통해 우리가 다양한 인격을 사람들에게 보여준다고 말한다. 푸코는 근대 사회의 개인들이 자신을 규제한다고 주장한다. 니체는 양심의 가책이 인간의 동물적 본성을 억압한 결과라고 단언한다. 학자들의 말을 일상에 대입해보자. 우리는 참고, 또 참고, 끊임없이 참는다. 그렇게 얻어진 것은 피, 땀, 눈물이 아니다. 이것은 분출하는 자들의 전유물이다. 진정 얻어지는 것은, 피로, 탈모, 주름이다.     


사회의 규율, 내면의 정언명령 등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인간이길 포기해야 한다. 내면의 인간성은 탈부착이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비기를 사용한다. 술을 마심으로써.      


술은 우리에게 다양한 장면을 보여준다. 우는 사람, 웃는 사람, 웃긴 사람, 울리는 사람, 기는 사람, 자는 사람, 계산하는 사람, 훔치는 사람, 때리는 사람 …. 지하철과 버스, 도보의 똑같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획일화의 데칼코마니에서 벗어나는 데 술 만 한 것이 있을까. 직장인, 회사원, 샐러리맨 등 이름 잃은 자들이 이름을 되찾게 하는 데 술 만 한 것이 있을까. 혹자는 우리 사회가 술에 너무 관대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술에라도 관대해서 다행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필살기를 강탈당한 캐릭터는 사람들에게 잊힐 따름이다. 술이라는 필살기에 대해 폄훼와 비난을 내려놓을 것.     


이 글에 대해 술을 좋아하는 사람의 자기변호라는 치부를 보내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부정하지 않는다. 반론하지도 않겠다. 다만, 그들에게 권하고 싶다. 술을 마심으로써 자신의 동물성을 드러내는 것은 어떤지 말이다. 


《도깨비》의 대사 하나를 공유하면서 글을 마친다. 

"술이요 술. 포장마차. 낭만적이게"

작가의 이전글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